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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전남 해남 우수영에서 18일부터 20일까지 열리는 명량대첩축제

등록|2024.10.18 08:57 수정|2024.10.26 14:03

▲ 진도대교와 해남우수영. 진도타워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 이돈삼


한때 1000명 넘게 살았다. 자연마을이 10여 개나 됐다. 인근 섬지역 물산도 모두 이곳으로 모였다. 어업협동조합 지점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인구는 반토막 났다. 빈집이 지천이다. 물산도 모이지 않는다. 분기점이 진도대교 개통이었다.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를 잇는 다리가 놓이면서 섬까지 자동차가 드나들었다. 물산은 차에 실려 보내졌다. 낚시꾼도 차를 타고 섬으로 곧장 들어갔다. 울돌목은 바닷물의 거친 숨소리보다 자동차 소리로 더 요란해졌다.

젊은이들은 학교와 일자리를 찾아 대처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항구를 오가는 배편도 줄었다. 포구가 한산해진 건 당연했다.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右水營) 이야기다.

인적 드문 포구가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명량대첩축제 덕분이다. 이순신이 13척 전함으로 133척의 일본군 함대를 물리친 명량대첩을 기념한 축제다. 축제는 명량대첩 현장인 울돌목 일원에서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 동안 열린다.

▲ 진도대교와 우수영 관광단지. 진도 녹진관광지에서 본 모습이다. ⓒ 이돈삼


▲ 해남 우수영항. 크고 작은 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 이돈삼


벼랑 끝에 몰린 이순신은 울돌목을 결전의 장으로 정하고, 우수영에 진을 설치했다. 열세인 전함과 수군으로 몇 배나 많은 일본군 함대에 정면으로 맞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좁은 해역에서 1대 1 전투 상황을 염두에 둔 전략이었다.

울돌목은 길이 2㎞, 폭은 가장 좁은 곳이 300m에 이른다. 최저 수심 1.9m, 조류 속도 최대 11.5노트. 뭍의 자동차 속도로 환산하면 시속 20㎞ 넘는다. 물길을 감안할 때 무척 빠른 물살이다.

폭이 좁은 울돌목은 넓은 바다에서 바닷물이 모여 수위가 올라가고, 빠져나갈 때 바닷물이 봇물 터지듯 흐르는 곳이다. 호리병 닮은 해역의 유속이 빠르고 바닥이 거칠어 물 흐르는 소리가 20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한다. 급류가 서로 부딪혀 울면서 소리를 낸다고 '명량(鳴梁)'이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부당경 족구천부, 一夫當逕 足懼千夫)…. 살기 위해선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순신의 비장한 절규였다.

▲ 우수영 명량대첩비. 마을에서 높은 바위 언덕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 우수영 관광단지에 세워진 이순신 어록비. ‘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새겨져 있다. ⓒ 이돈삼


우수영에 명량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대첩비는 1688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전라우수영 동문밖에 세웠다. '우수영대첩비'로도 불린다. 마을에서 높은 바위 언덕이다.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대회전(大會戰)으로 충무공이 세운 전공(戰功)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충무공의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케 하였으며, 또 공이 난을 당하여 적을 토벌함에 책략을 결정함이 특출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 대첩비에 새겨진 글귀의 일부분이다.

대첩비는 일제강점기 수난을 겪었다.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 뒤뜰에 버려졌다. 광복 이후 주민들이 가져와 다시 세웠다. 경복궁에서 서울역으로, 다시 목포역을 거쳐 배편으로 우수영에 옮겼다. 항구에선 주민들이 힘을 합쳤다. 선사시대 고인돌 운반 방식을 그대로 활용했다.

▲ 옛 우수영성에 복원된 망해루. 우수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이돈삼


▲ 법정스님 생가 터의 조형물. 우수영 마을에 있다. ⓒ 이돈삼


우수영성 흔적도 남아 있다. 바닷가는 크고 작은 돌로, 북쪽은 흙으로 빈틈없이 쌓았다. 당시 전라우수영은 해남과 진도를 비롯 나주와 영광, 함평, 무안, 영암까지 관할했다. 지금의 완도 고금도와 신지도, 목포진, 영광 법성포, 신안 흑산도 등 19곳을 속진으로 뒀다. 성곽 둘레 1100m, 면적 6000㎡(9만2000평)로 장대했다.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도 있다. 이순신 탄신과 명량대첩 기념일에 제례를 지낸다. 충무사 앞엔 우수영 관리와 수군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전라남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방죽샘과 '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 생가도 마을에 있다. 법정스님은 스스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스님답게 살다가 스님답게 갔다.

마을에 공공미술도 덧입혀졌다. 명량대첩과 강강술래를 주제로 그림과 조각, 공예, 조형, 설치미술이 더해졌다. 옛 뱃사람들 쉼터였던 여관 건물은 생활사 갤러리와 카페로 꾸며졌다. 부뚜막과 옛 부엌 살림도 그대로 놓여 있어 추억여행을 이끈다.

▲ 우수영 마을벽화. 이순신 장군과 명량대첩, 우수영사람들의 생활을 주제로 그려져 있다. ⓒ 이돈삼


▲ 고뇌하는 이순신상. 울돌목을 배경으로 우수영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우수영 관광단지로 발걸음을 옮기면 울돌목 물살 체험장이 있다. 바다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내려다볼 수 있다. '우수영 스카이워크'로 이름 붙여져 있다. 울돌목 바다 위로 명량해상 케이블카도 떠다닌다. 케이블카는 우수영과 진도타워를 오간다.

바닷물이 들고나는 바닷가에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도 서 있다. 높이 2m, 평상복 차림으로 큰 칼 대신 지도를 들고 서 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순신의 모습 그대로다. 바닷물이 밀려들면 이순신의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다. 썰물 때는 주춧돌 아래까지 물이 빠진다. 조각가 이동훈의 작품이다.

▲ 명량대첩 기념탑. 우수영 관광단지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 울돌목 물살체험장. 해상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이돈삼


명량대첩 기념탑과 전시관도 있다. 전시관에선 거북선과 판옥선 모형, 당시 쓰인 천자총통 등 여러 가지 무기를 볼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이 서울에 버려진 대첩비를 다시 우수영으로 옮기는 비용으로 쓰려고 직접 뜬 비석의 탁본도 만난다.

수변무대에는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새겨진 이순신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군을 앞에 두고 외친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도 보인다.

명량대첩 기념탑 뒤로 오르면 우수영전망대가 있다. 울돌목과 진도타워, 우수영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서남해를 지킨 수문장 역할을 한 올망졸망 다도해도 한 폭의 그림이다.

▲ 명량대첩을 주제로 한 드론쇼. 지난해 명량대첩축제 때 모습이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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