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예산 1조 넘었다는데... 일한 돈 못 받는 사람들
[K-콘텐츠 전성시대의 그늘] ③ 외주화와 불황 속에 급증하는 방송산업 임금체불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방송노동환경 개선을 위해서 활동하는 공익법인입니다. 한빛센터가 운영하는 미디어신문고로 최근 접수되었던 임금체불 사례를 각색하여 K-콘텐츠 전성시대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노동의 모습을 살펴봅니다.[기자말]
▲ 허울뿐인 K콘텐츠 전성시대, 방송 산업 대규모 임금체불 고발 증언대회지난 6월 11일,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방송산업에서 발생한 대규모 임금체불 사례에 대해 고발하는 증언대회를 열었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다음 주까지 주겠다는 덧없는 말
"일단 다음 주까지는 기다려 보려고요."
방송 산업에서는 요즘 임금체불 사례가 말 그대로 폭발하고 있다. 호황이 있으면 불황이 있는 것은 당연하니까 그저 감내해야 하는 일일까. 문제는 보험처럼 위험할 때 보호해줄 수 있는 안전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 안전망으로 사회보험이 있을 것이고, 노동조합이나 협회, 단체일 수도 있다. 그것도 없다면 가장 기본적으로는 노동법에 의한 보호가 일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기본적이다. 그러나 방송 분야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말 한 마디로 잘릴 수 있고, 계약서 제목으로 노동법 적용이 안 된다고 우길 수 있는 관행이 자리잡고 있다.
과거에도 제작비 미지급 사태가 가끔 보도되기도 하였다. 최종적으로 방송을 편성하고 방영한 방송사에 지급 의무를 또는 관리 책임을 요구할 수 있었다. 현재의 구조는 많이 달라졌다. 방송사를 정점으로 했던 산업의 질서가 OTT와 유튜브 등의 플랫폼에 의해서 완전히 재편되고, 이제는 외주제작이 오히려 보편적이 되었다.
중소규모의 제작사가 난립을 하면서, 편성이 결정되기 이전에 혹은 구두로 불확실한 약속만 믿고 제작이 진행되기도 한다. 책임을 최종적으로 물을 주체는 베일에 가려졌고, '대박'의 기회만을 탐하다가 '사고'를 친 제작사는 뻔한 면피만 늘어놓으며 시간을 지체한다. 정부는 "K-콘텐츠"라며 "국가전략산업", "예산 1조 원"이라고 말하지만, 기본적인 임금체불조차 방관하는 행정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종사자들은 지쳐서 업계를 떠날 고민을 하게 한다.
▲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안 주요 재정사업 편성 자료문체부는 올해 K콘텐츠 지원예산을 1조 원을 넘게 지원한다고 발표했지만, 현장 당사자들에게는 지독한 불황만 계속되는 것이 2023년의 상황이다. ⓒ 문화체육관광부
터지면 피해는 눈덩이, 드라마 제작현장의 임금 미지급
드라마 촬영에는 촬영, 조명, 그립, 동시녹음 등 여러 직군이 동시에 투입된다. 촬영이 개시되면 현장에 투입되는 인원을 어림잡아 100명쯤 된다.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 만큼 제작사가 책임져야 하는 드라마 제작비의 규모가 다른 프로그램보다 클 수밖에 없다. 뒤집어보면 제작사가 이를 제대로 책임지지 않으면 억대의 임금체불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런 사례들이 현장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라마가 편성이 확정되지 않은 채로 제작이 진행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수개월 동안 임금 지급이 밀리는 일은 예삿일이다. 한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는 석 달 넘게 진행되었던 촬영은 제작비 문제로 결국 제작 중단되었고, 현장에서 일한 스태프들은 그 후로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 확인된 피해사례만 10여 명에 이르렀고, 피해액만 수천만 원을 넘었다. 노동청에 임금체불로 신고를 했지만 노동자로 인정이 안 된다는 결과를 받아야 했다.
이미 2018년 특별근로감독과 2022년 국정감사에서도 재차 드라마 제작 현장의 팀원급 스태프는 노동자성이 분명히 인정된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여전히 노동청에서는 이러한 입장과 배치되는 사건처리를 반복하고 있다. 노동청은 사건을 방치했고 3개월이 넘게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이 사건에서는 외부 압박과 공론화를 우려한 제작사가 임금을 지급했다.
드라마 편성과 방영까지 되었어도 임금이 지급되지 않기도 한다. 케이블 채널로 방송된 모 드라마에서는 촬영을 마친 지 1년 넘게 임금 지급이 완료되지 않고 있다. 전체 스태프들이 절반도 받지 못한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방송도 끝난 지 한참 지났지만 임금 지급이 되지 않고 있다. 제작사에서는 지급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지급일을 계속 늦추고 있다.
콘텐츠산업의 특성상 경영상의 위험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 OTT를 중심으로 구조가 재편되고 나서는 드라마 산업에서는 커진 기회의 장만큼 그런 위험이 구조적으로 커졌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이 스태프들에게 떠넘기기가 너무 쉬운 구조라는 것이 문제다. 용역계약서라는 제목으로 계약서를 작성한 것만으로 노동자가 일단 아닌 것으로 전제하는 행정당국의 방식이 그러한 책임 전가가 더욱 손쉽게 한다.
그래도 전통적인 드라마 산업에서 이 정도까지 가는 사례는 드문 편이다. 최근 새롭게 늘어나는 웹드라마나 1분 내외의 세로형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임금 체불이 더욱 빈번하다. "제작사가 투자를 받아야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거면 일을 하지 않았겠죠." 투자를 이유로 차일피일 지급을 미루는 제작사의 말에 대해 피해를 입은 스태프의 이야기다.
분량이 짧아서 제작비 규모가 작은 만큼 보통 제작사도 더욱 영세하고, 그렇기 때문에 수익구조가 다변화되어있지 않으므로 하나의 작품에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대규모 임금체불로 이어진다. 미술, 의상, 분장, 소품과 같이 개별 계약이 아닌 팀단위의 도급형식의 계약이 더욱 일반적인 직군에서는 사업자 간의 분쟁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견적서도 보내고 업무를 진행하였는데, 견적서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조건이 명확하게 명시된 계약서 없이 업무가 진행되기 일쑤다.
기획단계에서 중단된다고 일했던 것도 사라지나?
드라마 제작의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낮은 예능 프로그램 제작이 늘어나고 있다. 방송사로 편성하는 예능뿐만 아니라,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을 활용한 예능도 늘어났다.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이 많아져도 시청자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한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전보다 경쟁 강도는 높아지고, 기획단계에서 투자 기회나 방송 기회를 잡지 못하는 예능도 많아진다.
예능 프로그램은 기획단계에서 중단되면 임금을 너무나도 당연히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계획하다가 중단된다고 일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프로그램 촬영에 들어가는 것을 조건으로 한 계약이 아닌데도 그런 관행이 널리 퍼져있다. 이 경우 기획단계에서 투입되는 PD와 작가들이 받는 피해가 커지는데, 특히 방송작가들은 원고료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받기 때문에, 막연하게 노동자가 아니라고 전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예능 분야 방송작가의 업무에서 원고 작성은 주된 부분이 아니다. 구성안 작성은 업무의 일부이고, 기획과 섭외, 현장 출연자 관리에 이르기까지 제작 과정에 필요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한다. 촬영에 들어가면 주급 방식으로 임금(원고료)을 받고, 본격 촬영에 들어가기 이전의 기획단계에서는 촬영기간보다 일정한 비율로 낮춘 임금(기획료)을 받는다.
"화요일에는 모든 제작진이 모여 대본에 대한 전체 회의를 하였습니다. 회의 내용은 대사에 예능적인 요소들을 추가하거나 일반인 작가들의 작품 관련 정보성 내용을 수정, 추가하며 출연진들의 대사 분량을 정리하고 수요일은 회의 내용을 반영한 대본을 작성합니다. 목요일에는 사무실에 출근해 하루 종일 촬영 대본과 촬영소품, 제작진소품, 큐카드, 미션 준비 등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밤에 촬영 지역으로 출발해 이른 아침에 도착해 촬영을 하는 스케줄입니다."
임금체불을 당한 작가의 이야기이다. 여느 회사와 다르지 않지만, 일정한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으니 자유로운 출퇴근이라며, 혹은 재택을 할 때도 있었다는 이유로 노동청에서는 노동자가 아닐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보고 있고, 제작사는 프리랜서라는 마법의 네 글자만 반복하며 조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올 뿐이다.
▲ 미술 예능에서 발생한 폭행·계약해지·임금체불 고발 기자회견지난 9월 11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에서 고용노동부 서울남부지청 앞에 미술 예능에서 발생한 노동법 위반 사건에 대한 진정을 제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도대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당장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성에 대한 노동청의 보수적인 판단이다. 방송 영역에서 가장 노동법으로의 보호가 절실한 비정규직, 무늬만 프리랜서에게 그러한 보호 체계를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방송산업 전반에서 벌어지는 기본적인 노동법 위반과 제도적 규범의 부재는 K-콘텐츠의 세계적 위상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울뿐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대박'이 나는 프로그램 하나를 기대하고 업계에 뛰어드는 제작사도, 제작사가 알아서 잘 계획을 가져오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또는 방송사들도, 또한 관련하여 고용노동부와 문화체육관광부도 이러한 상황을 책임지지 않는다. 몇 달에 걸쳐서 매일 10시간이 넘게 일하고도 돈을 제대로 못 받아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오로지 방송노동자들이다.
특히 요즘은 '누가 거기서 일하라고 했냐'는 힐난과 '요즘은 일이 있는 걸로도 감지덕지'라는 말 사이에서 방송노동자들은 기댈 곳 하나 없는 막막한 상황이다.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방송 콘텐츠를 매일 보고 있다. 그런 콘텐츠를 만들면서 나오는 감수해야하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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