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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퇴거에 벼랑 끝... 폐지 줍던 중년 남자의 반전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페이퍼맨>

등록|2024.10.17 18:01 수정|2024.10.17 18:01

▲ 영화 <페이퍼맨>스틸 이미지 ⓒ ㈜태양미디어그룹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한 남자가 벼랑 끝에 몰리다 못해 늪으로 빠져드는 상황으로 시작된다. 40대 초입의 중년 남자는 살던 방에서 강제퇴거를 당한다. 사정한 끝에 옷가지 몇 개 챙겨 캐리어를 끌고 정처 없이 방황하기 시작한 남자는 뜬금없이 산길을 오른다. 신세가 처량한 나머지 욱하는 마음에 캐리어도 내팽개치고 산길을 오른 그는 절에 입산하길 청한다.

하지만 스님이 되는 게 마음 내킨다고 되는 건 아니다.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자격 열거에 남자는 당황하지만, 수호지의 노지심도 유력자의 추천과 시주를 통해 겨우 들어간 절 아닌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은 그는 본전 생각에 캐리어를 찾지만 이미 사라진 뒤다. 역설적으로 절에서 거부당한 덕분에 갈아입을 티셔츠 하나 없는 진정한 '무소유'에 가까워지긴 했다.

다시 속세로 내려와 거리를 방황하던 남자는 굴다리에 자리를 잡는다. 리어카로 박스와 폐지를 줍는 '할배' 옆에서 '생활의 지혜'를 알음알음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할배가 박스로 솜씨 좋게 만든 조립식 침낭 겸 텐트에 탄복한 남자는 따라서 만들려 하지만, 재료를 입수하는 것도 그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동네 곳곳에 쌓인 박스 주워 오면 될 줄 알았는데 이게 다 구역별로 임자가 있다고 한다. 이미 폐지 수거 역시 동네 노인들 사이에 각축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굴다리로 내몰린 남자

▲ 영화 <페이퍼맨>스틸 이미지 ⓒ ㈜태양미디어그룹


우여곡절 끝에 남자는 우연히 리어카를 구하고, 폐지 수거일에 참여하게 된다. 차츰 요령이 생기기 시작한다. 초코파이만 주면 마음껏 부릴 수 있는 발달장애인 '기동'을 조수로 삼고, 굴다리로 흘러들어온 학교 밖 소녀 '서연'과 묘한 인연을 쌓아간다. 사연이 있어 허리를 다친 바람에 생계가 막막하던 남자로선 죽다 살아난 셈이다. 그는 이것저것 꾀를 낸 덕에 제법 여유가 생기면서 박스로 제법 그럴싸한 가건물도 짓는다. 갈 곳 없는 서연도 함께다. 실평수가 늘어나고 인테리어까지 꾸미게 된다. 새로 거래를 튼 고물상의 젊은 여사장과도 돈독한 관계가 되면서 남자는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든다.

마침, 폐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경쟁은 치열해지지만 남자는 병약한 노인들을 밀어내며 승승장구한다. 조수도 늘어나고, 굴다리 이웃들에게 인심 부린다고 치킨을 쏠 정도로 형편도 괜찮다. 그는 이제 미래의 꿈을 다시 가져도 될 듯하다.

폐지가 돈이 된다는 뉴스는 남자만 본 게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조직적으로 폐지를 독점하려는 세력이 등장한다. 젊은 청년들이 분업화해 남자는 물론 노인들이 터를 잡은 수거 구역까지 무시하고 저인망처럼 싹쓸이하는 것이다. 폐지 '특수'가 돈 냄새를 풍기자 작전세력이 달려든 것이다. 남자의 굴다리 낙원은 이제 붕괴 위기에 처한다.

과거를 숨긴 남자에게 주어진 선택지

▲ 영화 <페이퍼맨>스틸 이미지 ⓒ ㈜태양미디어그룹


제목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흔히 '히어로' 물이라 불리는 슈퍼 영웅 장르, 혹은 전자에 빗댄 소시민의 영웅을 주역으로 삼은 로컬 영웅의 소소한 코미디물로 간주하기 딱 좋다. 폐지를 주워가며 호구지책으로 삼던 중년 남자가 알고 보니 드러나지 않은 과거와 막강한 힘을 숨긴 '초인'이라 주변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도 재기한다는 설정은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이 영화 <페이퍼맨>에서 그런 상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니 49% vs. 51% 비율로 전자와 후자 지분이 갈린다. 이 차이는 < 넘버3 >에서 한석규가 이미연에게 툭 던지던 대사처럼 절대적인 차이다. 남자 '인목'은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다니지만, 그가 결코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게 있다. 바지 뒷주머니에 절대 흘리지 않게 꽉 끼워둔 빛바랜 사진 한 장,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한시도 목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메달 하나다. 인목에게도 찬란했던 과거가 있었음을 이 둘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인목은 아시안 게임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주변 사람들도 조금씩 그의 자랑이 허풍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왜 그가 이렇게 몰락했는지 비밀을 추적하는 순서가 될 테다.

인목은 배달 부업에 나갔다가 우연히 운동하던 시절 후배와 재회한다. 영락 그 자체인 인목에 비해 젊은 시절 그가 스포츠계의 그릇된 관행으로부터 감싸고 보호해 주던 후배는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허우대가 멀쩡하다. 둘은 오랜만의 재회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 후배가 잘사는 비결을 궁금해하는 인목에게 상대는 필사적으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선 남의 것을 빼앗아야 그게 되더라는 덕담을 전한다.

인목은 그 대화가 인상 깊었는지 그저 호구지책을 넘어 폐지 수거 물량을 장악하며 굴다리의 유력자가 되어간다. 후배의 덕담을 따르다 보니 저절로 먹고 살 만해진 셈이다. 그는 어느새 굴다리를 벗어나 재기할 상상에 이른다. 하지만 후배 말대로 늘 자신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의협심과 정의감 가득하던 인목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내가 남의 걸 빼앗는다면, 나보다 더 강한 자가 내 걸 빼앗는 걸 막을 수 없다는, 약육강식의 잔인한 섭리다. 인목의 일장춘몽은 곧 더 거대하고 훨씬 잔인한 세력에게 산산이 붕괴할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침내 잔혹한 현실에 직면한 인목에겐 몇 가지 선택지가 놓인다.

① 자신이 젊은 시절 많은 걸 희생해 가며 편입되지 않으려던 세상의 무정한 질서에 가담해, 즉 변절을 통해 부스러기라도 챙기자.
② 과거의 자신처럼 스스로 희생해 부당한 세상에 작은 파열구라도 내보자.
③ 어떻게든 외부의 질서를 벗어난 율도국을 만들자 등이다.

물론 어느 하나 인목에게 쉬운 방책이 아니다. 가장 안락하고 확률 높은 첫 번째는 도저히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이제 그의 쇠락한 육신으로는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한때 실력으로 모든 차별과 억압을 돌파할 수 있었지만, 석연치 않은 사정으로 그는 이제 허리마저 부실해 육체노동도 힘든 병든 몸이다. 세 번째는 이미 굴다리에 그가 세웠던 박스집이 사라지듯 외부 압력에 너무나 쉽게 무너질 위험에 노출된다. '페이퍼맨'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되, 그가 재량을 행사할 여지는 전무한 셈이다.

이색적 변주의 영화

▲ 영화 <페이퍼맨>스틸 이미지 ⓒ ㈜태양미디어그룹


주인공의 결단에 따라 영화의 결말은 천지 차이로 변하게 될 운명이다. 과거의 꿈과 이상, 현재의 비참하고 영락한 처지 사이에서 인목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흔들린다. 그의 선택은 자신은 물론 굴다리 이웃들의 운명까지 근본적으로 뒤집어놓게 될 테다.

영화는 흔히 우리가 '독립영화' 하면 떠올릴 사회의 어두운 면, 특히 빈곤과 차별 문제를 공유한다. 하지만 대개 극사실주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여타 작업과 달리 블랙코미디 기법을 전면적으로 활용해 색다른 톤 앤 매너를 끌어내는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사실주의 표현방식이 자칫 극단적인 폭력의 전시로 기울여 보는 이를 힘들게 만드는 반면, <페이퍼맨>이 취한 썰렁함이 피식 돋는 코믹터치는 상대적으로 관객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시각적 잔인함보다 근저에 놓인 불합리와 모순을 돌아보게 할 여지를 남긴다. 물론 제대로 균형감을 유지할 때 이야기다.

폐지 줍는 노인과 스포츠계 부당한 정실인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버무려 소재로 삼은 이 영화가 취한 태도는 그래서 오히려 더 밀도가 높아야만 성립 가능한 도전이 된다. 많은 유사한 시도가 '장르'적 표현이란 면죄부로 현실 고증을 대충 구렁이 담 넘듯 때우려다 온당한 실패로 귀결되곤 한다.

<페이퍼맨> 역시 곳곳에서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곤 한다. 코믹하던 정서가 갑자기 가팔라지고, 불편한 현실의 단면이 어김없이 노출되기도 한다. 때론 서로 다른 장르가 혼재된 기분도 들 만큼 종종 이질감이 드는 표현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실소가 튀어나올 정도로 어처구니없거나 마구잡이로 삽입했다는 기분은 그리 들지 않는다. 관객에게 호불호가 갈릴망정, 만든 이들의 의도와 판단은 전해지기 때문이다.

▲ 영화 <페이퍼맨>스틸 이미지 ⓒ ㈜태양미디어그룹


다소 허술해 보이는 주인공의 서사를 받쳐주는 건 (감독이 직접 연기한) 인목의 후배이자 영화 속 세상의 흑막인 후배의 몫이 크다. 설정상으로는 전형적인 '빌런' 포지션에 해당하지만, 그는 작품의 주제의식과 세계관을 해설하는 가이드 역할이 더 커 보인다. 아마 자신이 창조한 영화 속 세계를 풀이하는데 감독이 직접 나서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결과일 테다.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생태계가 미시적 일상에서 표현되는 구조를 설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유독 설명조로 말 많은 악당 포지션으로 등장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잠시 인목에게 재기의 환상을 심어준 고물상 젊은 여사장의 등장과 퇴장은 폭력적이진 않아도 이윤에 죽고 사는 세태를 암시한다. '자본주의 미소'와 친절함으로 일관하지만, 주식시장 등락처럼 태세 전환이 신속한 그의 짧고 굵직한 등장이 인목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심대하다. 이 모든 격동의 진원지라 할, 폐지 집적소 방화로 인한 폐지 가격의 폭등과 진화는 주인공의 행보와 묘한 연동을 선보인다. 현실에서 일국을 넘어 세계 경제가 서로 연동되고, 안정적인 가격관리와 시장 유지가 희미해진 현실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조목조목 궁리한 티가 많은 작업이다.

인목은 결국 실패한 히어로의 운명을 극복하기 쉽지 않지만, 그가 좌충우돌 방황 끝에 내린 결론과 그에 따른 행위는 비록 세상 잣대로는 너무 초라하고 영향력이 없을지 몰라도, 자신은 물론 타인을 구원하는 결말로 귀결된다. 그런 대미는 누군가에겐 너무나 허무하고 초라해 보이겠지만,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거슬러보면 너무나 그다운 일관성이다. 오직 물질적 성공에만 탐닉하는 세상의 부당한 질서 안에서 그는 숨을 쉴 수 없는 존재이니 영화의 마무리는 더없이 캐릭터에 충실한 셈이다. 그야말로 '동네 영웅' 장르의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끝이니 말이다. 이쯤 되면 영화를 한번 확인해 보고 싶지 않을까.

<작품정보>

페이퍼맨 Paper Man
2022 한국 드라마/코미디
2024.10.16. 개봉 100분 15세 관람가
감독/각본 기모태
출연 곽진, 강한나, 장현준, 강대욱
제작 옹이필름, ㈜태양미디어그룹, 진무리, 장Cine
제공 ㈜태양미디어그룹
공동제공 ㈜플레이그램
배급 ㈜라이크콘텐츠
공동배급 ㈜플레이그램

▲ 영화 <페이퍼맨> 포스터 ⓒ ㈜태양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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