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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립 댄서와 결혼한 부잣집 아들, 막장 아침 드라마 못잖네

[김성호의 씨네만세 863] 29회 부산국제영화제 <아노라>

등록|2024.10.24 13:57 수정|2024.10.24 13:57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제마다 기대작이 있다. 영화제 일정을 손꼽아 기다리는 수많은 씨네필들이 초청영화 목록을 기다리는 이유다. 수입배급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오는 영화는 한 해 개봉작의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한국 개봉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또 영화제는 적잖은 영화를 극장개봉보다 한 발짝 먼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남보다 먼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니, 어찌 반기지 않겠는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여러 기대작이 있었다. 어떤 작품은 예매가 열리고 단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예매창이 닫히기도 했다. 각별히 인기가 높은 몇몇 작품이 이번 영화제 최대작으로 추려졌는데, 그 목록 안에는 션 베이커의 <아노라>도 있었다.

<아노라>가 기대작 목록에 오른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이색적인 일이다. 자연스러운 건 이 영화가 올해 칸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이자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이어 <아노라>까지 연달아 성공시키며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른 션 베이커의 신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영화 <아노라>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베일 벗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주인공

그러나 한편으로 <아노라>는 영화제가 끝나고 한 달여의 시간을 두고 개봉을 앞두고 있어 굳이 부산국제영화제의 열띤 예매 경쟁에서 우선순위에 두는 게 이상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어느 것을 먼저 하면 다음 것은 늦어지는 것이 세상사 이치가 아니던가. 굳이 다음 달에 편히 볼 수 있는 영화를 위하여 다른 기대작을 놓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일 수 있으므로.

<아노라>를 고른 건 충동에 가깝다 해야 좋겠다. 베이커의 전작을 워낙 좋게 보기도 하였기에 영화를 조금이라도 일찍 볼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다룰 수 없게 된, 한국에서 개봉할 수 없을 영화들엔 깊은 아쉬움을 가진 채로 상영관에 들어갔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곤 하지만 영화는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프랑스 칸에서 공개된 작품을 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 영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션 베이커는 지아장커 등 몇몇 감독과 함께 이번 영화제에서 작품을 선보인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가가 아닌가. 커다란 상영관이 사람들로 가득 찬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이 무엇인가. 한국에선 봉준호 같은 거장이 역작 <기생충>으로 단 한 번 들어 올린 상패다. 영화계에서 가장 큰 영예로 알려져 있고,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들만이 이 상을 받을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수상한 작품 <추락의 해부>·<슬픔의 삼각형>·<티탄>·<어느 가족>·<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면면을 보면 이 상의 가치를 알 만도 하다. 시대를 선도하는 지성, 작품으로 예술이 이룰 수 있는 정점에 다가서려는 이들에게 상을 줬다.

▲ 영화 <아노라>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놀랄 만큼 적나라한 스트립댄서의 일상

<아노라>는 어떤 작품인가. 영화의 제목 '아노라'는 여자의 이름이다. 직업은 스트립댄서, 가게에서 하는 양을 보면 창녀와 얼마 다르지 않지만 직접 성매매를 하는 가게는 아니다. 말하자면 유사성행위를 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직업여성인데 스스로 애니(미키 매디슨 분)라 하는 그녀의 본명을 따서 영화의 제목으로 붙였다.

영화는 시작부터 도발적이다. 옆자리 앉은 이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적나라한 장면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상반신을 탈의한 여성들이 업소를 찾아 민망한 듯 두리번거리는 남성들을 양 떼 모는 개처럼 몰아 방으로 들인다. 여성들은 경쟁적으로 손님 위에 올라타고 몸을 흔들며 팁이, 더 많은 팁이 나올 법한 상황으로 이끈다. 취하고 흥분하고 욕망하며 소모되는 사람들. 그 진탕되는 시간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다.

다음은 애니다. 업소의 많고 많은 아가씨 중 하나, 애니는 젊고 예쁠 때 한몫 단단히 당겨놓으려는 여자다. 집은 그렇고 그런 미국의 서민, 언니와 언니의 애인처럼 고집스레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다. 운이 좋아 예쁘게 태어난 그녀에게 업소에서 일하는 일은 재능을 살리며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효율적인 일이다. 언니처럼 세상에도 그를 마뜩잖게 볼 이가 없지는 않겠으나 몸을 파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떻단 말인가.

그런 그녀 앞에 한 젊은이가 나타난다. 친구들과 업소를 찾아 비싼 술을 잔뜩 시켜 먹은 그는 얼큰하게 취하여 애니 앞에 선다. 우즈베키스탄계 이민자 출신인 애니는 더듬거리며 러시아어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러시아 사람 대상 가게 에이스인 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화끈한 서비스가 시작되고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한다.

▲ 영화 <아노라>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철없는 부자와 속물적 여자의 막장스런 연애

그로부터 영화는 애니와 이 러시아 사내 반야(마크 아이델슈테인 분)의 흔해 빠진 이야기로 향한다. 사내의 정체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러시아 권력자의 귀한 아들이다. 돈 많고 힘도 센 아버지는 아들에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모양, 멀리 미국까지 공부하라 보내놓고는 이렇다 할 관심을 주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왔다. 돈도 많고 시간도 많은데 부모는 멀리 있는 갓 스물 아이가 무엇을 할까. 게임을 하고 된 통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사고를 치고 온갖 하지 말라 할 법한 일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를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사내와 부하들이 있지만 폭주하는 아이를 막지는 못한다. 좌충우돌 날뛰던 그가 스트립바에서 애니를 만나고 그녀와 바깥에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침내는 결혼까지 하게 된다. 결혼이라니. 그것도 어디서 굴러먹다 온 줄 모를 스트립바 댄서와.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로 러시아 국가와 민족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 그의 부모가 결코 허락지 않을 일이다. 철없는 아이를 이혼케 하려는 부모와 그가 보낸 사람들, 또 말도 잘 안 통하는 반야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애니의 이야기가 이 영화 <아노라>를 이룬다.

도파민이 뿜뿜 뿜어지는 영화다. 재벌집 막내도 아니고 유일한 후계자와 스트립댄서의 결혼이라니. 영화는 그 시작도 별것 아니라는 듯 혈기 왕성한 두 남녀가 붙을 때마다 서로 섹스하고, 다시 먹고 마시고, 또 섹스하는 장면을 자극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고귀한 정서적이며 정신적인 것은 못된데도 이들의 사랑을 누구도 의심치 않을 때가 되어서야 이들의 결합을 가로막는 역경을 던져놓는다. 그 과정 또한 자극적인 소동극 못잖아서 영화를 보는 이들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스크린에 두 눈을, 이야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요컨대 <아노라>는 이 시대 가장 자극적 설정으로 무장한 작품이다. 션 베이커와 같은 걸출한 창작자가 아침드라마적 설정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는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하는 궁금증을 이로부터 해소할 수도 있겠다. 이 시대 연애와 결혼의 속물적 구조를 낱낱이 뜯어 비추는 한편으로 계급화된 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일깨운다는 흔한 비평도 어찌저찌 들어맞기는 한다.

▲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 부산국제영화제


더없이 통속적인 방식으로 칸의 선택을 얻다

그럼에도 <아노라>의 본질은 재미다. 너무 많고 잦아 너절한 섹스와 그 사이사이 절묘하게 침투한 지극한 코미디의 매혹적 결합이기도 하다. 돈 많은 사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현실을 성실히 살아가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 속물적 여성의 캐릭터가, 또 희망이 없어 연애도 못 한다고 자조하는 이 시대 흔해 빠진 베타남의 마음을 가차 없이 때리는 알파남의 모습이 차라리 시대고발에 가깝게 여겨진단 건 부차적인 문제다.

<아노라>는 가장 통속적이고 흔해 빠진 방식으로 저 고상하기 짝이 없는 칸영화제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황금종려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심사위원장인 그레타 거윅, 즉 사상 처음으로 여성 심사위원장이 된 감독이란 평가다. 그녀가 황금종려를 건넨 이는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소소하고 소외된 것들에 주목해 온 션 베이커가 아닌가.

<아노라>는 저의 수상이 그저 팔이 안으로 굽는 시시한 선택만은 아니란 걸 스스로 증명해 냈다. 여성을 상품화하는 민망한 영화란 흔한 비판, 또 그렇게까지 벗기고 이뤄낸 주제의식이 그다지 대단치 않다는 설득력 있는 평가에도 <아노라>는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낸다. 그건 감동과 변화, 무엇보다 재미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a href="https://brunch.co.kr/@goldstarsky" target="_blank" class=autolink>https://brunch.co.kr/@goldstarsky</a>)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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