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무도한 정권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었다
[박정훈이 박정훈에게] 한강의 소설과 참사 유가족들: 작별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 2023년 11월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유가족들이 정당 대표들의 추모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그날은 꽤 즐거운 토요일이었습니다. 아내가 독일 출장을 갔다가 13일 만에 다시 한국으로 오는 날이었으니까요. 인천공항에서 아내를 태워서 집에 돌아오니,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에선 소박한 핼러윈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아이들은 분장을 하고, 부모들은 사진을 찍는 통에 아파트는 저녁까지 시끌벅적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손흥민 선수가 뛰는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려던 때였습니다. 갑자기 트위터(현 X)에서 영상이 돌더군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쓰러져있고, 몇몇 시민들이 절박하게 심폐소생술 하는 영상. 보고도 믿기 힘들었습니다. 가짜라고,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곧 뉴스가 나오더군요. 축구 보던 걸 그만두고 속보를 지켜보다가 밤을 지새웠습니다.
정훈님, 저희 둘 다 일터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훈님은 노조에서 기업의 부실한 안전관리, 혹은 국가의 폭력이나 방치 속에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촉구합니다. 저는 그러한 현장을 취재하거나 유가족들을 인터뷰합니다. 그때마다 이곳과는 또 다른 평행세계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카메라 앞에 서지도, 울지도 않고, 여느 때처럼 가족이나 동료와 저녁을 먹는 모습이요.
이태원 참사 이후 유가족들은 국정조사가 끝날 때까지 국회를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회의장에서 국회의원들에게 항의하고, 때로는 간청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들이 국회 식당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어느새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슬펐습니다. 어느 유가족이 국회에 "내 자식 살려내라"라는 피켓을 들고 오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한강의 소설이 그리는 유가족들
▲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의 살아생전 모습. 2018.4.20 ⓒ 이희훈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설레고 또 찡했습니다. 그의 소설이 상실과 파괴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하는 이들의 고군분투를 그린다는 점이,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세상은 바꾸지 못하더라도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위로할 수는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훈님,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울삶'에 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당한 유가족(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2018년 인터뷰 때문에 처음 간 그곳에서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을회관 같기도 한 곳이었는데, 벽면에 열사들의 영정사진이 채워져 있었으니까요.
당시 고 배은심씨(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에 30년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고, 경찰과 싸우고, 길바닥에 드러누웠다고 했습니다.
그건 <소년이 온다> 동호 어머니 이야기이기도 하고, <작별하지 않는다> 정심의 일대기와도 비슷합니다. 가족을 잃은 고통과 분노에서 그치지 않고 거대한 폭력과 마주한다는 점, 죽은 자가 하고 싶었던 말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주인공들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윤리와 존엄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그것만이 '넋'을 기리는 방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처럼요. 총을 들고서도 겨누지 못한 시민군 진수, 5.18 이후에도 도청 앞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에 분개하는 은숙, 제주에서 경산과 대구를 오가며 절박하게 오빠의 생사를 묻고, 민주화 이후에는 그 죽음(보도연맹원 학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정심...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유가족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빨갱이·폭도'(5.18, 4.3)라고, '데모꾼'(용산참사)이라고, '놀러 갔다가 죽은 것'(이태원 참사)이라고 하는 세상을 향한 일종의 결의였을 겁니다. 가족의 억울한 죽음이 정작 사회에선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을 때, 혹은 무시나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어느 누가 견딜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권력자가 폭력을 통해 '절멸'하려 했던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너와 나
▲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소년이 온다>를 쓸 때에는 뭔가 제 몸을 빌려주는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샤머니즘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일단은 너무나 압도적인 고통이고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느끼는 것이고, 그 돌아가신 분들에게 '나는 지금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내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과 그런 것들을 빌려드리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죠."
한강 작가가 2021년 9월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기념 온라인 북토크에서 한 말입니다. 저는 한강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감정이 이 말에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년이 온다>는 정대의 영혼을 비롯해 다양한 화자를 등장시키는 동시에 '너'와 '당신'이라는 2인칭을 씁니다. 마치 독자가 목격하고 체험한 것처럼 말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환상과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경하에서 친구인 인선으로, 또 인선의 엄마인 정심으로 바뀌고, 경하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4.3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의 서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내가 '넋'이 되거나 타인이 될 수는 없으니, 소설 속에서만큼은 '너와 나'의 구분을 무너트리고 함께 이 고통을 느끼자고 하는 것이겠죠. 이는 시민들이 국가폭력과 참사에 대해 '안타깝다'라고 지나치거나, 즉각적인 평가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애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말해줍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그린 조현철의 영화 <너와 나>는 '네가 되어 보는 이야기'입니다. 역시 수학여행을 가는 세미와 수학여행을 가지 않는 하은이 등장하지만, 정작 풀밭에 쓰러져있는 사람은 세미이기도, 하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네가 되어서 깨어났어"라며 꿈을 경유해서 두 사람의 정체가 뒤바뀌기도 합니다.
조 감독은 꿈 장면에 대해 한 세월호 생존자의 실제 꿈을 모티브로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프실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의 몸을, 저 통증을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나의 생각일 뿐이고 실은 전혀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씨네21> 인터뷰)라며 너와 내가 뒤바뀌는 장면을 넣고 싶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거대한 고통은 직면하기 쉽지 않습니다. 피하고만 싶죠. 또 막상 용기를 내서 연대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정치적 의도'가 뭔지 따져 묻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선 참사에 대해 더 쉬쉬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 속에서 몰이해와 편견이 피어오르는 것일 테고요. 애도가 어려운 시절에 한강과 조현철은 자신의 작품으로 말합니다. '네가 되어 볼게'라고. 그러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될 거라고요.
작별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책 표지 ⓒ 문학동네
"어떤 사랑도 애도도 종결하지 않겠다는 각오이자 결의."
한강 작가는 앞서 온라인 북토크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뜻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한 기자간담회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는)이별을 고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은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이 말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로도 들렸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선을 향해 "아직 사라지지 마"라며 끝끝내 성냥개비를 그어 불꽃을 만들어내는 경하처럼, 포기하지 않아야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동시에 한강 작가는 이 소설을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밝혔습니다.
정훈님도 아실 겁니다. 누군가는 그만 싸우라고 이야기합니다. 잊으라고, 지우라고도 하죠.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에게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도, 오래전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에게도요. 그러나 작별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사랑과 애도의 생명력은 매우 끈질기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가 알려줍니다.
어떤 무도한 개인도, 정권도 그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애도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그 행위를 이어갑니다. 그것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존엄을 증명하는 길이라서, 인간이 오로지 육신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파괴할 수 없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태원 참사 2주기,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
▲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주최로 지난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출구 앞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집중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과 참석자들이 “진실을 향한 걸음에 함께 해 주십시오”라며 관심과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 이정민
윤석열 대통령은 총선 전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고, 유가족 면담도 피하고, '정치 집회'라는 이유로 1주기 행사 참석도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은연중에 '애도를 배척하는 사회'를 만들었음은 물론이고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에 보낸 윤 대통령의 축사에 씁쓸함을 넘어서, 분노가 일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애도는 끝나지 않습니다. 사건은 영원히 잊히지 않습니다. 그건 권력자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는 26일 서울광장에서는 이태원 참사 2주기 시민추모대회가 열립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이야기'를 연재했던 김초롱씨는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이태원 참사 2주기 북 페스타'를 엽니다. 특히 이 행사의 마지막 프로그램인 '해피 핼러윈 파티'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혐오에 맞서는, 회복과 사랑의 의미를 담은 파티가 될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강 작가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사회일수록, 부당한 권력이 발 디딜 틈 없게 될 겁니다.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도, 폭력 앞에서 윤리적인 고민을 하는 이들도 늘어나겠죠. 이제 갓 태어난 정훈님의 딸이,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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