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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여성이 노조의 '독수리 오형제'로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2-2] 정년퇴임을 하고 마주본 나, 흔들릴지언정 후회없이 살았다

등록|2024.10.17 11:43 수정|2024.10.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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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 지난 5월 29일 열린 공공운수노조 의 청소노동자 한마당 자료사진. 청소노동자들이 주체가 돼 한마당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 공공운수노조


이혼 후 경력단절자가 된 나는 아는 지인도 별로 없는데다, 내성적이며 고지식한 성격 탓에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2019년 3월 초, 새로 지어서 모든 것이 새것인 은평성모병원에서 미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청소일은 처음 해보는 터라 환경도 낯설고, 용어도 낯설고 같이 일하는 동료는 더욱 낯설었다. 병원시설에서 미화직의 휴게실은 지하 2층, 보안직의 휴게실은 지하 3층 이런 게 보통이란다. 병원은 보통 근무시간이 8시간 3교대였다. 당시엔 최저시급이라는 것도 모르고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내 자리에서만 열심히 하면, 나만 성실하면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나는 그간의 경험치대로 소신껏 밀고 나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우리 편을 들어주는 관리자가 없었다. 새로 생긴 곳이라 노조도 없었다. 2019년 12월 9일, 은평성모병원을 뒤로하고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취업했다. 월급을 많이 받아서 처음엔 좋았다. 나중에 알았다. 하는 만큼 받는다는 걸. 시급의 시작이 다르고 특근이라는 게 있어서 월급이 많았다는 걸 말이다.

병원이라는 특성상 주말인 토요일에 근무하면 특근수당이 생겼다. 하지만 격주로 근무하는 일요일은 좀 달랐다. 근무한 일요일엔 평일 대체휴무를 한다는 이유로 특근 수당이 잡히지 않게 하여 용역업체에서 가져갔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에게 돌아와야 할 수당을 용역업체에서 챙겼다. 아침반은 식사시간이 아침, 점심 두 끼인데 식대는 한 번만 챙겨주며 이 또한 용역이 챙겼다. 총 일하는 시간은 10시간인데 식사시간 빼고 8시간만 급여를 책정했다.

나는 외래 4층 CT실과 인터벤션이라는 혈관 시술하는 곳, 3개의 판독실을 맡아 쓰레기 수거와 쓸고 닦는 일을 했다. 힘든 자리라고 소문난 곳이었다. 각각 맡은 구역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오전 6시부터 일을 시작하는데 CT실은 7시부터, 인터벤션실은 8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곳이라 그 시간까지 도저히 일을 끝낼 수 없어, 5시 20분부터 일을 시작했다. 다른 구역을 맡은 미화 노동자들도 대동소이했다.

혈관 시술하는 곳은 뇌혈관을 포함하여 온몸의 혈관을 전신마취가 아닌 국소마취로 시술하며 수술실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된다. 제일 힘든 시간은 인터벤션실 청소일로 오전 시술이 12시 30분에 끝나면 12시부터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5개 시술방의 감염 쓰레기, 일반 쓰레기를 구분해 정리하고 닦아내야 한다. 이 작업을 오후 시술이 시작되는 1시 30분까지 완전히 끝내야 한다.

그 시간에만 무거운 74사이즈 감염 박스가 12개, 일반 쓰레기가 특대 사이즈 1봉투, 재활용 쓰레기 특대 사이즈 1봉투, 재활용 종이박스 모음까지 쉴 새 없이 끌어내야 한다. 이것들을 한 번에 나를 수 없어 두 번 나누어 버리고 나면 얼굴과 등엔 땀이 주르륵, 속옷엔 소금이 낀다. 1층 응급실부터 6층까지를 외래라고 칭하는데 두 번째로 험한 자리로 소문이나 유동(특정 공간의 청소를 맡지 않고 빈자리를 찾아 병원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청소하는 사람)들도 무조건 꺼리는 곳이다.

가만히 있을 거면 노조는 왜 하는가?

첫 출근날 노조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입하기 싫었으나 강제적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모든 대화가 거칠었다. 노조원을 살뜰하게 챙기기는커녕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니 일이니 니가 해결해라"고 밀어버렸다. 너무 실망해서 탈퇴를 고민하던 중 같은 층에 일하는 먼저 자리 잡은 민주노총 언니의 권유로 노조를 옮겼다. 노조활동은 청소 일을 하면서 처음 접하게 됐다. 사실 조합원 일이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을 내고, 더하고 같이 행동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2020년 노조활동을 시작했고 조합원들의 통상임금(상여금, 식대)을 찾기 위해서 싸웠다.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조합원들이 돌아가며 일인시위도 하고 용역업체와 함께 노조와해 전략을 짠 세브란스병원을 고소했다. 당시 암 병동 전문 공터에 천막치고 거의 2년간 투쟁을 했다. 늘 함께 행동하는 우리는 즐거웠고 기꺼운 마음으로 투쟁했다. 간간이 다른 현장으로 투쟁연대도 다니고 투쟁기금도 전달하며 마음도 전달했다. 우리들의 노력 덕분인지 여러 단체에서도 항상 같이 연대해주고, 투쟁기금 또한 주셔서 없는 살림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그러던 중 전 분회의 임기가 끝나서 사무장으로 뽑혔다. 이후 지부에서 진행하는 임원교육도 참여하고, 매월 지부에서 진행되는 회의에 분회장 대신 참여도 해봤다.

본관 전체 미화직 회원 수는 본원만 230명인데 한국노총이 110명 정도이고 신 노조가 60명, 민주노총 조합원이 50명 정도이다. 그런데 통상임금 투쟁 때 떨어져 나간 후 남은 조합원은 40명이 되었다. 그러다 4월 전 분회장이 임기 말에 10명을 또 데리고 나갔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연달아 줄줄이 나가면서 마지막에는 조합원 수가 5명으로 줄었다. 우리는 우리를 '독수리 5형제'라 불렀다. 그래도 우리는 달려야 했고, 1명의 조합원이 서울대병원으로 자리이동을 하면서 4명만 남게 되었다. 그 인원으로도 퇴근 후 한 시간씩 한 달간 피케팅했고 이내 정년을 맞게 되었다.

마지막이라 쓰지 마요

2024년 6월 30일, 정년을 맞이했을 때 많이 분하고 많이 가슴 아프고 서러웠다. 우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조금 더 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됐다. 우리를 이끌어 줄 좀 더 강력한 힘이 있었다면, 조합원을 한 명이라도 증원하고 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지만 이젠 일련의 일들이 경험치로 남게 되었다.

정년퇴임을 맞이하면서 또 나를 마주 본다. 지난 한 세월의 나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라는 걸, 60에 이르러서야 인생은 지난 세월을 받아들여야 다음의 나도 있겠구나, 알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같을 수 없고, 조금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는 걸 받아들이고 걸맞은 모습을 찾고 싶었다. 누가 맞고 틀린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고 이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자리에 서더라도 'NO'라고 내 목소리를 내는 용기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고, 한 사람의 노조원으로 한몫을 해낼 수 있는 든든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것에 스스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는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지부 연세세브란스빌딩분회 조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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