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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스웨덴에서 목격한 것... 한강의 진심을 보았다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 데뷔작 <붉은 닻>부터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톺아 읽기

등록|2024.10.17 14:46 수정|2024.10.17 15:07

▲ 2016년 5월 24일 한강 작가가 신작 '흰' 출간 기념 및 맨부커상 수상 관련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 권우성


쓰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쓰는 게 온당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지난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로 나는 줄곧 도파민 분비 과다 상태였다. 말을 얹고 싶은데, 얹을 말이 없어 괜히 손가락이 허공을 헤맸다.

다들 직간접적으로 한강의 자장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 무슨 말이건 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2007년 대학 새내기 국문학 수업 시간에 그의 소설 <몽고반점>을 처음 접했고, 문학회에서 <채식주의자>로 토론을 했다. 그 해 '국문인의 밤' 연사로 그를 섭외하려던 일도 생각난다. 2018년부터 2년가량 <서울신문>에서 문학 기자를 할 때는 강연에서 세 번 그를 만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전화를 걸었다(연결은 잘 되지 않았다).

가장 오래 본 것은, 한국이 아닌 스웨덴의 도시 예테보리에서였다. 2019년 9월, 한강은 그곳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에 참석했다. 그가 연사로 나선 세미나는 이틀에 걸쳐 모두 매진이 됐다. 스웨덴의 독자들은 근작인 <흰>(2018)에 관한 질문을 주로 던졌고, 스웨덴에 번역 출간된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흰>을 모두 읽었다는 이도 꽤 됐다.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부커상 수상자의 위용과 함께,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그리 먼 일만은 아니겠다는 체감을 했다.

말을 얹고 싶어서 선택한 길은, 그의 책을 다시 읽는 것이다. 분명 전에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내 여자의 열매><바람이 분다, 가라><희랍어 시간><작별하지 않는다> 등을 읽었었는데 이상하게 글을 쓰려고 했더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는 소설 쓰는 과정을 두고 '쓰다 말고 잠깐 골목을 걸을 때, 어항 밖으로 감고 있던 한 눈을 뜬 것처럼 아슴아슴 눈동자가 시릴 때가 있다' (산문 <기억의 바깥>)라고 했는데, 그의 소설을 읽는 내 모습이 항상 그랬다. 고시원에 살며 첫 사회생활을 하던 때, 다시 취업 준비를 하던 시기 각박한 현실을 잊기 위해 폭식하듯이 읽었기 때문에 더욱 아득하게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근데 그냥, 한강을 읽고 나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네' 하는 원초적인 이기심에 입각한 안도감이 들어서 하루를 더 살게 했다. 사실 내 인생이 여유로울 때는 소설 속에서 세상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이들이 부담스러웠고, 인생이 팍팍할 때에야 훨씬 와닿는 레퍼런스가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랬다.

'붉은 닻'처럼 녹슬며 버티기

▲ 한강 작가의 데뷔작 <붉은 닻>이 수록된 소설집 <여수의 사랑> 겉표지 ⓒ 문학과지성사


소설집 <여수의 사랑> 수록작 <붉은 닻>은 소설로서의 그의 데뷔작이다. 한강 작가는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책은 노래하고 술 마시는 삶을 살다 세상을 홀연히 떠나간 아버지와, 남겨진 세 모자의 이야기다. 신발 한 짝만 남기고 간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인적 없는 동네를 지키는 어머니, 아버지를 꿈꾸는 스스로를 환멸하며 술로 몸과 정신을 망가뜨린 형 동식, 군 입대 후 휴가를 나와도 집에는 코빼기도 안 비칠 만큼 마음이 멀던 동생 동영이 등장한다. 가까스로 서로와 스스로를 붙들고 사는 이들은 오랜만에 한마음으로, 아버지가 있을 때 유일하게 안온했던 풍경인 '소풍'을 떠난다.

<붉은 닻>은 스스로와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감응하는 이들의 세계다. 세 모자는 아버지의 사후 언젠가는 제 자리로 돌아올 서로와 스스로를, 바다의 풍랑 속에서 조용히 녹슬어 가는 '붉은 닻' 마냥 기다리며 버틴다. <붉은 닻>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서기원 소설가와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붉은 닻>은 매우 서정적인 작품이어서 육체적인 병과 마음의 병을 앓아 온 형과 동생과 그들 간의 미묘한 갈등, 사라진 남편 대신 그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안쓰러운 모습이 섬세한 문장 속에 깊이 박혀 잔잔한 긴장과 화해의 밝은 전망을 유발시킨다."

한강이 <샘터> 기자이던 시절 친분이 있던 소설가 최인호는 이런 소감을 남겼다. "참 어두운 이야기다. 그런데 후반부에선 이 어두운 가족이 바다로 소풍을 가는구나. 그게 나는 참 좋더라."(한강 산문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최인호 선생님 영전에>)

개인적이어서 정치적인 <채식주의자>

▲ 지난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시민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작품들을 고르고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그의 작품들을 읽으려는 독자들이 몰리면서 한강의 책들은 엿새 만에 누적 기준으로 100만부 넘게 팔렸다. ⓒ 연합뉴스


"애초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분리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소년이 온다>가 역사적인 사건을 담고 있지만 굉장히 개인적인 책이고 <채식주의자>는 정확히 꿰뚫을 수 없는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은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적인 책이다."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진은영 시인과 함께 '사회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해 한강 작가가 했던 말이다. 나는 저 언설이 자신을 대표하는 두 작품에 대한 가장 적확한 분석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1960~1970년대 미국을 휩쓴 '제2물결 페미니즘' 슬로건과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특별한 매력도,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이던 젊은 여성 영혜가 돌연 채식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상성의 범주에서 급격히 멀어진 영혜에게는 남편의 방관과 강간, 아버지의 폭력, 형부의 관음, 정신과 의사의 폭력과 같은 응징이 가해진다. 그가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꿈' 때문이다. 꿈에서 유년 시절 자신을 문 개를 잔인하게 처벌해 먹어 치웠던 기억을 소환한 영혜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먹어 치우는 육식의 논리를 거부한다.

신수정 문학평론가는 "한강의 소설은 여성 채식주의자를 통해 육식문화로 대변되는 남성적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저항적 움직임을 보여준다"며 "남편과 아버지 등 가족 공동체가 채식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을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적었다.(논문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채식'의 의미>)

여럿의 목소리로 듣는 증언문학 <소년이 온다>

▲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 소중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

스웨덴 한림원이 내놓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선정 사유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답하는 책이 5‧18 광주를 소재로 한 그의 2013년작 <소년이 온다>다.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그러할 뿐 아니라 가장 그러한 소재다."(신형철 문학평론가)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5‧18은 '현재 진행형 이슈'이기 때문이다. 2024년 현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5‧18 북한 개입설'에 대해 "가능성은 있다"고 하는 나라에서. '역사 계승'을 명목으로 전두환의 사진이 보안사령부의 후신인 국군방첩사령부에 걸려 있는 나라에서, 2023년에서야 5‧18 당시 국가에 의한 성폭력이 인정된 나라에서 말이다.

<소년이 온다>는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와 희생자들의 시신을 안치하던 장소인 상무관에서 일하던 형과 누나들이 겪은 5‧18 전후 삶의 모습을 그린다. 소설은 동호를 '너'라고 서술하며 여러 인칭이 6개의 장에 걸쳐 등장한다. 이를 두고 한강은 "1장부터 시간이 흘러오는데 80년 5월에 1~2장, 85년(3장), 90년(4장), 2002년(5장) 2012년(6장), 현재(에필로그)까지 오는 소설"(2019 예테보리국제도서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동호가 '너'라고 호명되면서 30여 년 세월을 건너 우리에게 오는 걸음걸이"라며 "형식 자체로 말을 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부연했다. <소년이 온다>를 쓰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는 그는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이 소설이 나를 착취해서 나의 생명과 자신을 맞바꾸고 있다는 생각"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소년이 온다>는 역사를 왜곡하고 소년을 모독하는 현실에 적극 답하는 책이기도 하면서, 계엄군 가운데서도 잔인한 군인과 소극적인 군인, 동호처럼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상무관의 인간 면면에 대해 질문하는 책이다. 또한 지난 9월 44년 만에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에서 쏟아진 증언들을 먼저 조명했던 책이기도 하다. 광주의 양장점에서 일을 하다 상무관에 합류했던 '선주'가 경찰에 연행돼 하혈이 멈추지 않는 고문을 당했으며, 이후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한강의 손을 거쳐 한국과 전 세계의 독자들이 알게 된 이야기다.

그래서 노벨위원회는 <소년이 온다>를 두고 이같이 평가한다.

"1980년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 사건에서 살해된 인물,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 책은 이 사건을 잔혹한 현실화로 직면함으로써 증인문학의 장르에 접근한다."

한강의 글쓰기, 고통에 감응하는 글쓰기

▲ 2016년 5월 소설 '흰' 출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한강 작가 ⓒ 연합뉴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면서…" (지난 11일, 한강 작가의 아버지 소설가 한승원)

노벨상 수상 후 기자회견과 아버지가 열겠다던 '잔치'를 마다한 한강 작가의 이유다. 시대의 고통을 감각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 감응해 온 작가의 답변답다. 스웨덴 공영방송 SVT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비슷한 취지로 말했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한강이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 당시 런던‧파리 도서전 등에 참석 배제 지시가 내려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폭력을 증언하는 그가,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와 완성하고 나서가 달라지는 걸 느꼈는데, 인간의 폭력에서 시작해 배로 기어서 인간의 밝은 부분에 다다르려 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라고 했다. 꾸준히 폭력을 목도하고 증언해 온 그가 다다른 결론은 "우리 안에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믿고 싶었다" 였다.

제주 4‧3을 다룬 근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면서 그는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산문 <출간 후에>)라고 적었다. 이어 그는 말한다. "그렇게 덤으로 내가 생명을 넘겨받았다면, 이제 그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가진 동안 쓰는' 한강을 읽고 우리가 할 일은, 현실을 직면하고 도처에 널린 고통에 감응하는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의 책을 읽고, '아슴아슴 눈동자가 시린' 이후에 마주한 세상은 전과는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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