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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 한강의 놀라운 발상... '노벨상' 싹 이때부터 보였다

[리뷰] EBS <문학기행> '여수의 사랑', <문학산책> '아기 부처'

등록|2024.10.18 16:56 수정|2024.10.18 16:56

▲ EBS <문학기행 - 여수의 사랑> 화면 갈무리 ⓒ EBS


EBS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귀중한 특집을 마련했다. 젊은 시절 한강 작가가 직접 출연했던 <문학기행> '한강의 여수의 사랑' 편과 <문학산책> '한강의 아기부처'를 10월 15일-16일 양일에 걸쳐 다시 방영한 것.

<여수의 사랑>은 1995년 출간된 한 작가의 첫 책이자 첫 번째 소설집이다. EBS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96년 첫 소설집을 낸 젊은 한강 작가를 <문학기행> 여수 편에 초대한다. 안개로 인해 7시간이나 늦게 겨우 버스를 타고 전남 여수 종합터미널에 내린 27살의 한강. 그녀에 대해 프로그램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등단했다'는 찬사를 놓치지 않는다.

2004년 EBS는 또 다른 문학 프로그램인 <문학산책>에 한강을 초대한다. 2000년 제 25회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한 '아기부처'의 작가로서다.

두 프로그램은 배우들이 출연해 작가의 작품을 드라마화해 보여주고, 그 사이에 작가 인터뷰 영상 등을을 넣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학기행>은 작가가 직접 제목에 등장한 여수의 이곳저곳을 여행한 반면, <문학산책>은 작가를 비롯해 아나운서, 건축가 등의 독자가 등장해서 책에 대한 소감을 밝힌다는 점이다.

그 무엇이 됐든, 아시아 최초 여성으로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이미 싹수부터 훤했던' 초기작을 재조명함은 물론, 젊은 날의 한강 작가를 통해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기회이다.

여수를 떠났는데, 왜 제목에 여수 넣었나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타오를 것이다.

<여수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정작 소설 속 이야기는 여수가 아닌, 여수를 떠나 온 젊은 여성 두 사람의 이야기다.

젊은 한강은 극 중 주인공들의 구심력과 원심력이 충돌 되는 곳이 여수인 이유를 "여수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수가 아름다운 물(麗水)이라는 고장의 이름이 되기도 하고, 여행자의 우수(旅愁)라는 뜻의 여수가 되기도 하는 중의적인 것 때문"에 선택했다는 것.

작품은 극중 '나'가 여수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나와 동숙했던 자흔과의 기억을 회상하며 풀어져 나간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으로 함께 지낼 이를 구하던 나의 앞에 자흔이 등장한다. 고향이 인천이래다가 속초랬다가 하던 자흔은 어느 날인가 자신의 고향이 '여수'라고 한다. '서울- 여수 간 기차 안에 버려져 고아원과 양부모 집을 전전하던 그녀가 몸으로 느낀 고향이어서'라는 이유였다.

▲ EBS <문학기행 - 여수의 사랑> 화면 갈무리 ⓒ EBS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중략)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중략)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사랑하는 이에게서조차 안식을 얻을 수 없었던 자흔. '여수'만이 그녀를 견디게 하는 듯보인다. 하지만 고향인 여수에서 잊을 수 없는 상흔을 얻은 나는 자흔에게서 나는 듯한 여수의 냄새를 견딜 수 없어 한다.

여수항과 돌산도 등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한강은 젊은 두 여성의 아픔에 대해 말한다. 외려 젊기 때문에 더 어두울 수 있다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누구한테나 말할 수 없는 상처가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한다고.

일찍이 <여수의 사랑>에서 2024년 노벨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한강 작가 작품의 일관된 실마리는 바로 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상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강은 상처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편 '아기 부처' 역시 그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둘러 싼 두 남녀의 애증을 파헤친다.

조금 걸어가다보니 가장자리의 흰 페인트가 벗겨져 피 얼룩같은 녹이 드러난 표지판이 눈에 띄었는데, 이상한 것은 그 표지판에 적힌 안내문이었다. 내가 가려는 곳은 그냥 불상만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약수를 뜨는 작은 동굴 속에 진흙으로 빚어진 아기 부처가 있는데, 그걸 자신의 손으로 주물러서 만들어진 얼굴을 보고 오는 것이라고 했다.

한강 작가는 '아기 부처' 작품 속에서 아기 부처의 모습에 대해 묘사하지 않는다. 반면 드라마화 된 '아기 부처'는 주인공 나가 꿈 속의 동굴에서 아기 부처를 주무르는 모습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문학기행>도, <문학산책>도 드라마화된 한강 작가의 작품과 원작을 비교하며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겠다.

▲ EBS 방송에 출연한 한강 ⓒ EBS


한강 작가는 작품 속 주인공처럼 실제 '아기 부처'의 꿈을 꾼 기억으로부터 집필을 시작했다고 프로그램에서 말한다. 그 꿈의 울림이 깊고 길어서 시작된 이야기다.

작품 속 주인공 '나'(선희)는 인기인인 앵커를 남편으로 둔 일러스트레이터다. 하지만, 외면으로 드러난 멋짐과 달리 남편은 한여름에도 긴팔 와이셔츠를 벗을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화상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와 결혼한 나는 '나의 인내로 그걸 극복하려고 막 참으면서 노력'해 왔지만, 막상 남편의 그 모습을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심지어 남편은 완벽주의자에 막말, 외도까지 일삼으니 말이다.

극중 나는 고통스럽다. 한강 작가는 이에 대해 "자기 자신의 한계는 너무나 명징하게 보게 되고, 또 자기 안에 사랑이 없다는 걸 보게" 돼서라고 말한다. 남편의 불륜에 대해 '통쾌하다' 말할 만큼 자기 안에 사랑이 없음을 보게 되는 과정, 이에 대해 작가는 "흉터보다 더 큰 상처가 아니었을까"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한강 작가는 '아기 부처'는 선희가 만나야 할 자기 자신의 진짜 얼굴이이었을 거라고 정의내린다. 그리고 그 자신의 진짜 얼굴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그러진 그 모습을 보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날의 한강 작가의 입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는 <여수의 사랑>과 '아기 부처'는 공교롭게도 모두 고통스런 여성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들은 고통에 천착해 있지만 않는다. 외려 한강 작가의 다른 모든 작품들처럼 처절하게 자신의 실존을 직시하고, 비로소 그로부터 삶의 의미를, 혹은 희망을 길어 올린다. '아기 부처'는 그래서 이렇게 마무리된다. '겨울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여수의 사랑> 속 '나' 역시 그토록 도망치려했던 여수행 기차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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