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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김태리가 목숨 건 여성 국극, 이런 비밀이 있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정년이>

등록|2024.10.17 13:58 수정|2024.10.17 19:05
tvN 드라마 <정년이>에 나오는 여성국극이 1950년대에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은 당시의 시대 흐름을 감안하면 꽤 경이적이다.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이자 한국전쟁(6·25전쟁)이 있었던 때인 1950년대는 미국문화를 위시한 서양 문화가 범람하던 때였다.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유럽과 미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태를 '서양문화의 범람'으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지금과 달리 1950년대는 그렇게 지칭될 만하다. 한국인들이 제대로 대응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양 문화가 쓰나미처럼 밀려든 시기였다.

서양문화의 대거 유입

▲ tvN <정년이> 관련 이미지. ⓒ tvN


한국문화를 폄하하는 뜻이 담긴 '개화기'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구한말에도 서양문화가 대거 유입됐다. 해방 이후와 1950년대의 문화 현상도 그 시절을 연상케 할 만했다. 거기다가 1950년대에는 미군부대와 미국 경제원조가 한국에서 지배적인 힘을 발휘했다. 이 역시 한국이 서양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 2년 뒤인 1955년 4월 16일 토요일, 국회의장 이기붕이 개의를 선언한 뒤에 자유당 박영종(1917~1959) 의원이 서울대 교수 출신인 이선근(1905~1983) 문교부장관에게 서양문화 범람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신문사 기자와 호남신문사 편집국장을 역임한 박영종 의원은 한국이 외래문화에 대해 "무방비" 상태라며 한탄조의 대정부질의를 했다. <국회 정기회의 속기록> 제20회-제28호에 그의 발언이 수록돼 있다.

"매일 신문을 보면 제1면 기사는 대부분 외국 통신을 실고, 그것은 현실상 부득이한 것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출판물을 볼 때에 외국 간행물 번역물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 창작이나 우리의 독립적인 주장이 출판되고 있는 것이 없고, 라듸오 방송만 보더라도 말할 수 없어요.

그럴 뿐만 아니라 음악·미술·예술 각 문화를 통해 우리의 자주적인 어떤 것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정신 면에 있어서 문교부장관으로서 현재 자재가 부족하고 혹은 재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여러 가지 악조건도 있겠지만,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 그 구상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외국문화가 한국을 휩쓰는 상황에 대해 어떤 구상이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문교부장관은 "미안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전 세계 인류사회 전체를 구원하는 새로운 철학이 이 땅에서 나와야 된다고 이 사람은 믿고 또 외치고 있읍니다"라며 "다만 이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단시일에 구축해야 할 것이냐 하는 이 점만은 미안합니다만 박 의원께 답변드릴 수가 없읍니다"라고 말했다.

문화현상을 총괄하는 문교부장관마저도 미국문화 범람에 대해 "미안합니다"라며 무대책을 시인했다. 여성국극이 인기를 끈 것은 바로 이때다. 그래서 여성국극의 인기는 대단하다.

1999년 2월 23일자 <매일경제> '여성국극 토요일마다 본다'는 40여 년 전의 여성국극 인기에 관해 "40~50년대에는 새로운 연극 장르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김진진·김경수 등 스타 배우를 낳기도" 했다고 말한다.

기사에 거명된 김경수에 관해 1996년 8월 12일자 <조선일보> '여성국극 50년대 영광 되찾아야죠'는 "김씨는 18세 때인 54년에 당시 전국의 극장가를 휩쓸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여성국극단에 단원으로 발탁되었다"라고 소개한다.

기사는 "그 후 57년까지 <무영탑>, <바우와 진주목걸이>, <낙화유정>, <콩쥐 팥쥐>, <춘향전> 등에서 매혹적인 저음의 창(唱)과 미모·연기력으로 관객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박영종이 "음악·미술·예술 각 문화"에도 서양문화가 범람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로 그 시기에 여성국극은 "전국의 극장가를 휩쓸며" 일종의 역주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 '정년이' 속 여성 국극의 매력

▲ tvN <정년이> 관련 이미지. ⓒ tvN


▲ tvN <정년이> 관련 이미지. ⓒ tvN


13일 방영된 <정년이> 제2회는 해산물 노점상 출신의 목포 여성 윤정년(김태리 분)이 여성국극단 오디션을 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정년을 비롯한 오디션 참가자들은 판소리 고수 이용근(김병준 분)이 북을 쳐주는 가운데 노래 솜씨를 발휘했다. 심사위원 셋은 촌티나는 윤정년의 판소리 첫마디를 듣고 노랫소리에 푹 빠지게 됐다.

연기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이 한국형 뮤지컬에서 판소리가 무대와 객석에 울려퍼졌다. 그래서 누가 봐도 여성국극은 한국 전통에 기초한 예술이었다. 거기다가 <춘향전>이나 <콩쥐 팥쥐> 같은 한국 고전들이 여성국극 콘텐츠의 주종을 이뤘다.

신문만 펴면 온통 서양문화라고 박영종 의원은 탄식했지만, 그런 속에서도 판소리와 한국 고전에 기초한 여성국극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한국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지금의 K-컬처 위력과 달리, 서양문화가 한국으로 물밀듯 밀려오는 가운데서 1950년대의 이 K-컬처가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지금보다 조건이 훨씬 불리하고 서양문화가 한국 안방을 잠식한 상태에서 K-컬처가 위력을 발휘했다. 여성국극에 내재된 문화적 저력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만드는 일이다. 위의 1955년 국회 풍경은 우리 문화에 대한 염려를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여성국극 같은 비중 있는 문화 현상을 논외로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그런데 여성국극이 한국 고전만 무대에 올린 것은 아니다. 외국 콘텐츠를 우리의 형식 안에 녹여내는 역량도 함께 보여줬다. 2008년에 <낭만음악> 제20권 제3호에 실린 주성혜의 '전통예술로서의 여성국극'은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국극의 레퍼토리는 기존의 판소리를 분창하도록 각색한 것뿐 아니라 <아리수별곡>이나 <호동왕자>처럼 설화나 역사를 바탕으로 창작한 것,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번안극 <청실홍실>, <오델로>의 번안극 <흑진주>,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줄거리를 윤색한 <햇님달님>처럼 외국문학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무조건 우리 것만 지키지 않고, 외국 문학도 주체적으로 담아냈다. 서양문화가 밀려오는 1950년대에 그 물결에 떠밀리지 않고 도리어 한국 전통의 틀 안으로 변용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던 것이다.

1950년대는 구한말만큼이나 외래문화가 대거 유입된 시기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여성국극이 역주행을 했다. 그 안에 내재된 한국 전통의 힘에 관해 경외심을 갖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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