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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장에서 김광동 위원장이 하지 않은 말

[거꾸로 가는 진화위 ③] 진실 규명 가로 막는 2기 진화위

등록|2024.10.15 15:08 수정|2024.10.16 16:58
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 민간인 학살 분야 군법회의 판결 사건을 재조사하기로 하고 ▲ 농성 유족을 검찰에 송치하는 등 피해자를 탄압하며 ▲ 상층부 간부들이 망언을 일삼고 부적절하게 처신하는 등 과거 청산 역행이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비판하고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글을 과거사 연구자, 활동가, 작가 등이 몇 차례에 걸쳐 게재합니다.[기자말]
10월 10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국정감사가 있었다. 국정감사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상식 의원은 2기 진화위가 1기 진화위보다 진실 규명 비율이 떨어진 이유는 위원장의 개인적 가치관이나 주관적 판단 때문이 아닌지 질문했다. 이 질문에 김광동 위원장은 "더 많은 사건을 오래된 기간에 살펴보기 때문"이라고 답변했으며, 이옥남 상임위원도 "1기로부터 15년이 지났기 때문에 사건을 증명하거나 참고해 줄 참고인을 확보하는 게 어렵다"고 답변했다.

▲ 지난 10월 10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상식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는 김광동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 국회방송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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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동 위원장 답변 영상 ⓒ 국회방송


군경에 의한 희생 사건 절반 가까이 미해결 상태

실제로 진화위가 87차 전체위원회(2024.9.24.) 의결 사항을 기준으로 홈페이지에 게시한 '진실규명 조사⸱결정 현황'을 보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은 미해결 사건이 많고 진실규명 비율이 낮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은 ① 한국 군경에 의한 사건(이하 '군경 사건')과 미군 등 유엔군에 의한 사건(이하 '미군 사건'), ② 인민군과 지방 좌익 등에 의한 사건(이하 '적대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법(이하 '진실화해법') 제2조에는 진실규명의 범위를 6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기 진화위는 군경 사건과 미군 사건을 진실화해법 제2조 1항 3호(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 사망·상해·실종 사건)을 적용해 조사했다. 적대 사건은 제2조 1항 5호(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까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을 적용해 조사했다.

2기 진화위는 군경 사건과 적대 사건은 그대로 적용하되, 미군 사건은 불법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별도로 분리해 진실화해법 제2조 1항 6호 "역사적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조사하고 있다.

2기 진화위에 신청된 군경 사건은 적대 사건보다 2.5배 정도 많은데 여순사건위원회로 1,139건을 이관하고도 여전히 45% 정도가 미해결 상태이다. 이것은 적대 사건은 17% 정도가 미해결로 남은 것과 대비된다. 진실규명 비율을 살펴보면, 군경 사건은 진실규명 비율이 30% 정도이며, 1기 진화위에서 진실 규명했던 것을 확인한 사건을 포함하면 34%가 진실규명된 상태이다. 이는 적대 사건 진실규명 비율(67%)의 절반에 그친다. 여기에 미군 사건까지 포함하면 미해결 사건의 비중은 더 커지고 진실규명 비율은 더 떨어진다.

▲ [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1국 군경 사건과 적대 사건 조사 결정 현황 ⓒ 진실화해위원회


2기 진화위처럼 4년 동안 조사 활동을 했던 1기 진화위와 비교해 보면, 1기 진화위는 조사 개시 후 3년 6개월이 지난 무렵인 2009년 하반기에 미군 사건을 포함한 민간인 집단희생 8,177건 중 5,875건(72%)을 종결하고 5,195건(전체 사건의 64%)을 진실규명으로 결정했으므로 군경 사건 분야에서는 2기 진화위의 실적이 훨씬 더 저조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진화위는 적대 사건의 진실규명 비율이 군경 사건보다 월등히 높은 점과 관련해 "관련 기록을 찾기 쉽고 참고인 확보가 용이하다"고만 설명했다(한겨레 2024.7.11.). 그런데 MBC 등의 보도로는, 이 분야 사건을 담당하는 조사1국의 황인수 국장이 2023년 10월 직원 대상 교육에서 "남한 쪽 만행 3개면 북한 쪽 만행 3개로 균형을 맞추라"고 하면서 군경 사건과 적대 사건 진실규명의 숫자적 균형을 맞춰 달라고 발언한 적 있다. 이처럼 조사1국장이 진화위에서 의결을 하기도 전에 미리 진실규명 결정 비율을 정해 놓고 조사하라는 말까지 한 상태라, 피해 유족들은 자신이 신청한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지 못하고 진화위 활동이 종료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필자는 2기 진화위의 군경 사건 진실규명 부진의 구체적 원인은 무엇인지, 다른 해결 방안이 없는지 2기 진화위에 근무했다가 퇴직한 조사관 몇 명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현미경 들여다 보듯이 희생 입증 증거 요구해

우선, 전 조사관들은 "2기 진화위는 1기 진화위 활동 후 10년이 지나 달라진 조사 여건을 반영해 희생 인정 기준을 달리 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1기 진화위의 인정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도 어려운데, 갈수록 증거를 요구하는 수준이 높아지고 심의가 엄격해졌다. 어떤 면에서는 1기보다 요구하는 입증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

진화위의 진실 규명에 활용하는 자료는 문서 자료와 진술 자료로 나뉜다. 문서 자료는 경찰, 사법부 등 과거 가해 기관에서 생산한 문서, 피해자의 사망 신고 내용을 기록한 제적등본 등의 공적 자료가 있고, 족보, 신문 기사, 연구서 등 민간에서 작성한 문서도 있다.

그러나 군경 사건은 분단 반공 체제에서 오랫동안 기록이 은폐되거나 왜곡됐으므로 사건을 입증할 수 있는 문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적대 사건과 비교해 보면, 사건 현장에서 희생자의 시신 수습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제적등본이나 족보에 사망 일시와 장소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 결국 진술로만 입증해야 하는 사건이 많다.

적대 사건보다 군경 사건에 더 까다로운 입증 기준 적용

그런데 2기 진화위는 적대 사건보다 군경 사건에 요구하는 희생 입증 수준이 훨씬 더 높다고 한다. 일례로 적대 사건에는 참고인 진술 없이 시신 수습 여부와 신청인 진술만으로도 희생자로 인증한 사례가 다수 있다('전남 영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학산면을 중심으로', '전남 장흥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대덕읍을 중심으로', '전남 장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북일면・북이면・북하면을 중심으로', '전남 장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2)' 등).

또 전 조사관들에 의하면, 참고인 진술을 인정해 주는 범위도 훨씬 넓다. "경산 박사리 사건은 상해 피해자들의 경우, 피해와 관련해 병원 기록 등 객관적으로 제시한 증거 자료가 없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날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지 않은 후손들과 마을 주민들의 전문 진술만으로 피해를 인정해 줬다. 적대 사건은 피해자의 손자뻘 되는 사람들 진술도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한 경우도 있다"라고 말한 조사관도 있다.

반면, 군경 사건은 "진실 규명 대상자의 시신을 찾았다 하더라도 복수의 참고인 진술을 요구했다. 목격 참고인을 어렵게 찾은 경우에도 그 1명의 진술만 있으면 인정하지 않으며, 전문 참고인의 경우 2명의 진술을 확보해도 인정하지 않은 사례가 허다했다", "위원회 상층부에서 신청인이나 참고인의 진술을 의심부터 하고 근래 발생한 형사 살인 사건처럼 검토했다"고 한다. 즉, 7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최근에 발생한 사건처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를 요구하므로, 참고인 진술이 있어도 진술만으로는 인정받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군경 사건 중에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처럼 마을에서 여러 명이 함께 끌려가 집단학살 당한 사건이 많다. 그러므로 1기 진화위 보고서 기록을 참고해 그 마을이나 지역에서 있었던 학살 사건의 전체 그림을 그리고 맥락을 파악해야 사건의 진위를 가릴 수 있다. 그런데 2기 진화위 상층부는 집단 학살을 부정하고 맥락을 무시하면서 각각의 사건을 '우연히'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 개별화하여 다루면서, 개개인의 희생 사실만 미시적으로 들여다 보니 오히려 희생 입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이 같은 마을에서 함께 끌려가서 학살된 경우에도 족보 기록이 있으면 진실규명이 되고 그런 기록이 없으면 진실규명이 안 되는 일까지 생긴다고 한다.

이처럼 2기 진화위 상층부는 적대 사건은 쉽게 통과시키지만, 군경 사건에는 높은 입증 조건에 맞추기를 요구하고 입증 자료 부족을 이유로 소위원회나 전체위원회에서 안건을 상정하지 않거나 심의를 지연해 왔다고 한다. 조사관들은 개별 사건마다 증거를 있는 대로 찾으려고 발품을 팔았지만, 그렇게 조사해도 위원회 상층부의 결재를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런 조건에서는 군경 사건의 진실규명 비율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기관 자료의 악용

2기 진화위의 군경 사건에 대한 편파성은 문서 자료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전국 각 경찰서에서는 한국전쟁 때 군경에게 피살된 사람의 가족을 사찰하기 위해 1980년대 초반까지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 <신원기록편람> 등의 자료를 작성했다. 1980년 내무부 치안국에서 전국 경찰서에 지시한 <신원기록일제정비계획>에 의하면, 이 자료들은 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이 아니라 생존자와 가족의 '사상과 충성심'을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1기 진화위는 이 자료들을 과거에 가해 행위를 했던 국가기관이 남긴 '불법 학살의 증거'라고 보고 희생자 확인을 위한 증거 자료로 활용했다.

▲ 영천경찰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전 5권, 1979) 중 5-1 ‘처형자 명부’ 컴퓨터 입력자료에 실린 경북 영천군 화산면 당지동’ 정립분에 대한 기록. ⓒ 1기 진실화해위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2기 진화위는 이러한 자료가 나온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공적 자료는 기본적으로 신뢰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자료의 무오류성을 강조하고 있다. 조사 과정에 모든 자료는 비판적으로 접근해 한계를 분석하고 맥락에 맞게 선택적으로 활용해야 함에도 특정 자료의 무오류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자료의 비판적 독해를 불가능하게 하고 분석의 질을 떨어뜨린다.

더구나 진화위 조사에 활용하는 국가기관 자료는 단순한 '공적 자료'가 아니라 과거사 정리 대상인 '과거 정권에서 가해 행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관'에서 작성한 것이므로 이 자료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은폐되고 왜곡된 부분을 밝히는 것도 진실규명의 중요한 과제다. 2기 진화위는 1기의 성과를 바탕으로 진일보한 결과물을 생산해야 하는데도 이러한 태도로는 보고서의 질을 향상할 수 없고 역사적 진실규명 작업을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2기 진화위는 자료에 적힌 특정 낱말을 근거로 피해자의 사상과 전력을 심사해 일부 피해자를 진실규명 대상에서 배제하고 있다. '영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과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에서 이러한 사례가 있었으며, 이는 국정감사에서도 문제 제기됐다. 지난 9월, '충남 남부 지역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희생자 백락정 씨 사건에 대해서도 군법회의 사형 선고 판결문이 나왔다는 이유로 2기 진화위가 재조사를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진화위는 진실화해법에 따라 불법적 희생 여부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아니라, "부역혐의자는 적법 절차 없이 죽여도 된다"는 이념을 퍼뜨리는 새로운 국가폭력 기관이 된다.

<양민피살자신고서>와 <6・25사변 피살자 명부>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2기 진화위가 국가기관 자료를 편파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일례로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1960)에 수록된 <양민피살자신고서>를 희생자 확인을 위한 보조 자료로 한정하고 있다. 이 자료는 1960년 제4대 국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학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특위를 설치하여, 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경남·경북·전남 등 각지에 출장하여 조사한 결과를 작성한 자료다. 이 보고서에는 당시 조사특위가 시군별로 접수한 <양민피살자신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지나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국가기관의 공적 기록으로, 1기 진화위 현지 조사를 통해 그 신뢰성을 확인했다. 1기 진화위는 이 자료를 진실규명 과정에 중요한 희생 입증 자료로 활용했고, 피해 유족들이 배상청구소송을 할 때 사법부에서도 주요 증거 자료로 활용했다.

▲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1960)에 수록된 『양민피살자신고서』 영천군 화산면 당지동 정립분에 대한 기록. ⓒ 1기 진실화해위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이와 대비되는 자료로 1952년 공보처 통계국 명의로 발간된 <6·25사변 피살자 명부>가 있다. 이 자료는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 59,994명의 신원을 기록한 것으로 2003년에 월간조선사에서 <피살자 5만 9994명 : 6·25사변 피살자 명부>라는 제목으로 다시 정리해 발간했다. 2003년 발간 자료에는 김광동 위원장이 "6·25사변 피살자 명부 분석 : 의도적인 국가 엘리트 말살"이라는 제목의 해제를 쓰기도 했다.

이 명부는 당시 지방행정인력을 동원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역사학자 정병준은 2008년에 쓴 논문에서 "이 명부들이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해주는 관련 문서들이 발굴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이 명부들의 정확한 작성 경위와 구체적인 작업 과정 등은 아직까지 미지수로 남아있다. 또한 관련문서의 부재로 인해 이들 명부의 신뢰성, 정확성을 정확히 판별하기 어렵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이 명부는 전쟁 중인 1952년에 작성한 것이므로 포로수용소 수용인이나 실종자도 명단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1기 진화위에서도 조사 과정에서 명부의 오류를 발견한 적이 있다(1기 진실화해위 '영광 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함평 11시단 사건', '완도군 민간인 희생 사건' 등).

▲ 1952년 공보처 통계국 명의로 발간된 <6.25사변 피살자 명부> ⓒ 월간조선사


2기 진화위에서 <6·25사변 피살자 명부>는 별다른 검증 없이 적대 사건 조사에 주요한 증거 자료로 쓰고 있다. 반면, 제4대 국회에서 발간한 <양민피살자신고서>는 주요 증거 자료로 인정하지 않고 보조 자료로만 쓰도록 제한하고 있다. 전 조사관들은 군경 사건에서 희생 입증에 중요한 자료를 이렇게 제한하는 것도 편파적이라고 지적했다.

진실규명 불능을 위한 로드맵?

진화위는 한시적 기관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4년의 기간에 진실규명을 하려면 다음과 같은 로드맵이 필요하다. ① 1년 차에는 사건 접수와 조사 개시, ② 2년 차에는 신청인 진술 조사와 문서 자료 조사, ③ 3년 차에는 참고인 진술 조사, 보고서 작성과 심의 의결, ④ 4년 차에는 남은 사건 해결과 종합보고서 작성.

1기 진화위의 경우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지만, 이러한 로드맵이 어느 정도 작동했다. 그러나 2기 진화위에는 이러한 로드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업무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지 않고 오히려 희생 입증 수준을 더 높여서 심의하다 보면 조사와 의결이 지연될 수밖에 없고, 입증 기준을 통과하기 어려운 사건은 미해결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다가 2기 진화위는 활동 종료 시점에 미해결 사건들을 무더기로 불능이나 각하로 처리하지 않을까? 혹시 이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진실규명을 위한 로드맵이 아니라 진실규명 불능을 위한 로드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닐까? 이에 관해 전 조사관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기 진화위 상층부도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지는 있죠. 그런데 1기 때는 진실규명에 초점을 뒀다면 지금은 불능에 초점을 두는 게 다르죠.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화해하기 위한 진실화해법의 취지에 따라 역사적으로 은폐된 사건의 진상을 최대한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불능'이라는 식으로 가는 거죠.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런 조짐이 보이지요."

"진화위의 진실규명 과정을 배상 청구 소송을 위한 예비 심사 정도로 여기면서 심의 과정에 진실화해법의 취지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게 문제죠. 2기 진화위 상층부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러는 거예요. 어쩌면 그분들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여기 들어왔을 수도 있어요.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겉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진실규명을 할 마음이 없는 거죠. 결국 제대로 안 하고 도망가려는 것 같아요."

"2기 진화위 상층부는 적대 사건 피해자는 우리 편으로 보고 군경 사건 피해자는 돈을 노린 거짓말쟁이로 보는 시각이 있어요. 이처럼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해 없이, 국가폭력을 피해자의 시각이 아닌 가해자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문제라고 봐요. 그러니 2기 진화위가 진실규명 기관이 아니라 부역자 심사기관이 됐다는 말이 나오는 거죠."

폐쇄적인 조직 운영과 징계 위주의 관리

전 조사관들은 진화위는 사건 조사와 심의 의결을 비공개로 하고 있으며, 주요 쟁점을 공론화 해 건전한 비판이나 의견을 수렴할 장치가 거의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가령, '진술로 희생자를 인정할 때 그 신뢰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국가기관 자료의 성격은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주요 쟁점을 논의할 때 전문가와 관심 있는 시민, 피해자들과 소통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폐쇄적 구조에서는 위원 개인의 식견에 의존해 문제를 판단할 수밖에 없고, 결국 몇몇 위원에 의해 심의 결과가 좌지우지된다. 위원 중 법률가는 있지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전문가가 없는 것도 문제다.

또 다른 조사관은 진화위의 조직 관리 방식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시적 기관에서 민간인 학살과 같은 어려운 과제를 조사하려면, 조사관들을 격려해 사명감과 열정을 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2기 진화위에서는 징계 위주로 조직을 관리해 왔다. 여러 차례 조사관 징계 조치를 했고, 2023년에는 검경 수사관을 동원해 조사관 표적 감사를 해 조사관 9명을 징계했다. 조사관에게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하겠다고 협박한 일도 있었다(한겨레 2024.1.17.; 2024.8.21.). 김광동 위원장의 '노근리 망언'이 언론에 공개됐을 때는 조사관들에게 '보안 서약서'를 강요했다(한겨레 2024.7.15.). 조사관들은 이렇게 징계를 경험하고 나면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진실규명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민의 생명권'을 기준으로 활동하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진화위는 피해자의 요구로 설립된 기관이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의 경우 전국적 단위로 조사한 최초의 기관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기관이다. 진화위를 독립적 기관으로 만든 이유는 과거의 가해 세력인 정부 기관을 상대로 조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개인의 정파적 편견에서 독립적이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위원장과 위원회 간부들은 좌나 우를 떠나 '국민의 생명권'을 기준으로 활동하면서, 이념적 편파성을 극복해야 한다.

과거사 정리는 과거 정권이 저지른 국가 폭력의 진상을 규명하여 과오를 바로잡고 피해자인 국민과 화해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진화위는 설립 취지에 역행해 직권을 남용하고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가 자신과 사상이 다르다고 '부역자'로 낙인찍어서는 안 되며, 정치적인 이유로 진실규명 불능을 의도해서는 안 된다. 유족을 사기꾼으로 몰거나 모욕해서는 안 된다. 또한, 조사관을 범죄 피의자로 대하며 수사 대상으로 삼고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조사관 인권을 소속 기관에서 보호해야 한다.

과거사 국가폭력 사건은 과거 정권이 진실을 은폐해 왔으므로 국가가 책임지고 입증하고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진실규명 입증 요건도 현재의 조건에 맞춰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 또, 민감한 사안이 아니면 심의 과정을 공개하고 외부와 소통할 수 있도록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진실화해법을 개정해 신청 기간과 조사 기간을 연장하고, 더 나아가 과거사 기구 상설화 가능성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은 내년 상반기에 대규모 진실규명 불능 사태를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지역 공동체 안에서 분열될 수 있으며, 진화위가 피해자와 갈등하고 대립하면서 파행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기회가 있다. 진화위는 남은 기간에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에 최선을 다해 치유와 화해의 길을 선도했던 기관으로 역사에 남길 바란다.

* 글쓴이 김상숙은 1기 진실화해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했다. 현재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국가에 의한 젠더폭력 과거청산'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10월항쟁 -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돌베개, 2016), 《민주노조, 노학연대, 그리고 변혁》(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공저), 《한국현대사와 국가폭력》(푸른역사, 2019, 공저),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사》(선인, 2020,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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