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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 산 속에는 숨겨진 칼이 있답니다

[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오봉산 칼바위와 오충사, 보성 편

등록|2024.10.23 13:55 수정|2024.10.23 15:08
어렸을 때 내가 아는 세상 크기는 적었다. 순천은 시, 벌교는 읍, 별량은 면, 고향 송기리는 마을이었다.

송기마을이 속한 승주군 다른 곳을 가보지 못했지만, 보성군은 기차를 타고 몇 번이나 지났다. 방학 때 나주에 사시는 부모님에게 갈 때 벌교-조성-예당-득량-보성역을 지났기 때문이다. 당시에 득량면 예당리는 면보다 큰 마을이었다.

오봉산 칼바위를 보기 위해서 득량역이 있는 득량면에 갔는데, 면 소재지가 마을보다 작다. 지역 중심축인 벌교와 순천 가는 버스는 보성읍과 조성면을 지나는데, 득량면은 율포해수욕장이 있는 바다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그래서 득량이 작은가 보다 생각했었다. 고향 후배는 맞다며 작다 하고, 다른 주민은 과거부터 득량은 예당보다 작은 곳이라고 한다.

득량은 득량만을 품고 고흥과 마주 보고 있다. 과거에는 이곳 생선 맛이 좋아서 잡으면 전부 다 일본으로 수출했단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득량만을 '금바다'라고 했다. 특히 능새이(능성어)는 동네 말로 '육께스'라고 부르는 큰 대바구니를 바다에 넣어 보관했다가, 전량을 일본에 수출했다. 가두리 양식의 시조라 해도 되겠다.

고흥에서 볼 때 보성 오봉산에 높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고흥 출신 친구가 친근한 고향 말로 오봉산을 설명한다.

"오봉산 칼바위는 득량의 명물이랑께. 우리 동네에서 바다 건너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율포해수욕장이고 그 오른쪽으로 산 위에 커다란 칼바위가 내려다보고 있어. 어른들이 말씀하셨어. 칼바위 위에서 오줌을 싸면 다 싸고 골말을 추슬러 올렸을 때 그때야 오줌이 땅바닥에 떨어진다고···. 그만큼 칼바위가 크다는 얘기여."

오봉산 칼바위오봉산 칼바위는 뾰족한 바위산이다. 원효대사가 수행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매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위 아래에 굴도 있어서 사람이 피난하기에 적합하다. 맞은 편 고흥에서도 보면 가끔 큰 불이 보였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피운 불이라고 알고 있다. 숨겨진 칼이라고 이름 짓는다. ⓒ 이병록


칼바위를 직접 보러 오봉산에 갔다. 높이가 343.5미터 밖에 안되지만, 원효대사가 수련했다는 전설 등 많은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 속이 깊은 산이다.

상식적으로 맞은편 고흥에서는 봉우리가 잘 보이는 것이 맞고, 득량 쪽에서는 산에 가려서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칼바위 바로 옆에 큰 바위 봉우리가 득량만 쪽을 가리고 있다. 득량만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여기저기 물어본다.

몇몇은 보인다고 하는 걸 보면, 방향에 따라 일부 지역에서는 칼바위가 보이는가 보다. 그러나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바위는 아니다.

알려진 얘기로는 이순신 장군이 득량에서 하룻밤 자고, 군량미와 군사를 모았다고 한다. 칼바위 밑에 숨어 있던 백성들이 군사로 자원했고, 주민은 득량이라는 이름이 군량미를 확보한 데서 생겼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오봉산 돌담과 작천 마을 돌담오봉산은 한 때 우리나라 최대 구들장 돌 생산지였다. 오봉산 가는 길에 작은 돌담과 큰 돌탑을 만들었다. 더 길고 크게 만들면 유명한 길이 되겠다. 작천마을 돌담길 중 일부는 시멘트로 접착한 곳이 있지만 많은 부분이 자연 그대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작천 마을 돌담길은 옛날 시골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 이병록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3일간 보성에서 수군 재건 작업을 전개하였다. 조양창에 쌓인 군량을 지금 득량역이 있는 오봉 삼거리를 거처 보성 선소로 옮기고, 보성 선소에 남은 병력과 군선들을 득량만 서쪽 포구인 군영구미로 이동시켰다.

선소 마을은 굴강의 옛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쪽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소에 적혀 있는 시간에서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고, 보성읍내로 가는 버스가 와서 오충사로 갔다.

보성은 이순신에게 무과를 지원하라고 권유했던 장인 방진이 군수를 지낸 곳이다. 어느 날 화적들이 안마당까지 쳐들어왔다. 명사수인 방진이 활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졌다. 화적들이 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서, 남은 화살이 없었다. 이때 장차 이순신 장군의 부인이 되는 12살 딸이 배틀 도투마리에 뱁댕이 대나무다발을 힘껏 내던지며 소리쳤단다.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

화적들은 그 소리를 듣고 화살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도망갔다. 뱁댕이는 남부지역에서 쓰이는 말로, 천을 고정시키거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대나무다. 보성군은 군수 관사를 '방진관'으로 이름 짓고, 역사, 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보성은 녹차로 유명하여 보성 자랑이 '녹차수도'이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곳이 오충사다. 칼바위가 가까이 가야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숨겨진 칼이라면, 오충사 충신들은 외적이 침략했을 때, 칼을 뽑아 큰 공적을 세웠다.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은 얘기라서, 나도 선거이 장군만 알고 갔다. 고려말 이래로 공신만 30여 명 배출하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충의의 병역명문가 보성선씨가 있다. 경상 좌수사를 지낸 선극례를 배향 인물로 추가했다고 하니 사실상 육충사다.

면면을 보면, 선윤지는 1382년 전라도 관찰사 겸 안렴사 때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남해 관음포에서 왜구 잔당을 섬멸하였다. 선형은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선세강은 병자호란 시절 안동 영장으로 남한산성을 도우러 가다가 광주 쌍령에서 전사했다.

선거이는 녹둔도에서 여진족을 맞아 함께 싸운 인연으로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절친한 벗과 전우로 지냈다.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등에서 공을 세웠고, 울산왜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오봉산은 한 때 우리나라에서 구들장을 만드는 돌을 제일 많이 생산한 곳이다. 지금은 그런 돌을 이용해 오봉산 산길에 작은 돌담과 큰 돌탑을 곳곳에 쌓았는데, 조금만 더 많이 만들면 아주 멋있고, 유명한 길이 될 것 같다. 작천마을 돌담길도 옛날 시골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내가 갔을 때는 버스 기사가 관광 홍보대사 역할을 자처해줬다. 정류소가 아닌데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데 세워주는가 하면, 차를 바꿔 타는 곳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고마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영암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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