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 꿰기부터 일일주점까지, 씩씩했던 산동네 엄마들
[열 개의 우물] 열우물 동네 십정동, 해님방 여성들
김미례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열 개의 우물>이 2024년 10월30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70-80년대 여성노동과 인천 빈민지역의 탁아운동을 함께 했던 여성들을 조명했다. 그녀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그 시대를 살았는지, 그 이후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따뜻하게 함께 품어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서 열 편의 기획기사를 준비했다.[편집자말]
해님방은 한국여성민우회의 특별사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해 총회 때 '도깨비 빤스'를 부르며 익살스러운 율동으로 시선을 끌던 사람들이 인천 십정동 해님놀이방과 공부방 선생이자 빈민여성운동을 하는 활동가라고 자신들을 소개해서 나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잔치는 해님방 인근, 당시 구 시장으로 불렸던 시장연립 일대에서 열렸는데, 비탈진 구릉지 아래쪽이라 올려다보면 울도 담도 없이 벽과 지붕들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한 눈에 들어와 사람을 반겼다. 잔칫날이라 더 그랬겠지만 발랄한 아이들과 빙 둘러 선 동네 사람들의 웃음 머금은 선한 얼굴이 나를 붙들었다.
씩씩했던 해님방 여성들
▲ ▲십정동 여성들 ⓒ 해님공부방
구 시장 주변, 신덕촌이라 불렸던 그 동네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야산자락이었던 동네는 1960년대 도화동과 율도 등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의 정착지로 시작했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인근 염전과 갯벌을 메꾸어 주안 5,6공단이 개발됨에 따라 일자리와 저렴한 주거지를 찾아 모여든 이농민이며 노동자들로 북적대며 제 모습을 갖춰갔다.
집을 쪼개고 구조를 바꿔 세입자를 들이는 집도 늘었다. 시장도 생겼다. 아래층을 상가 건물로 지은 시장연립을 중심으로 야채가게며 생선가게, 고깃집, 기름집, 양품점 등 온갖 가게들이 들어섰다. 야채며 곡식을 파는 상회며 방앗간, 그리고 약국이 두 개씩 들어섰고, 정육점은 한 때 세 개나 있었다. 내가 간 이듬해던가, 불이 나 문을 닫았지만 솜틀집까지 있었다.
사람들의 출신지도 다양했다. 인천 토박이들이 많았을 텐데, 모임으로는 오히려 고향을 떠나온 충청도 향우회, 호남 향우회가 이름을 날렸고, 부모가 황해도 등지의 월남민 출신인 가족들도 더러 있었다.
그 시절 그 다양함 속에서도 해님놀이방 또는 해님공부방에 아이를 보냈던 해님방 여성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은 너나없이 참 부지런했다. 요즘 말로 '독박 육아'는 물론이요, 청소며 빨래, 요리, 설거지까지 집안일을 도맡았고, 대부분 돈 버는 일도 했다. 보육시설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고 아이를 보육시설이나 학원에 보낼 형편도 안 되어서 아이를 돌보느라 부업이라고 불렀던 가내수공업을 집에서 했다.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저임금에 하루 열 두 시간, 열여섯 시간을 일하며 잔업과 철야를 일삼던 당시 노동환경의 영향이 크겠지만, 덩달아 부업시간도 길었다. 아침에 아이 학교 보내고 시작해서 남편이 돌아오는 밤 아홉 시, 열 시까지 짬짬이 집안일 하는 시간을 빼고는 내내 부업을 한다는 여성도 많았다. 리본 만들기, 볼펜 조립, 인형 눈 붙이기, 구슬 꿰기, 실밥 따기 등 하청에 하청을 거쳐서 개당 1~5원짜리가 된 일거리는 종일을 해도 한 달 수입으로 고작 아이들 간식거리 살 돈 정도 손에 쥐게 될 뿐이었다.
집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동네 안의 자그마한 하청공장에서도 일했다. 그래서 물건 실은 트럭이 오갈 수 있는 동네 아래쪽 큰 길가에 작게는 예 닐곱 평, 넓게는 십 여 평 공간을 차지하고 봉제며, 도금할 수저 조립이며, 부품조립을 하는 공장들이 제법 여러 개 있었다. 그러다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되거나 혼자 또는 자기들끼리 둬도 되겠다 싶은 초등 고학년, 또는 중학생이 되면 공장이나 식당일, 노동일 등 월급을 더 받을 수 있는 일터로 나갔다.
우리 사회의 노동 착취 구조를 깨부수다
▲ 공동부업해님방의 공동부업팀 "해모회" ⓒ 해님공부방
해님방에서는 동네 여성들의 주 경제 활동인 부업이 우리 사회의 노동 착취 구조 속에서 여러 단계의 하청을 거쳐 제일 낮은 노동 대가를 받는 것을 극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공동 작업을 통해 경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지향하며, 1989년 7월에는 공동 부업 팀 '해모회'를 꾸리기도 했다. 자모회 회원 서너 명이 중심이 되어 미숫가루, 딸기잼, 고춧가루, 고추장, 된장, 감자부각 등 식품을 가공해서 생협에 납품했고, 일부 품목은 동네에서도 팔았다. 지인의 연결로 중간 하청단계 없이 공장에서 물품을 바로 가져와 천 자르기 부업을 하기도 했다.
당시 부업을 해서 얻는 수입이 보통 월 2~7만원 사이였고, 공장에 취업하면 여성은 35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는데, 공동 부업팀은 10~20만 원 정도까지 수입을 늘릴 수 있었다. 품목과 판로의 문제, 천 자르기 일감의 중단, 구성원의 취업과 이사 등 여러 이유로 7년 여 만에 공동 부업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만나 일거리를 고민하고, 미숫가루 작업을 위해 시장 연립 뜨거운 옥상을 오르내리고, 방 가득 찬 천 자르기에 바빴던 그때를 생각하면 모두가 참 열심히도 살았다 싶다.
해님방 여성들은 또 씩씩했다. 해님방이 공사를 하거나 이사를 할 때 짐을 빼고 나르기 위해 인부를 따로 부르지 않았다. 크지는 않았지만 작은 농 하나를 혼자서 들고 나른 여성도 있었다. 해님방 운영 기금 마련을 위해 봄 가을로 했던 헌 옷 바자회나 딸기잼, 유자차 만들기는 익숙하게 해서 이력이 쌓였고, 격 년으로 열었던 일일주점도 선생들이며 자원교사, 공부방 졸업생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긴 했지만 거침없이 주방일을 치러냈던 엄마들 덕택에 운영이 가능했다. 놀이방 자모회, 공부방 자모회라고 해서 한 달에 한번, 정기모임을 하며 공부도 하고, 공부방 운영이나 동네 일에 대해서도 의논했는데, 씩씩하니 나서서 해결해 낸 일도 많다.
▲ 헌옷바자회해님방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 ⓒ 해님공부방
동네 안에는 약국에서 설치한 시내 공중전화가 한 대 있긴 했는데, 약국이 문을 닫으면 이용할 수 없고 고장 나면 며칠씩 수리 되지 않아서 편히 이용할 수 없었다. 자모회 회원들이 전화국에 전화하고 동네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서 건의서를 제출하고, 직접 찾아가서 독촉도 한 끝에 1988년 8월 시내 외 겸용 공중전화가 동네 안에 설치될 수 있었다.
그 무렵에 알게 된 아이들의 '침 뱉기'를 동네에서 몰아내기도 했다. 사람의 침은 백내장 치료나 노화 방지 약품의 원료가 된다는 말에 알만한 모 제약회사들이 침을 모아 원료를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다고 했다. 하청을 받아서 침을 수거하는 사람들은 학교 앞 문방구나 오락실 등에 재하청을 주어 아이들의 침을 모았다. 아이들에게 침 뱉는 통과 껌 한 통씩을 줘서 침을 뱉게 하고 100cc당 250원을 줬는데, 껌을 씹으며 한나절 꼬박 침을 뱉으면 300cc정도가 모아지고, 아이들은 그렇게 받은 돈으로 다시 그 가게들에서 군것질을 하거나 만화를 보거나 오락을 했다.
침을 뱉은 아이들이 목소리가 갈라지고 목이 붓는 등 통증을 호소하고, 억지로 침을 뱉다 쓰러진 아이까지 있어서 자모회에서 대책을 의논하고 함께 나섰다. 우선 파출소에 신고했는데 변화가 없어서 침 뱉기를 하는 가게들에 여럿이 항의 전화를 하고, 단체로 찾아가기도 해서 1989년 봄, 동네에서는 침 뱉기 하는 곳을 없앴다.
공부방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을 때, 청소년 공부방으로 지정해 달라고 구청을 찾아갔지만, 면적이 20평 기준에 미치지 못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행정부에 넓은 공간이 없는 산동네의 특성을 고려해 달라는 민원을 넣었고, 1994년부터 청소년 공부방으로 월 60만 원 정도의 운영비를 지원 받게 한 것도 해님방 여성들이었다.
생계를 위해 씩씩함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 시절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에 더하여, 고되고 때로는 위험하기도 한 노동을 감수하며 가족의 경제를 책임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다양한 이유로 실직해서 일을 하고 있지 않거나, 술과 유흥, 노름에 돈을 떼이고 거의 빈 월급 봉투를 던지는 남편을 대신해서 어깨 너머로 미용 기술을 배워 미용실을 차려서 돈을 벌기도 했다. 또는 횟집 일을 배워서 그 시절을 버티고 가계를 꾸려낸 것도 여성들이었다. 더러는 견디고 견디다 살 길을 찾아 한 부모가 되고, 버거움을 이겨내며 아이를 키우면서 함께 한 것도 그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돌아보면 해님방 여성들은 저 마다의 재주가 있었다. 여름이면 이웃끼리 바람길 골목 그늘진 계단참에 돗자리 깔고 부업을 하다가 점심으로 내오는 국수며, 있는 반찬으로 만든 비빔밥은 왜 그리 맛있던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나는 밥을 많이도 얻어먹었다. 해님방 기금마련 일일주점의 주방장은 그들 중에서도 제일 솜씨 있는 사람이 맡았으니, 파전이며 골뱅이소면이며 안주들의 맛은 보증수표였다.
▲ 해님방 소식지 <해님> 에 실린 자모회원의 글 ⓒ 해님공부방
글을 진짜 맛깔나게 쓰는 사람도 있었다. 해님방 이야기와 동네 소식을 담느라 1986년부터 펴냈던 소식지 '해님'에는 자모회원들이 편집위원으로도 참여하며 한 달에 한 번 돌아가며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실었다. 1992년 열우물 주민회를 창립하면서 펴낸 동네신문 <열우물 소식>에도 주민들 글을 싣는 지면이 있었다. 특히 세 사람이 생각나는데, 본인들은 쑥스러워 했지만 자주 글도 담당하고 그중 한 분은 한참동안 <열우물 소식> 편집위원으로도 같이 했으니, 당신들 자신도 글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게다. 읽는 재미에, 때로 울컥하게도 만드는 그들의 글을 기다리는 독자는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말주변이 좋은 사람, 깍쟁이 같은데도 야무진 사람, 수줍음을 타는데도 경우 바르고 할 말은 하는 사람, 노래를 잘 하는 사람, 듬직해서 주변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구심점이 되는 사람, 하는 일이 어설픈데도 밉지 않고 웃게 만드는 사람, 생활에서 터득한 지혜가 있는 사람, 추진력이 있는 사람. 주연만 있어서는 극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재미도 없을 텐데, 우리는 저마다 주연과 조연, 단역을 맡으면서 십정동의 한 시절을 재미나게 열어젖혔다.
그 시절 해님방이 그리워지면...
▲ 신소영과 홍미영해님공부방에서 옛날 자료를 보며 ⓒ 감 픽쳐스
2011년 10월, 나는 23년 몸 담았던 해님방을 떠나 다른 일자리를 찾았고, 2017년 7월에는 뉴 스테이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인해 철거되는 동네에서도 이사했다.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해님공부방도 그 무렵 십정동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공부방에 다니는 아이들도 바뀌었다. 나는 10년 남짓 부평구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에서 일했고, 어쩌다보니 지난해부터 다시 십정동으로, 해님공부방으로 되돌아와 있다. 매일같이 십정동을 오가며, 지금은 5678세대의 대단지, 15~48층까지의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옛 동네를 지나친다.
길에서, 마을버스에서, 옛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을 마주치며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일부이긴 하지만 그 시절의 해님방 여성들의 소식도 가끔은 듣고 산다. 길에서 만난 세 사람, 두 달마다 해님방 여성모임 '자수정'에서 아직까지 만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난해 부평구 문화재단 프로젝트에 공모해서 세 차례 주민모임을 하며 만난 몇몇 사람도 있다. 그 중 네 가정이 옛 동네의 새 아파트로 돌아왔고, 세 가정은 이웃한 십정동으로, 일곱 가정은 인천의 다른 동네로 이사해 살고 있다.
해님방은 지난해 '사회적협동조합 열우물사람들'로 이름을 바꿨고, 38년을 운영해온 지역아동센터 해님공부방에는 현재 열다섯 가정 19명의 초·중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일부 아동들의 가정 형편은 옛날보다 더 어려워졌고, 부모들의 모임도 여의치가 않다. 나는 이 상황에서 공부방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 한 자락에 그 시절 해님방이 그리워지면, 해님공부방 39주년 혹은 40주년을 핑계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도 있겠다. 그 시절의 그 사람들, 특히 해님방 여성들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지역아동센터 해님공부방 시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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