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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요즘 대한민국 국민들은 행복합니다. 작가 한강이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감흥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벨 평화상 이후 대한민국 두 번째 노벨상인데, 노벨문학상의 의미는 세계인들이 한강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고, 또 역사를 대하는 한강의 시각을 높이 평가했다는 징표입니다.
인터뷰에 응한 한 노벨상 심사위원은 한강의 작품중 <소년이 온다>를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합니다. 또 작가 한강은 자신의 작품을 처음 시작하는 독자라면 <작별하지 않는다>부터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1948년 제주 4.3을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같은 소설입니다.
필자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에 벅찬 감동을 받는 이유는 작가가 보인 역사에 대한 일관된 비판적 통찰입니다.
비판적 사고는 늘 높게 평가되지만, 현실에서 비판은 많은 것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언론에서 자본이나 권력에 대한 비판이 실종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언론의 생명은 바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국민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보도하는 것인데, 요즘 비판적인 언론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받아쓰기 저널리즘', '따옴표 저널리즘'이 대세가 됐습니다.
저널리즘의 원칙인 사실을 보도하면 되기 때문에 사실에 천착합니다. 누군가 거짓을 말해도 언론은 그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 거짓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당당합니다. 누군가가 말한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나는 누군가의 말을 사실대로 인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 요즘의 언론보도입니다.
그러면서 언론이 갖춰야 할 비판성을 내려놨습니다. 국가적으로 많은 사건이 발생했지만, 한 번도 언론이 국민의 편에서 국민들의 입이 된 적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언론은 늘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섰고, 언론이 자본과 권력과 함께할 때 언론인들은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판성을 지킬 때 언론인들은 비판성의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그렇게 언론은 작아지는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
미디어를 전공하는 필자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지만, 또 한편 초라해졌습니다. 언론에서는 권력과 자본에 대한 비판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 작가 한강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국가폭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국가폭력에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연약한 삶을 보듬어줬습니다. 국가폭력은 언제나 정당화되고, 국가폭력을 거부하지 못하는 국민은 죄인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 언론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모른 척 침묵합니다. 오늘날 언론은 권력과 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 ⓒ tfrants on Unsplash
언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첫 번째 매체는 대중신문이었습니다. 페니 프레스(penny press)라고 하는데, 이 신문은 왕정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왕정에서 발간하는 정보지가 전부였는데, 국민들로 하여금 돈을 내고 신문을 사서 보게 하려면 왕정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아야 했을 것입니다. 국민 통치에 필요한 내용을 알리는 왕정의 정보지와는 다른 의견을 내는 페니 프레스는 일반 국민이 돈을 내고서라도 사봐야 하는 가치를 가졌었습니다.
지금은 포털을 통해 뉴스를 보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신문을 구독해서 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지금보다 좋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구당 1~2개의 신문은 구독해 봤습니다. 귀중한 정보를 얻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국민들의 작은 마음들이 모여 언론은 여론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사람들의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돈을 내고 구독할 만큼 국민들이 봐야 할 뉴스를 싣지 않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여론을 주도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서면서 종이신문의 구독자 수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이신문의 자리는 온라인 뉴스가 대체해 가고 있습니다. 종이신문을 구독하지 않는다고 해서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널리즘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언론이 저널리즘적 가치를 지켜내지 못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발표한 '2024 디지털뉴스보고서' 조사결과 '뉴스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답한 한국인은 31%로 조사국 평균 신뢰도(40%)보다 9%포인트 낮고, 아시아·태평양 11개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시아 국가에서 한국은 높은 경제력을 보이고 있지만, 저널리즘 신뢰도에서는 꼴찌라는 것이 저널리즘의 현주소입니다.
저널리즘의 힘은 바로 비판성에서 나옵니다. 저널리즘의 회복은 바로 언론이 비판의식을 회복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한강의 작품들이 역사적 비극을 국민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았던 그 점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언론의 본분은 권력과 자본에 편승하는 것이 아닌 국민들의 입과 귀가 되고, 국가폭력에 당당히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폭력을 보도할 때 양비양시론적인 시각은 온당치 않습니다. 죄 없는 국민을 무참히 죽이는 일에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판받아야 할 일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다른 의도를 끼워 넣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만 하지 않으면 언론인에게 문제 될 일은 없는 것이 요즈음의 아이러니한 현실이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언론이 더 이상 언론의 역할을 망각한다면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언론은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하며, 그런 언론에 국민들은 마음의 문을 열 것입니다. 비판성의 회복을 기대합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심미선씨는 순천향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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