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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체육계 관행, 숙련된 솜씨로 사회적 금기를 버무리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등록|2024.10.18 17:31 수정|2024.10.18 17:31
제목을 천천히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어본다. '우/리/는/천/국/에/갈/순/없/지/만/사/랑/은/할/수/있/겠/지' 19글자다. 제목은 짧고 간결하게 짓는 게 철칙이다. 특히 수많은 동종 경쟁자들이 경합하는 문화예술 콘텐츠에서 자극적이고 흡입력 있는 제목은 모든 홍보의 첫 순위가 된다. 자연히 갈수록 짧아지거나 기상천외하게 관심을 끌고자 방망이 깎듯 심혈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대체 이리 긴 제목은 무슨 의도에서일까?

제목만으로 전체 이야기가 한눈에 파악되는 건 물론, 그 주제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이하 <우·천·사>)의 제목은 조나단 스위프트나 대니얼 디포의 작명론을 따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튀어나오듯 건네던 대사는 곧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과 맞서는 의지로 형상화된다. 그래서 수많은 갈등 속에도 제작진은 제목을 수정하지 못했을 테다. 그 검증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1999년 여름 어느 날, 소녀가 사랑에 빠지다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주)메리크리스마스


1999년 여름 어느 날, 세상은 지구 종말 예언과 밀레니엄 Y2K 대란이라는 혼란 속에도 가쁘게 돌아가는 중이다. '주영'은 태권도부원으로 절친한 친구 '성희'와 함께 전국대회를 앞두고 훈련에 매진한다. 성희는 국가대표를 꿈꿀 정도로 주변 기대를 한몸에 받고 주영은 그 옆에서 손해 보는 것도 많지만, 둘의 우정에는 별문제가 없다. 하지만 성희와 겹치는 체급 때문에 주영은 급하게 한 체급을 올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며칠 사이 5KG 증량하라는 코치의 억지 요구에 주영은 햄버거를 흡입하지만, 꼭 이럴 때는 살이 찌지 않게 마련. 때는 아직 전근대적 관행이 팽배하던 20세기 말이다. 코치의 터무니없는 지시를 완수하지 못하면 가혹한 연대책임이 뒤따른다. 연예인 지망생 소꿉친구 '민우'와 함께 오늘도 햄버거를 잔뜩 주문하는 주영에게 민우가 부탁을 전한다. 한눈에 반한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 '예지'에게 고백 쪽지 전달이다. 주영은 청을 수락한다.

귀갓길에 그는 자기 대신 학대를 당한 주장과 부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다. 학교폭력 상처가 있는 이들에겐 섬찟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리고 놀란 부원들은 황급히 자리를 뜬다. 하지만 현장에 나타난 건 사은품 장난감 경찰차 사이렌을 작동한 예지다. 사회복지직에 근무하는 주영의 엄마는 소년원 청소년 사회화 프로그램으로 한 달간 가정체험을 전한다. 대상은 놀랍게도 동갑내기 예지였다. 둘은 한 방에서 생활한다. '나의 구원자' 예지에게 주영이 느끼는 감정은 미묘하고 가슴은 떨린다.

자신을 지키라고 권한 태권도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한 딸을 보다 못한 주영의 엄마는 친구들과 우정 여행을 제안한다. 예지의 이모가 있는 익산으로 주영과 예지에 성희와 민우, 네 친구가 함께 나선다. 그곳에서 일상과 떨어진 주말 동안 주영은 자신이 품던 감정을 조심스레 확인한다. 가혹한 고3 시절 안팎으로 잔인한 상황에 내몰리던 주영에게 구원의 동아줄과도 같다.

하지만 세상은 주영과 예지의 관계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지금껏 이해자로 주영을 바라보던 이들의 태도가 바뀌고, 그저 질풍노도의 시기 찰나의 연민에 불과하다는 단정이 붙는다. 주영은 확신에 차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운명이 그들을 시샘하듯 주영과 친구들에게 위기가 잇달아 닥친다.

숙련된 솜씨로 사회적 금기를 버무리는 이 영화의 승부수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주)메리크리스마스


<우·천·사>는 근래 한국 독립영화 주요 소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집합체다.

① RETRO, 즉 복고 감성이 충만한 배경: 1999년 밀레니엄 시절
② 성소수자 주인공에게 찾아온 금단의 사랑: 퀴어 로맨스
③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와 폭력적 관행: 체육계 비리와 성추행

익숙한 요소들이 골고루 조합되기에 어찌 보면 전형적인 한국 독립영화의 형상을 갖췄지만, 좀 꼬아서 표현하면 먹힐 만한 요소들을 안전하게 취합한 결과물로 느낄 여지도 있다. 그렇다면 민감하면서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개별 요소가 얼마나 잘 조합을 이룰지가 영화를 평가하는 관건이 될 테다.

영화는 복고풍 요소로 지금과 아주 다르진 않지만, 세월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는 20세기 말을 택했다. '01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 당대 유행 인기가요, 순정만화 걸작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일부는 분위기를 부각하는 데 역할을 마치지만, 몇은 영화 속 인물들 행위와 미래에 결정적 요소로 작동한다. 하고많은 히트곡 중 자우림 '애인발견'이나 고호경 '처음이었어요'는 그저 복고 추억이 아니라 인물들 심리를 고스란히 옮기는 중책을 맡는다. 지금은 피식 웃고 마는 '휴거'의 분위기나 노스트라다무스 지구 종말론은 생생하게 관객 뇌리에 귀환한다.

여기에 퀴어 로맨스가 영화의 척추를 형성한다. 스포일러라 할 것도 없이, <우·천·사>는 주영과 예지의 멜로를 전면에 부각한다. 지금도 곱지 않은 사회 일각 편견에 노출되는 사랑이 전 세대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짐작이 가능한 경우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주인공들의 연애가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주변 반응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앰네스티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앰네스티의 장점이자 단점은 개별 지부가 자국 문제에 대해선 개입을 자제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활동 안정성을 담보하지만, 남의 동네 사정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본국 인권 침해에 침묵하는 것이 위선이라 비판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영과 예지가 사랑을 키워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가정입주 교육은 복지교정직에 종사하는 주영의 엄마가 제안한 일이다. 하지만 남의 자식 교화에는 헌신적이던 엄마는 막상 자신의 자식과 남의 자식이 사랑에 빠지자 어떻게든 떼어 놓으려 돌아선다. 자녀와 대화를 통해 소통하던 엄마는 그 순간부터 딸과 단절된다. 독실한 개신교인인 주영 엄마의 태도에 종교적 개연성과 함께 앰네스티 기본 방침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셈이다.

각본가가 실제로 체험한 태권도계 악습이 영화 내내 주인공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중압으로 작동한다. 각본의 생생함 덕분에 근래에도 잊을만하면 터지는 엘리트 체육 폐단이 극명하게 각인된다. 10대 주인공의 부모들이 행하는 위선과 결탁 역시 체육계 모순과 고스란히 연결된다. 실제 현실과 재현 수위가 뛰어난 부분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서 거의 모든 '어른'이 어른 역할을 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들조차 자기 자식을 제대로 감싸지 않는다. 그들 역시 당대 사회 시스템의 부정적 단면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사도, 경찰도, 부모도, 아르바이트 가게 책임자도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어른'은 없다. 하지만 이런 특징이 거대한 시스템의 모순을 세밀하게 폭로하기보다는 세대 간 충돌로 치환되는 느낌이 아쉽다. 시스템의 하부 일원으로 주영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던 태권도부 전체 각성은 개연성보다 10대 VS 어른 대결 구도 위주로만 그려지는 편이다.

현 시점 한국 독립영화의 명암을 관찰하는 흥미로운 텍스트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주)메리크리스마스


영화는 일부의 부정적 사례처럼 사회적 현실 이면을 보여준다는 명목 아래 극단적 전시로 치우치진 않지만, 긴장과 몰입을 조성하고자 보기 불편한 장면을 드러낸다. 여기에 잔뜩 힘을 준 광각렌즈나 타임랩스 조절이 일정하게 표현 수위를 중화하지만, 오히려 소비하듯 다가오기도 한다. 장면의 결과가 예측 가능하다는 점에서 과용된 측면이 있다. 사회적 소재를 소비한다는 일각의 비판과 맞닿는 지점이다.

독립영화 즐겨 보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얼굴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반갑기보다는 과잉이라는 기분이다. 어쩌면 친한 제작진이 작업하는 현장에 격려 방문 왔다가 몇 장면 우정 출연하는 기분으로 등장한 것일지 모르겠다는 상상이다. 저 배우가 왜 저 캐릭터를 맡았을까? 혹은 저걸로 출연 끝? 순간이 드물지 않다. 물론 크게 구멍이 나진 않지만, 독립영화에서 배우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형상화되어 있고 그 이미지가 표상하는 감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뜬금없거나 소모된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 점이 퍽 아쉽다.

하지만 <우·천·사>가 표현하는 '사랑이 이긴다' 뭉클한 순간을 조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단호한 결단으로 주인공들은 "지구가 종말하면 횡단보도 앞에서 만나"자 약속한다. 모진 시련 후에도 맹세는 잊히지 않는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앞 세대가,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는 바대로 '사랑의 힘'이 모든 걸 초월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이야기다.

<작품정보>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No Heaven, But Love.
2023 한국 로맨스/멜로
2024.10.16. 개봉 112분 15세 관람가
감독 한제이
주연 박수연, 이유미, 신기환, 김현목
출연 양지일, 김해나, 최정화, 고수희, 이승연, 정희태, 오민애, 한혜지,
이다영, 황미영, 서석규, 손예원
제작 ㈜에스더블유콘텐츠
배급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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