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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하던 왕의 남자, 사약 받은 결정적 이유

[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등록|2024.10.17 17:59 수정|2024.10.17 17:59
조광조(趙光祖, 1482-1520)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정도전, 정약용 등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개혁가'의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임금인 중종은 조광조의 올곧은 성품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시킬 만큼 중용했다.

하지만 조광조는 관직에 오른 지 불과 4년 만에 돌연 몰락했다. 심지어 누구보다 조광조를 아꼈던 중종은 그에게 사약을 내리며 목숨까지 거두고 말았다. 조광조는 어쩌다 군주의 핵심 측근에서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전락해야 했을까. 그는 과연 비운의 개혁가였을까. 아니면 과대평가 된 이상주의자에 불과했을까.

지난 16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30회에서는 '중종이 총애한 대쪽같은 개혁가, 조광조는 왜 4년만에 사약을 받게 되었나' 편이 방송됐다.

당대의 명문가 한양 조씨 가문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스토리


조광조는 1482년(성종 13년) 8월 10일 당대의 명문가인 한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조온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부친 조원강은 사헌부 감찰이라는 고위 관리를 역임했다.

조광조는 이미 어릴 때부터 아이답지 않게 바른 행실과 불의를 참지 않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정암 조선생 행장>에 따르면 조광조는 '어렸을 때에도 장난치며 놀지 않아 이미 장성한 사람의 풍도가 있었고, 조금이라도 남의 잘못을 보면 즉시 지적해서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바른 생활 모범생'의 표본이었지만, 그만큼 가까워지기는 어려운 성격으로 인해 또래 친구들은 하나같이 조광조를 꺼렸다고 한다.

젊은 조광조는 성인이 되어가면서 도덕과 원리 원칙을 대쪽처럼 중시하는 유학자로 성장한다. 당시는 연산군의 치세로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 1504년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이 연이어 일어나며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士林派,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이 탄압을 받던 시절이었다.

조광조는 당대의 유학자였으나 정권의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김굉필을 유배지까지 직접 찾아가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했다. 이후 스승 김광필이 끝내 처형당하고 수많은 사림이 연산군의 폭정에 화를 입는 모습을 지켜본 조광조는, 충격을 받고 벼슬길에 되는 것을 포기했다. 당시 선비가 관직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은 가족의 생계는 물론 양반의 지위까지도 위태로워질 수 있는 선택이었다. 조광조가 그만큼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하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몰락하고 중종이 등극한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조광조는 입장을 바꿔 1510년 과거 시험에 응시해 장원급제하며 29세의 나이에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성한다.

조광조의 엄격한 바른생활 성향은 성균관에서도 여전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조광조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관대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빈객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는데 그것을 본받는 자'였다. 연산군의 폭정 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자들의 기강과 의식도 해이해졌는데, 조광조의 올곧은 모습은 젊은 유생들에게는 '올바른 유학자'로서의 롤모델이 돼준 측면이 있었다.

1515년 34세의 조광조는 대과에 합격하여 정6품 사간원 정언(언론 비평 담당)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조광조는 불과 이틀 만에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를 모두 해임하라는 충격적인 상소를 올리며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오늘날로 치면 갓 입사한 말단 신입사원이 직장 상사들을 전부 고발한 격이었다.

조광조의 간언은 당시 민감한 정치적 현안이었던 '폐비 신씨 복위문제'와 관련돼 있었다. 중종의 본처였던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 반정으로 살해당한 신수근의 딸이었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옹립한 반정공신들은, 신씨가 건재할 경우 언젠가 복수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종을 압박해 왕비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중종의 둘째 부인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면서 신씨의 복위 문제가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중종은 공신세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여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관리들을 파면하고 유배 보냈다. 논란이 된 폐비복위 상소를 올린 이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한 것은 바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들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구언(임금이 신하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에 따라 진언했는데 그 말이 지나친 듯하더라도 쓰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어찌하여 다시 죄줍니까?'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임금의 질문에 신하가 답한 일을 두고 처벌을 한다면 앞으로 누구도 바른 말을 못할 것이라는 게 조광조의 지적이었다. 또한 언론보호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사간원과 사헌부가 오히려 왕에게 올바른 의견을 전달하는 것을 막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중종의 인정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스토리


조광조의 정연한 논리를 반박할 수 없던 중종은 결국 대간들을 전부 교체하는 것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이로써 조광조는 할말을 하는 언관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화려한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부정과 모순을 바로잡으려는 조광조의 올곧은 모습은 연산군과 다른 왕이 되기를 갈망했던 중종이 꼭 필요로 하던 신하였다.

조광조 역시 중종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했던 조광조에게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반영하려는 중종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중중과 조광조는 경연을 통해 자주 만나며 점점 돈독하게 가까워졌다. <정암 조선생 행장>에서 퇴계 이황은 중중과 조광조의 관계를 두고 "오직 왕의 일만을 생각하는 신하로서, 착한 임금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 상하가 서로 기뻐해 '천년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할 것"이라고 언급했을 만큼 서로 마음이 맞는 모범적인 군신 관계였다고 극찬하고 있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하며 불과 3년 만에 정6품에서 종2품 사헌부 대사헌(오늘날의 검찰총장)에 임명될 만큼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그렇게 조광조는 중종의 최측근이 돼 사림파의 정치적 리더로 파격적인 개혁 정책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그런데 불과 1년 후, 조광조의 운명을 바꾸는 충격적인 대반전이 일어난다.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이 돌연 한꺼번에 정계에서 축출당한 것이다.

조광조는 '붕당조성죄'로 의금부에 투옥된다. 임금의 무한신뢰를 받던 충신에서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중종이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으킨 의도적인 사건이었다.

중중은 왜 갑자기 조광조에게 등을 돌리게 됐을까. 조광조는 중중의 신임을 받아 권세가 점점 커지면서 특유의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수많은 정치적 무리수를 저질렀다.

비록 조광조 본인은 그것을 '개혁'이라고 확신했고 다른 사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만 옳다는 일방적인 독선에 빠졌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왕권의 권위마저 부정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 바로 소격서(昭格署) 파동이다. 소격서는 조선 시대에 도교 식의식을 행하고자 설치한 정부기관이다. 조선은 비록 유교 국가였지만 불교나 도교식 제사는 중종 때까지도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고, 역대 왕실에서도 이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다. 소격서는 정치적 기관도 아니었고 특별한 폐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격한 유학자였던 조광조로서는 도교에 기반을 둔 소격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중종은 소격서 폐지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나 조광조와 사림파는 끈질기게 중종을 압박했다. 이에 중중은 '선왕인 세종과 성종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았다'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다. 전통과 질서를 무엇보다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선왕의 결정'까지 거론한 것은, 중종으로서는 가장 최상의 방어 수단을 꺼내든 셈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조광조는 '세종과 성종이 대성(성군)이라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고 반박하며 "전하께서 선왕을 핑계 삼는다면 자손들도 전하를 핑계삼을 것 '이라는 독설까지 서슴지 않았다.

왕권이 절대적인 조선에서 선대 국왕, 그것도 '성군의 대명사'로 꼽히던 세종과 성종마저 '잘못은 잘못'이라고 거침없이 비판한 것은, 신하가 대놓고 왕권을 능멸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또한 조광조는 홍문관 관원들과 철야시위를 벌이며 중종의 수면까지 방해했다. 결국 중종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소격서 폐지를 수락했지만, 이 사건으로 조광조에 대한 무한 신뢰에는 금이 가기 시작해다.

조광조의 정치 감각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스토리


이어 중종 13년인 1518년에는 현량과(賢良科) 제도가 조광조의 제안으로 실시된다. 기존의 과거시험이 합격자의 인품까지 파악할 수 없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재를 추천하고 왕의 심층면접으로 검증해 관리를 선발하자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현량과로 합격한 인재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조광조와 친분이 있거나 학연이 있는 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광조가 이들을 직접 선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현량과 시행 이후로 조정에 조광조 일파가 대거 늘어나는 사태를 초래하며 중종의 경계심을 사게 됐다. 그리고 이는 조광조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던 도덕성과 공정성에 큰 흠집을 남긴 실책이 됐다.

여기에 반년 뒤인 1519년 10월에는 조광조가 가짜 공신에 대한 '위훈 삭제'를 주장하며 제2의 소격서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중중반정으로 책봉된 공신의 숫자는 무려 117명이었는데 이 중에는 실제로 반정에는 기여한 것이 없는 공신의 친인척이거나 재물로 공신 명단을 구매한 가짜 공신도 있었다. 조광조는 가짜 공신들을 재조사해 부당하게 얻은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나름대로 근거와 명분이 있는 주장이었다.

문제는 조광조의 내로남불과 정치적 감각의 부재였다. 중중과 반대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광조 일파의 인사 철학이란,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현량과로 등용된 인물은 '이상적인 인재'라면, 반정공신은 가짜이기에 '없애야 할 대상'으로 구분하는 이중잣대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반정으로 신하들에게 옹립된 중종에게 공신 책봉의 당위성을 부정하는 조광조의 태도는, 곧 '군주의 정통성'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종의 입장에서 조광조는 더 이상 믿을만한 신하가 아니라 왕권을 흔드는 위험인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광조 일파는 소격서 사태와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중종을 집요하게 압박해 위훈 삭제를 이뤄낸다.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었던 조광조와 사림파의 세상이 된 것처럼 보였다.

조광조 일파의 숙청

하지만 실제로 이미 조광조의 몰락은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위훈삭제 이후 불과 4일 만에 기묘사화가 터지면서 조광조 일파가 한꺼번에 숙청을 당한 것이다.

조광조는 설마 중중이 자신을 직접 제거하려 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도 '선비가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이다. 다른 뜻은 전혀없다'라며 중종에 대한 여전한 신뢰와 충성을 강조했다. 또한 조광조는 옥중서신을 보내어 중종에게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종은 조광조의 마지막 애원을 차갑게 외면했다. <중종실록>에는 당시 기록하던 사관도 중종의 냉혹한 태도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조금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서 나온 것 같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519년 12월,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중종이 보낸 사약을 받고 38세의 나이로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조광조는 담담하게 사약을 받아들이며 '임금 사랑하기를 부모 사랑하듯, 나라 사랑하길 집 걱정하듯 했네'라는 시를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조광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쉬운 선택보다 의미 있는 선택을, 타협보다 원칙을 강조하던 정치가로서의 일관된 행보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에서는 성리학적 이념에만 집착한 이상주의와 단순과격한 흑백논리에 치우친 독선의 한계를 지적하며, 과연 그가 오래 살았더라도 진정한 조선의 개혁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는 회의적인 시선도 나온다. 조광조의 화려한 비상과 급격한 추락은, 결국 정치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라는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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