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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에게 아나키즘 영향 받아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6] 그의 생애에서 변곡점이 되었다

등록|2024.10.21 15:19 수정|2024.10.21 15:19

▲ 단재 신채호 선생 ⓒ 단재신채호기념관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만주침략에 나섰다. 이를 위해 먼저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1920년 8월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일본군 19사단과 나남에 주둔했던 21사단 그리고 만철 수비대까지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한국독립군의 살상에 나섰다.

서로군정서 지도자들은 일단 적의 예봉을 피하고자 각지로 피신했다. 유림은 거처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국내에 있을 때부터 그 명성을 들었던 단재 신채호가 이곳에서 활동 중이었다. 임시정부를 떠나 상하이에서 <신대한>을 발행하다가 활동무대를 베이징으로 옮겨 중국 지식인과 한국인을 위해 순한문으로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있었다. '하늘 북' 이라는 이름의 <천고>는 창간사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텬고 여, 텬고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이땅에 가득 찬) 더러움과 비린내(역겨움)을 씻어다오. 혼이 되고 귀신이 되어 적의 운명이 다하도록 전진해다오. 텬고여, 칼이 되고 총이 되어 왜적의 기운을 쓸어버려다오. 폭탄이 되고 비수가 되어 적을 동요시키고 뒤흔들어다오.

국내에선 민족의 기운이 고양되(적에 대한) 암살과 폭동으로 장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밖으로는 세계 추세가 달라져 약소국가들의 자결 운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텬고여, 텬고여, 나의 북을 두드리라. 나는 춤을 추리라. 우리 동료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보자꾸나. 우리 산하를 돌려다오. 텬고여 분투하라, 노력하라, 너의 직분을 잊지 말지어다. (주석 1)

유림이 베이징에서 신채호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서 변곡점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심산 김창숙을 만났다. 독립운동의 대선배이고 청절한 기개를 지켜온 이들과 힘을 모아 <천고>를 발행하였다. 글은 대부분 신채호가 쓰고 그의 동지·후배들의 지원으로 발행이 가능했다.

흔히 곤궁함 속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고 비록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현실과는 타협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과는 함께 자리를 하지 않는 '고집스러울 만큼의 결백성'을 보여준 이로 단재 신채호와 심산 김창숙을 꼽는다. 훗날 유림이 보여주는 일련의 비타협적인 고집(?)은 위의 두 선배에 결코 뒤지지 않을 듯하다. 이 같은 측면은 그가 <천고> 발행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신채호·김창숙으로부터 어느 만큼의 영향을 입은 데에서도 비롯된다고 한다면 비약일까? (주석 2)

단재 신채호 선생의 천고단재 신채호 선생의 천고 1, 2권을 아연에서 번역 출간한 책이다 ⓒ 조창완


유림이 이때 신채호로부터 받은 영향은 아나키즘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은 들판의 꽃이나 하늘을 나는 새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아나키즘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나 이상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위해 싸우는 신념체계이다. 이것은 냉정한 합리주의만이 아니라 낭만적 감상이나 동경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사상이다.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이상형태를 말하자면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은 아나키즘의 사회일 것이다. 국제적 석학들이 인류의 미래상을 두고 간디이즘·생태공동체운동의 에코이즘(Ecoism)과 함께 아나키즘을 들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나키즘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anarchos' 인데, 그것은 '지배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원래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로 번역하는 것은 바른 번역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1900년 이후 일본에서 수용된 급진적 사회개혁사상의 하나였다. 사회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본에 전파되어 진보적인 청년·지식인들에게 매혹의 대상이 되었다. 아나키즘을 일본에 전파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는 1903년 평민주의·사회주의·평화주의를 내걸고 언론활동과 조직운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일왕 암살음모라는 '대역사건'으로 몰려 처형당하였다. 그는 사형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료를 먼저 걱정하면서 죽었다.

고토쿠가 일본에 아나키즘을 전파한 원조라면 5.4운동을 주도한 유사복(劉師復)은 중국 아나키즘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종족주의적 혁명가로 출발하여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유사복은 폐결핵에 걸려 치료가 시급했을 때에도 육식이 인간의 폭력성을 부추긴다고 믿어 채식을 고집하다가 요절하였다.

신채호는 베이징에서 유사복의 아나키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국내에서 활동할 때에 이미 고토쿠를 비롯하여 일본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大杉塋)·이사와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의 저작에 접했던 터였다.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족보'를 따진다면 일본에서 고토쿠를 원조로 출발하여 중국에서는 유사복의 영향을 받고, 단재는 다시 이들로부터 이념적인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를 풍미했던 세 사람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 중국의 유사복, 한국의 신채호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주인공인 이유는 우선 동아시아 세 나라, 즉 일본·중국·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라는 점 때문이다." (주석 3)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수용하게 된 것은 베이징에서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교유하면서부터이다. 북경대학에서 이석증·채원배 등과 접촉하면서 크로포트킨·고토쿠 슈스이·유사복의 저작물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이나 고토쿠의 <기독말살론>, 중국인의 <신세기>나 <민성>에 실린 논설들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주석 4)

주석
1> 신채호, <천고> 제1권, 1921년 1월.
2> 김재명, 앞의 책.
3> 조세현,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15~16쪽, 책세상, 2001.
4> 조세현, 앞의 책, 111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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