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이상화·이육사... 우리 민족의 자존심
[오늘의 독립운동가 37]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 맞아 생각해보는 독립운동 문인들
▲ 한용운, 현진건, 이상화, 심훈(왼쪽부터)의 모습. 현진건 초상은 정연지 화가의 작품, 다른 사진들은 국가보훈부 누리집 게재 사진임. ⓒ 국가보훈부, 졍연지
한강 작가가 아시아 여성 문인 최초이자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문학세계를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이라 평가했다.
우리나라 어떤 신문은 10월 12일 칼럼을 통해 "'5·18' '4·3'을 피해자가 섰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시선에 불편해 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여론주도층의 그같은 공식 발언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 결과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역사 왜곡" , '채식주의자'를 "도덕 문란"으로 폄훼하는 인식이 유포된다. 정부기관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경기도교육청까지 나서서 한강 작가의 소설에 '난도질'을 했으니 일부 일반 국민이 그러는 것을 어찌 탓하겠는가.
'5·18', '4·3'만이 아니라 '독립운동'도 말만 꺼내면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해 말하고 있으므로 문학에 한정해서 예를 들면, 이광수·김동인·서정주 등 허다한 반민족행위 문인들의 작품은 "순수해서 좋고", 현진건·이상화·이육사 등 대한민국정부 인정 독립유공자들의 글은 "저항적이라서 싫다"고 한다.
반민족행위자들의 시나 소설을 새삼스레 또 읽는 일은 힘에 겨우므로 언급을 생략할까 한다. 앞에 인용한 모 신문의 간부도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를 읽다가 "숨이 멎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 수준인가 싶어 자책이 된다.
민족문학가 이야기를 하면 "불편"한 분들을 위해 독립유공 문인 몇 분을 소개 드린다. 출생연도 순으로 한용운·현진건·이상화·심훈·주요섭·이육사·김광섭·윤동주 등이다. 반민족행위 문인들은 많고 독립운동을 한 문인들은 몇 분 안 되는지, 떠오르는 면면이 얼마 안 된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만해 한용운
한용운(韓龍雲)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의 한 분이다. 1894년 동학혁명에 참가한 이력이 있고, 그 후 한때 만주 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는데, 1905년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에 들어 승려가 됨으로써 '불교인'으로 역사에 각인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사태가 일어나자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유랑하다가 1913년 귀국해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6년 서울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해 민중계몽운동에 힘쓰는 한편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2월 24일,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만나 독립운동 방안에 관해 협의했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등 문서들의 초안을 검토했다. 이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는 초안을 '독립선언서'로 바꾸게 만들었다.
민족대표 33인에 해인사 승려 백용성이 불교계 대표로 동참하게 만들었고,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해 인사말을 하였다. 결국 한용운은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소에서 징역 3년을 살았다.
그는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문학 분야 공헌으로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 발간으로 저항문학의 지평을 넓힌 일이 대표적이다. 문화운동 분야에서는 1931년 월간지 <불교>를 인수해 불교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 고취에 힘쓴 일을 들 수 있다.
일장기 말소 의거를 일으킨 민족문학가 현진건
현진건(玄鎭健)의 직접적 독립운동은 1936년 8월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시 일으킨 '일장기 말소 의거'가 대표적이다. 손기정 선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세계를 제패했을 때, 사진에서 일본 국기를 삭제하고 게재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얼렸다. 이 일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그의 또 다른 공로는 〈운수 좋은 날〉 등 우수한 민족문학 작품을 다수 발표하여 독립운동사상을 널리 전파한 데 있다. 당대의 대표급 소설가였던 그의 문학활동을 총독부는 눈엣가시로 여겼고, 마침내 창작집 <조선의 얼굴>에는 판매금지, 동아일보에 게재되고 있던 장편소설 〈흑치상지〉에는 연재 중지 조치가 취해졌다.
〈빼앗긴 들에도 본은 오는가〉의 이상화
이상화(李相和)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이다. 그를 설명하기 위해 'ㄱ당'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른 사실 등을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된다. 김상기 저서 <윤봉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의열독립운동의 상징 윤봉길 의사는 이 시를 읽고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했다.
심훈(본명 심대섭)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34년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가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여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상록수〉는 "당시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킨 것은 물론 현재까지도 시대를 초월하여 불멸의 민족작품으로 남아 있다(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뿐만 아니라 그의 시 〈그날이 오면〉은 "그가 얼마나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이를 위해 분투하였는지를 가슴깊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공훈록). 〈그날이 오면〉에는 "〈상록수〉에서 보여준 계몽의식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하였던 저항의식이 더욱 강하게 시적으로 변모되어 나타났고 (중략) 저자는 저항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모두 2연으로 된 시 전문을 읽어본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주요섭, 이육사, 김광섭, 윤동주 ⓒ 국가보훈부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소설가는 작품 경향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독립유공자가 아닐 듯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주요섭(朱耀燮)은 17세이던 1919년 평양에서 적극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숭덕학교 졸업생·재학생들인 원보훈·김진경·김건형·이태서 등과 함께 등사판 '독립신문'을 발간·반포하다가 피체되어 5개월 동안 고문과 옥고를 당했다.
그 뒤에도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1년 12월 23일, 상하이 삼일예배당에서 재상해한인학생회가 개최되었을 때 "대한독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야 한다"는 취지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
1925년 10월 상해한인유학생회·청년동맹회·삼일공학학우회· 상해소년회 연합으로 프랑스조계 내 삼일당에서 연설회를 개최했을 때에도 '민족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또 1926년 11월 상하이 소재 한인유학생 단체들의 통합체인 상해한인학우회가 창립되었을 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1927년 3월 상하이한인청년회 창립총회에서도 집행위원에 선출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주요섭의 활동을 비교적 상세하게 진술하는 것은 그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지 않을까 싶은 필자의 '기우' 때문이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 주요섭, 〈광야〉의 이육사
감옥을 17회나 드나들다가 끝내 옥사한 이육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일 것인가!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한맺힌 절규가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청포도〉를 다시 한번 읽어본다.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리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성북동 비둘기〉의 김광섭과 〈서시〉 및 〈별 헤는 밤〉의 윤동주도 있다. 김광섭은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모교인 중동중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쉼없이 일제를 비판해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앙양하다가 1941년 2월 21일 피체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3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서시〉 그리고 〈별 헤는 밤〉의 윤동주
윤동주는 21세이던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해 송몽규 등과 민족정신과 조국의 독립에 대해 토론하면서 〈서시〉·〈별 헤는 밤〉·〈자화상〉·〈또 다른 고향〉 등 주옥 같은 항일민족시를 창작했다.
1942년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후 "민족문화의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공훈록)"한다는 이유로 일제에 피체되어 1944년 3월 31일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윤동주는 살아생전 시집 한 권 출간하지 못한 채 순국했다. 경우 28세에 지나지 않았으니 '향년'이라는 어휘도 적절하지 못하다. 〈향수〉의 시인이자 윤동주의 문학적 스승 정지용은 그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우리 나이)가 되도록 시도 발표해 본 적도 없이!"라고 절규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전문이다. 〈알 수 없어요〉·〈운수 좋은 날〉·〈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사랑 손님과 어머니〉·〈상록수〉·〈광야〉·〈성북동 비둘기〉·〈서시〉 등을 남긴 독립유공 민족문학가들에 대해, 그리고 항일운동 지사들의 공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보면 "불편"하다니, 그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맹세하면서 힘들게 살았던 우리 선조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 뿐이데!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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