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참여, 의정원 의원활동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11] 일본 패망 전야의 중경에서 활동하였다
▲ 임시 의정원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 김자동
격동기에 6년은 긴 세월이다. 그는 어느덧 1938년에 45세의 중년에 접어들었다. 중국의 정세가 크게 변하고 있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은 1932년 1월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과 3월 만주에 괴뢰정권의 수립, 1933년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1934년 4월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으로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독립운동 진영도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무장투쟁론자인 아나키스트 이회영의 사망(1932.11)에 이어 초기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안창호가 사망(1938.3)하였다.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한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민족단일당운동을 시도했다. 민족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세력과 아나키즘세력까지 모두 참여하는 연대운동이었다.
결국 통일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연맹론을 주장하던 두 단체가 탈퇴해 5개 정당이 참가하는 통일회의가 열렸다. 1939년 9월 5개 정당은 서로 연합해 전국연합전선협회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곧바로 탈퇴하는 바람에 협동전선연합은 한계를 보였다. (주석 1)
독립운동 진영은 이같은 과정을 거치며 통합을 서둘고 있었다. 일제는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의 기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했다. 1942년 7월 좌파진영의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군사부문에서 먼저 좌우합작이 이루어지고, 이 해 10월에 실시된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족혁명당 10명. 혁명연맹 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2명 등 14명의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선출됨으로써 임시정부는 명실공히 좌우합작의 통합정부가 구성되었다. 유림도 이때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는 투옥 6년여 만인 1937년 10월에 출소하여 그 해 말 변장을 하고 중국으로 탈출했다. 많이 상한 몸을 추스르며 베이징과 텐진 등에서 옛 동지들을 만났다. 그가 활동을 멈춘 6년의 시공은 많은 것이 변하고 바뀌었다. 그리고 일제의 대공세로 독립운동가들은 위축되고 있었다. 함께 진로 문제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는 연안으로 갔다. 대장정 끝에 이곳에 머문 모택동을 만나고 이어서 태항산으로 가서 김두봉과도 만났다. 이와 관련 상세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1929년에 북만주 해림(海林)에서 김좌진과 만나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을 강변했던 그의 자세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연안에서 북경이나 만주로 파견되어 있던 조직과 연결되어 그곳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중경이냐 연안이냐를 저울질하던 그가 일단 연안행을 택했고, 모택동·김두봉을 만났던 것으로 정리된다. 그렇지만 그는 그곳을 떠났다. 자신의 의지나 방향감각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연안을 떠나 중경으로 이동한 사실은 그의 사상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처해진 상황의 극복을 위한 돌파구 마련이라고 생각된다. (주석 2)
유림은 1942년 여름 황하를 건너 1만 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에 도착했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여 일으킨 중일전쟁기여서 중국인들의 대일증오심에 불이 붙고 있어서 독립운동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많이 늦었지만 독립운동 세력의 연합과 연대가 그만큼 중요하고 시급했다.
30년대까지만 하여도 임정은 그 인적 구성과 실력 면에서 문자 그대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 기구라 하기엔 터무니 없이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잇따른 분규에 따른 파벌간의 갈등도 잇따랐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확대되고 독립에의 서광이 비침에 따라 각계각층 독립운동자들의 대동단결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도 체질을 개선, 보수·급진을 망라한 독립운동자들의 집결체로 점차 강화되어 갔다. (주석 3)
1942년 10월에 열린 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노동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리고 조소앙·조완구·차리석·김상덕·이건웅 등과 함께 임시헌장(헌법) 개수기초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개수위원회는,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국민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문명과 진보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 왔다."라는 대한민국의 유래를 말하는 머리말을 위시하여, 제2장으로 '민간의 권리와 의무', 제5장 '심판원'을 새로 두고 종전 헌법의 5장 '회계'를 6장으로 하여 전문 7장 62조로 증대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개수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주석 4)
이 '개수안'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모델이 되었다.
그의 임시정부 참가는 또한 당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인식변화를 증명하는 셈이다. 유림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유자명이 조선혁명자연맹을 각각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유림은 외교연구위원회·선전위원회·수개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고, 구양균은 광복군총사령부 서무과 과원, 주석단 비서 겸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주석 5)
그의 임시정부 참여 기간은 짧았으나 활동은 만만치 않았다.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통과된 임시헌장의 수정기초 위원으로서 한 몫 하였던 유림은 또한 외교 분야의 일도 맡아 보았다. 외무부 안에 설치된 외교연구위원회의 연구위원으로서였다. 외교연구위원회는 당시 점차로 급박해져 가는 국제정세 하에서 '외교에 관한 일반원칙과 정책 및 방침을 연구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42년 8월 처음으로 조직될 당시에는 장건상·신익희·이현수·이현호가 연구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듬해인 43년 2월 김성숙·박호일·최동호와 더불어 유림이 연구위원으로서 그 진용을 보강하게 되었다. 유림이 외교연구위원회에 참여할 무렵에야 비로소 임정의 외교활동이 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43년 4월 선전부(초대 선전부장 김규식)가 조직되고 그 산하에 선전위원회가 구성되자 유림은 조소앙·엄항섭·김성숙·신익희·김상덕 등 14명과 더불어 선전위원으로서 임정의 선전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유림은 선전 계획의 수립과 선전 진행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 위원으로서 또한 국무위원으로서 일본 패망 전야의 중경에서 활동하였다. (주석 6)
주석
1>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 86~87쪽, 2022.
2> 김희곤, 앞의 책, 93쪽.
3> 김재명, 앞의 책.
4> <단주 유림 자료집>, 69~70쪽.
5> 이호룡, <한국인의 아나키즘의 수용과 전개>, 191쪽, 서울대박사학위논문, 2000.
6> 최갑용, <황야의 검은 깃발>, 116쪽, 이문출판사, 1996.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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