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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마지막 길, 상여가 이토록 화려했던 까닭

[한국의 유물유적] 하늘 가는 길 동반자였던, 지금은 볼 수 없는 문화유산 '상여'

등록|2024.10.23 20:31 수정|2024.10.23 20:31

▲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 ⓒ 국립민속박물관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에 존재하는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주의 시간으로 바라봤을 때 '눈 깜짝할 새'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 또한 이 무한한 순환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여러 과정을 거친다. 탄생을 시작으로 해서 성년이 되어 혼례를 올리고 가정을 이루다가 결국에는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른다. 죽음 또한 뭔가의 생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프랑스 인류학자 아놀드 반 게넵(Arnold Van Gennep, 1873~1957)은 '통과의례(通過儀禮, Rites of Passage)'라고 정의했다. 또한 이러한 통과의례는 격리·전환·통합이라는 3단계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했다.

▲ 상여행렬 ⓒ 국가유산청


한 인간이 삶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마지막 의례인 죽음을 처리하는 '상장례(喪葬禮)'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공통점이 있기도 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고인이 살았던 시대의 국가 이념과 종교 또는 민족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민속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의 전통의례인 상례는 개인적 차원이 아닌 지역공동체적 의례로 받아들여졌다. 지역구성원의 일원이었던 한 개인의 죽음은 그가 살았던 공동체 사회와 무관 하지 않았고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상사(喪事)가 나면 모두가 참여하고 부조하는 공동행사로 치러졌고 이는 미풍양속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상장례의 내용과 형식은 급속하게 변하였다.

1980년대 이후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가족 구성과 주거 형태가 바뀌게 되었고 우리의 전통적 상례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상업적 목적을 가진 장례업체의 등장에 따라 상례는 이들의 절차에 따라 규격화·표준화되면서 옛 풍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 망자의 원혼을 달래주는 ‘진도 씻김굿’ 국가무형 문화유산이다 ⓒ 국가유산청


이제 우리 전통 장례 모습은 공연장에서나 불 수 있는 유산이 되었다. 출상하기 전에 죽은 이의 원한을 풀어주는 '씻김굿'이나 상두꾼들이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민속극 '다시래기' 등은 국가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출상 전날 벌이는 민속극 ‘진도 다시래기’ 국가무형 문화유산이다 ⓒ 국가유산청


또한 장례 절차의 마지막 발인 단계에서 망자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구하는 도구인 '상여(喪輿)'는, 옛날 영화나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돼버린 지 오래다. 현재 3점의 상여가 '국가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를 통해 과거 우리 상여와 장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화려함의 극치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

▲ 국가민속문화유산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 ⓒ 국립민속박물관


중장년층 이상의 세대라면 한 번쯤 구슬픈 상엿소리와 함께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구경을 했던 아스라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밤길에 외딴 상엿집 앞을 지나면서 머리가 쭈뼛서는 무서움을 느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16세기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저술한 '가례집람(家禮輯覽)'에 따르면 죽음을 마무리하는 상여는 원래 중국에서 소나 말이 끄는 수레였다. 그러던 것이 주자의 '가례(家禮)'를 수용하면서 사람들이 어깨에 메는 가마 형태로 바뀌었다.

오늘날 장례식에 사용하는 운구차로 최고급 승용차 리무진을 사용하듯이, 과거에도 화려하게 장식한 상여를 사용했다. 망자가 마지막 가는 길이고 자식들이 부모에 대한 최대한 효도라 생각했기에 크고 호화롭게 장식했다. 이러한 상여는 곧 집안의 '부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산 상엿집, 상엿집은 상여를 보관하던 곳으로 마을의 외딴곳에 있었다 ⓒ 국가유산청


현재 남아 있는 상여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상여 중 하나로는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산청 전주 최씨 고령댁 상여'가 있다.

이 상여는 경남 산청군 전주 최씨 고령댁에서 1856년 최필주(崔必周 1796~1856) 공의 장례식 때 사용하기 위해 특별 제작한 상여다. 당시 경남 산청군에서 만석꾼이었던 최필주의 아들이 300냥을 주고 6개월에 걸쳐 제작했다고 한다.

보통의 상여들이 단층이나 2층 형태인데 반해 이 상여는 4층 누각의 기와집 형태를 취하고 있다. 상여 1층은 망자의 시신을 모신 관을 덮는 덮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사방을 검은색 휘장으로 장식했다. 밖에는 청‧황‧녹색의 3색 천을 둘렀다.

1층과 2층에 정(丁) 자형의 청룡과 황룡을 달았고 네 귀퉁이에는 봉황을 조각했다. 3층 지붕 앞 뒤에 망자를 호위하듯 희광이가 칼을 높이 빼어 들고 서 있다. 난간에는 수많은 인물 조각상들이 망자의 저승길이 외롭지 않도록 길동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여의 장식물을 '꼭두'라고 한다.

▲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 앞면. 각종 꼭두 장식들이 화려하다. ⓒ 국립민속박물관


▲ 상여장식물. 청룡과 황룡 ⓒ 국립민속박물관


3층 지붕 아래에 연꽃이 피었다 시들어가는 장면을 시차별로 조각했다. 마치 망자의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듯 흥미롭다. 4층은 기와집 두 채를 포개 놓은 목조건축 양식을 그대로 모방하였다.

지붕의 추녀와 용마루에는 이승과 저승을 오간다는 여러 마리의 새가 장식되어 있다. 전면에 가득한 12지신과 각종 그림들은 문양이 다양하고 색깔도 화려하다. 조선시대 상여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전주 최씨 고령댁 상여는 1996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풍부원군 상여'

▲ 현존하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 대여와 영여로 구성되어 있다. 영여는 망자의 혼백을 운반하는 조그만 가마다 ⓒ 국립춘천박물관


이 상여는 조선 후기 대동법을 시행했던 김육(金堉)의 아들 청풍 부원군 김우명(金右明 1619~1675)의 초상 때 나라에서 하사하여 사용한 상여다. 부원군은 왕의 장인을 말하며 김우명은 현종의 장인이며 숙종의 외할아버지다. 숙종은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후하게 지내게 하였고 상여와 장례용품 일체를 하사 하였다.

이 상여는 긴 멜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 햇빛을 가리기 위해 푸른색 천을 펼쳤다. 난간의 앞 뒤에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황머리와 용을 정교하게 조각하였고 검은 천 위에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다. 고정틀 가운데에 삼천갑자년을 살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 '동방삭(東方朔)'이 망자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있다.

김우명 상여는 시신을 운구하는 '대여(大輿)'와 '영여(靈輿)'로 구성되어 있다. 영여란 신주(神主)와 명기(明器) 등 고인의 혼백과 관련된 것을 모시는 작은 가마다. 멜대 위에 방처럼 생긴 사각형의 몸체를 얹었고 맨 위에 네 개의 지붕선이 표시된 반원형의 지붕을 올렸다.

▲ 상여장식물 동방삭. 동방삭은 삼천갑자(18만 년)를 산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이런 상여장식물을 '꼭두'라고 한다 ⓒ 국립민속박물관


▲ 상여장식물 저승사자 ⓒ 국립민속박물관


앞뒤로 각각 한 명씩 두 명이 운구한다. 영여는 대여 앞에 서서 망자를 인도한다. 허리 높이에서 두 사람이 운반한다 하여 '요여(腰輿)'라고도 한다. 장례가 끝난 다음 망자의 위폐를 싣고 집으로 돌아온다. 요즘은 영정사진이 이를 대신한다.

상여와 함께 명정대(銘旌帶)‧만장대(輓章帶) 등 상여 부속구도 포함되어 있다. 명정대는 붉은 천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의 신분을 밝히는 깃발이다. 운구할 때 상여 앞에 서서 행차를 표시하고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만장대는 망자를 애도한 글을 적은 깃발로 명정대의 뒤쪽에 선다.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이 상여는 현존하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양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당시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했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었다. 왕실 상여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1982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 됐다. 김우명의 장지였던 강원도 춘천 안보리의 상여막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 개관 때 기증되었다.

대원군이 아버지 묘 이장할 때 쓴 '남은들 상여'

▲ 대원군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할 때 쓴 남은들 상여 ⓒ 국립고궁박물관


남은들 상여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이장할 때 사용한 상여로 '행상(行喪)' 또는 '온량거(轀輬車)'라고도 부른다. 원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었으나 "가야산에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묫자리가 있다"라는 말을 듣고 1846년에 충남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가야산 자락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묘를 이장할 자리에 '가야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 실력자 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옮겼다. 훗날 대원군의 아들과 손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조선의 26대 왕 고종과 27대 왕 순종이다. 1868년 고종 5년에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에 의해 남연군 묘가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경기도 연천에서 충남 예산의 가야산 까지 약 500여 리의 먼 길을 상여로 운구할 때 각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운반하는 방법을 택했다. 마지막 구간인 덕산면 남은들 마을 사람들이 남연군의 상여를 극진하게 모셨기에 그 보답으로 상여를 마을에 기증했다. 이후 마을 이름을 붙여 '남은들 상여'라 불렀다.

▲ 남은들 상여에 장식된 용과 봉황. 동방삭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보다는 조촐한 모습이지만 귀후서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했다. 지붕 위에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을 새겨 넣었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예산군 덕산면 남은들 마을입구의 상여막에 보관되어 오다가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상여 자체보다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이장할 때 썼다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74년 국가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상여를 단순히 망자의 시신을 옮기는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고 혼이 함께 간다고 생각했기에 최대한 화려하게 꾸며 예를 갖추었다. 비록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선조들의 삶과 죽음의 철학이 담긴 상여와 전통 장례문화는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우리의 소중한 민속문화유산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매거진<대동문화> 145호(2024년 11, 12월)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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