모든 시민은 기자다

반려견 죽음에 실의 빠진 여가수, 예상치 못한 사후세계

[넘버링 무비 399]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영혼의 여행>

등록|2024.10.13 18:44 수정|2024.10.13 18:44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영혼의 여행>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우리가 때때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감독인 에릭 쿠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장편 데뷔작인 <면로>(1995)가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뉴커런츠 섹션에 초대되었던 것이 시작이다. 이후 꾸준하게 영화제에 참석했던 그는, 올해 영화제에서 신작인 <영혼의 여행>이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더 의미 있는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20여 년 전 당시 영화제를 처음 방문했을 때 한 살이었던 아들 에드워드 쿠가 이번 작품의 각본까지 맡으면서 그 의미가 더 커졌다.

그의 신작이자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된 <영혼의 여행>은 싱가포르, 일본, 프랑스, 세 국가의 합작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쉘부르의 우산>(1965)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프랑스 영화를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우 까뜨린느 드뇌브가 주연을 맡았다. 에릭 쿠 감독은 그가 이 작품에 함께하게 된 것 자체가 영혼의 여행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영혼 간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이번 영화에서 존재를 넘어서는 인물을 그려내는 데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02.
세계적인 명성의 가수 클레어(까뜰린느 드뇌브 분)는 오래 사랑했던 반려견 레옹의 죽음으로 큰 상심에 빠진다. 예정되어 있던 공연을 취소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본 도쿄로 향하지만 감정을 쉽게 추스르기는 어렵다. 공연은 많은 팬들의 성원 속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이 무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공연이 끝난 직후, 클레어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유조(사카이 마사아키 분)는 그의 오랜 팬이다. 한때 인기 있는 밴드의 멤버였지만 지금은 이혼 후에 홀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공연을 앞둔 어느 날, 클레어의 음악을 듣던 그는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를 대신해 콘서트를 찾은 사람은 아들 하야토(타케노우치 유타카 분)다. 장례와 유품정리를 위해 유조의 집을 찾은 아들은 티켓을 발견하고 공연장을 찾는다. 죽음을 맞이한 클레어와 유조는 영혼인 상태로 이승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서로 마주하게 된다. 현실 세계에서의 가수와 팬이 아닌 유령인 상태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당황한다. 죽으면 승천해서 그저 사라진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안심하게 되는 것은 영혼인 상태로는 언어가 달라도 서로의 말을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으면서부터다. 이제 클레어는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왔던 오랜 문제의 답을 구하고자 여행을 떠나고자 하고, 유조는 그를 위해 기꺼이 동행하기로 자처한다.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영혼의 여행>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영화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엄마를 만나러 가야 하는 아들 하야토를 따라 두 사람이 나서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혼하면서 두고 간 서퍼 보트를 되돌려주고 싶다는 바람이다. 두 사람은 생전에 밴드를 함께 했고 엄마는 리드보컬을 맡았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하야토를 가지게 된 엄마는 중절하고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 했지만, 남편인 유조의 반대로 출산과 함께 그만두게 되었다.

이처럼 영화 속 인물 모두에게는 이겨내지 못한 마음의 자리가 하나씩 놓여 있다. 지금 세상을 떠난 상태로 하야토를 따라다니고 있는 클레어와 유조에게도 마찬가지다. 클레어에게는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가족을, 특히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남아 있다. 유조에게는 반대로 아내의 커리어를 꺾은 일에 대한 것과 그로 인해 아들로부터 엄마를 빼앗은 일에 대한 마음의 짐이 남는다.

하야토는 20년 전 자신이 연출했던 작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머무는 상태다. 아버지의 유언을 모두 이뤘다는 생각이 들 즈음의 극단적인 선택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연출했던 <추억의 벽> 속 주인공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일종의 오마주이자 스스로 가장 강렬했던 시간에 대한 회고처럼 느껴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혼인 상태로 그의 곁을 맴돌던 클레어에 의해 저지되고 그 장면은 모두에게 회복의 의미를 갖는 장면이 된다.)

04.
이번 작품에서는 인물들의 영체화를 시도하는 것과 함께 '오본(Obon)'이라는 일본의 전통 명절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양력으로 8월 15일에 기념하는 한 여름의 명절이자 축제인데, 영혼이 지상으로 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두고, 연기를 피워 모시는 날로 알려져 있다. 극 중에서는 이날이 '영혼의 여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시작점이자 모티브로 활용되고 있다. 이승을 떠난 존재가 자신의 자리로 잠시 되돌아오는 날과 지금 영혼이 되어 이승을 떠돌고 있는 클레어와 유조의 모습이 겹치면서다.

영혼에 대한 이야기 이면에 어떤 한 존재와 사건이 지닌 양면에 대한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과거와 현재, 바람과 현실, 믿음과 경험, 그리고 생과 사의 측면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많은 지점이 그렇다. 하야토가 엄마의 선택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던 날 밤에 듣게 되는 사실 또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두 영혼이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의문과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이승을 유영하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자연스럽게 그 이면을 생각하게 된다. 양쪽을 분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면의 합이 아니라 더욱 가까운 곳에, 서로 상호작용하며 얽혀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영혼의 여행>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에릭 쿠 감독은 자신의 커리어 전반에 걸쳐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이런 경향에 대해 그는 스스로 어린 시절부터 가장 호기심을 느꼈던 것이 바로 죽고 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부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소멸하는지, 또는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 하는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작품 <영혼의 여행>은 사후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상상이자, 오랜 시간 이야기화 하고자 했던 물음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 모두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되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 이 영화로 인해 잠깐이라도 두 사람의 여행과도 같은 모습의 사후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에릭 쿠 감독이 하고자 했던 이 영화의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단순한 영화적 경험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의 작은 믿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영화적 체험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