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흑색사회주의운동자대회 참석... 왜경에 피체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9] 사무소를 급습하여 서류를 압수하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으나
유림은 36세이던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의 항일독립전선에 나섰다.
북만주에서 김좌진·김종진·이을규 등과 민족진영에 대한 사회주의(공산주의)자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무장 대항할 것을 주장하고, 동지들 사이에 다소의 이견이 있기는 했으나 원칙에 동의하여 한국총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독립정신을 뒷받침하고자 재만 무정부주의자연맹을 창설하고, 이 해 11월 10일부터 이틀간 평양에서 열리는 관서 흑우회가 주최한 전국흑색사회운동자대회에 참석하고자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들어왔다. 아나키즘은 검은 색을 상징 색깔로 삼았다. 그래서 각종 명칭에 '흑색'이 자주 쓰였다.
관서 흑우회는 1929년 8월 8일 임시총회를 열고 전 조선흑색사회주의자대회는 11월 10~11일 양일간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그 준비위원으로 이홍근·최갑용·채은국·조중복 등 9명을 선정했다. 개최 취지는 발기한 동지들이 각 지방을 개별로 방문하고 설명하여 다수의 참석을 권유토록 했다. 이때는 제1차에서 4차에 걸친 조선공산당의 조직이 거듭되는 대검거로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고 아나키스트 진영에서도 또한 각 지방의 산발적인 각양 각색의 조직들이 거의 완전히 적발되어 당국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으므로 전국적 대회의 소집은 지난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만큼 대회를 개최하는 측도 허다한 난관을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다. (주석 1)
유림은 만주의 농민으로 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잠입하였다. 왜경은 이 집회를 원천봉쇄하고자 삼엄한 경계망을 치고 도착한 인사들을 사전에 속속 검거했다.
이렇게 삼엄한 분위기 속에 만주서 농군으로 변장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잠입한 유화영(유림)이 기살리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그 주위를 경찰이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다. 최갑용은 유(柳)에게 기민한 제스처를 써서 위기를 모면케 하고 정은국의 주선으로 시내에 은신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동경 경흥노동조합 대표 유현태는 평양역에서 형사대에게 체포되어 동경으로 추방되었으며 일본노동조합 자유연합회 대표 1명은 현해탄을 건넜다는 것만은 확실한데 어디론지 행방불명이 되었다. (주석 2)
유림 등은 사냥개 같은 왜경의 추적을 따돌리고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만주의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추적을 피하지 못한 채 피체되고 말았다.
29년 11월 10~11일 이틀간에 걸쳐 평양에서 열려던 전조선무정부주의운동자대회는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유림을 포함한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평양 근교의 기림리 숲속에서 전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 동맹을 결성(29년 11월 11일) 어려운 가운데서 이들의 이념을 펴나갈 본격적인 채비를 갖추었음은 특기할 만 하다. 유림은 동맹의 결성모임에 참여한 직후 평양 경찰서에 체포된 셈이다. (주석 3)
결국 11월 11일 유화영(유림)이 평양서에 체포됨으로써 그가 중국 광동기계공총맹에서 공인들의 노동운동을 지도했고 남북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활약한 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으로 경찰은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그가 신민부나 한족총연합회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캐기 위해 취조를 계속하는 한편 이홍근·최갑용·채은국·조중복 등을 체포하고 사무소를 급습하여 서류를 압수하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으나 이렇다 할 만한 단서를 잡지 못했음으로 경찰은 초조한 빚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화영은 구금 중 신경통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봉천 입교정에 거주하는 부인과 아들(원식, 12세)이 평양으로 와서 면회를 했다. 증거를 못 잡은 경찰은 구류 기간이 만료되자 전원을 석방하고 유화영은 형사를 딸려 봉천으로 호송했다. (주석 4)
주석
1>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앞의 책, 258쪽.
2> 앞의 책, 259쪽.
3> 김재명, 앞의 책.
4> <한국아나키즘운동사>, 259쪽.
북만주에서 김좌진·김종진·이을규 등과 민족진영에 대한 사회주의(공산주의)자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무장 대항할 것을 주장하고, 동지들 사이에 다소의 이견이 있기는 했으나 원칙에 동의하여 한국총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관서 흑우회는 1929년 8월 8일 임시총회를 열고 전 조선흑색사회주의자대회는 11월 10~11일 양일간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그 준비위원으로 이홍근·최갑용·채은국·조중복 등 9명을 선정했다. 개최 취지는 발기한 동지들이 각 지방을 개별로 방문하고 설명하여 다수의 참석을 권유토록 했다. 이때는 제1차에서 4차에 걸친 조선공산당의 조직이 거듭되는 대검거로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고 아나키스트 진영에서도 또한 각 지방의 산발적인 각양 각색의 조직들이 거의 완전히 적발되어 당국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으므로 전국적 대회의 소집은 지난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만큼 대회를 개최하는 측도 허다한 난관을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다. (주석 1)
유림은 만주의 농민으로 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잠입하였다. 왜경은 이 집회를 원천봉쇄하고자 삼엄한 경계망을 치고 도착한 인사들을 사전에 속속 검거했다.
이렇게 삼엄한 분위기 속에 만주서 농군으로 변장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잠입한 유화영(유림)이 기살리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그 주위를 경찰이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다. 최갑용은 유(柳)에게 기민한 제스처를 써서 위기를 모면케 하고 정은국의 주선으로 시내에 은신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동경 경흥노동조합 대표 유현태는 평양역에서 형사대에게 체포되어 동경으로 추방되었으며 일본노동조합 자유연합회 대표 1명은 현해탄을 건넜다는 것만은 확실한데 어디론지 행방불명이 되었다. (주석 2)
유림 등은 사냥개 같은 왜경의 추적을 따돌리고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만주의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추적을 피하지 못한 채 피체되고 말았다.
29년 11월 10~11일 이틀간에 걸쳐 평양에서 열려던 전조선무정부주의운동자대회는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유림을 포함한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평양 근교의 기림리 숲속에서 전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 동맹을 결성(29년 11월 11일) 어려운 가운데서 이들의 이념을 펴나갈 본격적인 채비를 갖추었음은 특기할 만 하다. 유림은 동맹의 결성모임에 참여한 직후 평양 경찰서에 체포된 셈이다. (주석 3)
결국 11월 11일 유화영(유림)이 평양서에 체포됨으로써 그가 중국 광동기계공총맹에서 공인들의 노동운동을 지도했고 남북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활약한 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으로 경찰은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그가 신민부나 한족총연합회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캐기 위해 취조를 계속하는 한편 이홍근·최갑용·채은국·조중복 등을 체포하고 사무소를 급습하여 서류를 압수하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으나 이렇다 할 만한 단서를 잡지 못했음으로 경찰은 초조한 빚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화영은 구금 중 신경통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봉천 입교정에 거주하는 부인과 아들(원식, 12세)이 평양으로 와서 면회를 했다. 증거를 못 잡은 경찰은 구류 기간이 만료되자 전원을 석방하고 유화영은 형사를 딸려 봉천으로 호송했다. (주석 4)
주석
1>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앞의 책, 258쪽.
2> 앞의 책, 259쪽.
3> 김재명, 앞의 책.
4> <한국아나키즘운동사>, 25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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