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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기록한 외신 기자,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

[다시 만날 그날까지 33화] 데이비드 밀러 - 앨런 위닝턴 기자와의 만남 2부

등록|2024.10.24 10:58 수정|2024.10.24 10:58

사진1밀러 박사가 2024년 6월 대전 산내 골령골 피학살자위령제에서 신위에 헌화하는 모습 ⓒ 밀러


[관련기사] 데이비드 밀러 박사-앨런 위닝턴 기자를 통해 들어본 민간인학살
https://omn.kr/2abwm

- 밀러! 위닝턴 자료와 유품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저는 2018년도에 에스더(첫 번째 부인)와 조 위닝턴(아들)을 런던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워하면서도 '그동안 위닝턴의 중요한 자료를 찾은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었어요'라고 했어요. 위닝턴 가족들도 위닝턴의 망명 생활을 지켜보면서 아픈 사연을 안고 살았기에 밀러의 소식에 반가움을 금치 못했어요. 이 당시 조 위닝턴이 우슐라(두 번째 부인)를 소개해줬어요. 우슐라는 2004년도 콜린 홈스 교수에게 위닝턴의 유품과 자료를 전달하였는데 15년 이상 연구실에 보관해 두었대요. 우슐라가 홈스 교수의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고 저는 홈스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한국 상황을 알리고 세필드 대학에서 만나서 위닝턴 유품과 자료를 사본으로 전달받았어요."

사진2(좌)영국 세필드대학 역사교수 코렌 홈스 (우) 밀러가 2021년 독일에 있는 위닝턴의 별장에서 우슐라가 밀러에게 「인민 중국」 자료를 주는 모습(사진 제공:밀러) ⓒ 밀러


-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위닝턴 유품과 자료를 확인한 순간 밀러의 마음은 어땠어요?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와 유품을 찾아서 기뻤죠. 한편으론 한국전쟁에서 민간인학살 만행을 저지른 증거들을 왜 진작 밝히지 않고 70년이 넘도록 비밀리에 간직하고 은폐해 왔는지 내 마음이 혼란스러웠어요."

- 대전 동구청에 입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전 동구청장 황인호씨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2020년 평통문 교육연구소장 임재근 박사와 시민단체가 골령골 사건에 관한 <산내 골령골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란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후원금이 필요했어요. 여러 관계기관에 있는 분들 인터뷰했는데 당시 다큐멘터리 제작자 정진호가 저를 임재근에게 소개했어요. 저는 다큐멘터리에 인터뷰도 했고 저의 콜라쥬 작품을 소개했고 그 계기로 황인호 (전) 청장을 소개받았어요. 사실 제가 골령골 발굴 현장에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지 않아 못 가고 있었던 차에 만남이 이루어져서 매우 반갑고 좋았어요. 그 인연으로 동구청에 국제보좌관으로 입사하게 되었어요. 예! 결국 밀러의 끝없는 관심과 노력으로 위닝턴의 역사의 한 페이지가 펼쳐졌네요."

사진3(좌) 밀러가 2018년도 위닝턴 유품을 청장실에서 펼쳐보고 있는 모습. (우) 2024년 6월 대전유족회 민간인학살 위령제 때 모습:오른쪽부터 밀러, 임재근, 황인호, 대전유족회장 전미경, 등(사진 제공:임재근) ⓒ 임재근

- 밀러가 위닝턴 유품을 한국으로 가지고 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2018년도 국제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황인호 전 청장에게 앨런 위닝턴에 관련된 종군기자의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어요. 저는 곧장 2020년도에 코로나 전염병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설레는 마음과 단호한 결심으로 영국과 독일에 공무 출장을 위해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영국에서 가족들을 만났을 때 그동안 위닝턴의 자료가 은폐되어 있다가 한국에서 공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하고 뜻있는 일이라고 말했어요. 그 후 2021년도 우슐라에게 연락하여 유품도 가져오게 되었어요."

(필자는 2021년도 동구청 강당에서 '대전시 낭월동 한국전쟁 전후 골령골 발굴보고회'에 참석했을 때 강당 좌편에 위닝턴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유심히 검토하고 촬영해 두었다가 오마이뉴스 11화에 기사 발행한 적 있다. 당시 촬영한 유품 몇 점만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42021년도 낭월동 골령골 유해 발굴 최종보고회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필자와 아랫줄 오른쪽 첫 번째 밀러 모습 ⓒ 김영희

사진52021년도 골령골 보고회 당시 앨런 위닝턴 유품을 전시한 것(1950년 한국전쟁 시 종군 기자로 근무할 당시 입은 인민복과 촬영한 카메라와 기사 쓸 때 사용한 타자기) 등 ⓒ 김영희


- 위닝턴 가족들은 유품이 어떻게 활용되길 바랍니까?

"위닝턴 유품은 현재 동구청에서 보관하고 있어요. 가족들은 유품이 안전한 곳에 잘 보관되길 바랍니다. 또한 위닝턴이 영국 시민권도 포기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한국전쟁 중 일지와 촬영한 귀중한 자료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단서가 되어 역사적 가치와 사료로 활용되길 바랄 뿐이라고 했어요. 앨런 위닝턴 자료와 유품이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에 관련된 아픈 역사와 왜곡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한 진실의 사료로써 활용할 수 있도록 앨런 위닝턴의 연구자가 나타나길 바랄 뿐입니다."

-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에 관심 가지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할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싱가포르에 참전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포로수용소에서 5년간 생활하고 돌아오셔서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사셨어요. 풀려난 이후 할아버지는 알콜 중독자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런 할아버지의 삶을 지켜보는 아버지는 무척 괴롭고 싫었대요. 평소 아버지는 저에게 전쟁이 남긴 상처가 개인의 삶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말씀 해주셨어요. 그것을 듣고 자라면서 전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 위닝턴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언제 태어났습니까?

"위닝턴은 1910년 3월 16일생 영국 에섹스(Essex) 남동부의 주에서 태어났어요. 자녀는 아들 조 위닝턴 한 명 있습니다. 위닝턴은 어느 날 런던 술집에서 파시즘과 싸우자는 전단지를 받아보고 전단지 내용이 마음에 와닿았대요. 그때부터 반파시즘에 관심과 마음이 끌렸답니다. 그는 당시 20대였고 좋아하는 것, 문학, 시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해요. 위닝턴은 1934년에 24살 때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단체 활동을 시작하면서 영국의 사회주의 정부 시책과 그 업적의 홍보, 선전 및 그 밖의 공보 사무를 맡아 장관을 보좌하는 공보관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당시 위닝턴은 자존감과 자신감에 넘쳐있었대요. 아울러 가정적으로도 따뜻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어요."

사진 6(좌) 위닝턴 서재에서 책을 보는 모습 (우) 1954년 왼쪽부터 위닝턴이 조 위닝턴 2살 때 함께한 모습(사진제공:밀러) ⓒ 밀러


"위닝턴은 1930년대 후반, 20대 후반 나이에 '베이징 주재 데일리 워커지 특파원' 기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영국지역에 폭탄을 터뜨렸을 때 위닝턴이 피해자로 치아를 다친 적이 있었어요. 폭탄 피해자였어요. 그 영향으로 반파시즘에 대한 감정과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진 듯합니다."

- 위닝턴은 한국전쟁기를 역사적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자 한 것이 맞습니까?

"위닝턴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남침할 때 종군기자 신분으로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당시 나이는 40세 정도였으며 남한에 머문 시일은 35일간 정도였다고 합니다. 위닝턴이 머문 지역은 평양, 원산, 서울, 인천, 수원, 조치원. 평택, 대전 등입니다. 대전 골령골 학살지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촬영하고 사실 그대로 일기를 자세히 기록하였어요."

- 위닝턴에게 한국전쟁 시기에 골령골 이외의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현장 사진이 있습니까?

"타 지역 학살지 사진은 없습니다. 학살 장면을 목격한 지역은 골령골 사건이 유일합니다. 일부 지역의 학살지는 시기와 날짜가 맞지 않았습니다. 다만 위닝턴이 도착했을 때는 학살 후였기에 현장은 거의 산속이라 찾아서 확인할 수도 없었기에 주변의 현장에서 생존자나 유족들의 증언만 듣고 기록에 남겼습니다. 당시 전쟁통에 미군 폭격으로 민간인을 죽이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고 이것도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폭탄을 굳이 민가에 터뜨리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폭탄을 투하했고 죄 없는 민간인 중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많이 죽인 것을 볼 때 독일 나치보다 더 잔인함을 느꼈다고 일지에 기록되어 있어요."

사진 7(좌) 1950년도 판문점에서 종군기자 생활을 하는 모습, (우) 1959년 가운데 위닝턴과 에스더와 북한에서 거주할 때 선전 여행 가서 촬영한 사진(사진제공:밀러) ⓒ 밀러


다음은 위닝턴의 한국전쟁 시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의 일지 중 일부를 소개한다.

사진 8앨런 위닝턴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 (파일 제공: 밀러) ⓒ 밀러


- 앨런 위닝턴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위닝턴은 자신이 쓴 기사로 인해 일생 동안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가 북한에서 인민군의 협조를 받았다는 이유로 배신자로 낙인찍고 반역자로 기소하겠다고 위협했어요. 그러나 그가 한국전쟁 취재를 계속하자 영국 정부는 여권을 말소시켰고요. 그로 인해 위닝턴은 자국인 영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에서 20여 년간 고독한 망명 생활을 해야 했죠. 오직 진영의 논리로 박해받은 한 개인의 삶은 파탄 지경에 빠졌습니다. 결국 1983년 11월 77세 나이로 뇌졸증과 고혈압 등의 병환으로 고생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고 합니다.

- 위닝턴의 묘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위닝턴의 묘지와 비석은 없어요. 위닝턴이 사망하기 1년 전 1973년도 데일리 워커 동료 기자인 앨렌 휴트(Allen Hutt)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앨렌 휴트의 유해를 런던 칼 마르크스 비석 왼쪽에 뿌렸대요. 그때 위닝턴이 유언장을 썼는데, 유언장 내용은 자신이 죽으면 유골을 런던의 칼 마르크스 비석 오른쪽에 뿌려달라는 내용이었대요. 그래서 위닝턴이 1983년 사망했을 때, 그의 가족과 지인들이 위닝턴의 유해를 마르크스 비석 오른쪽에 뿌렸다고 합니다. 결국 사망 후 조국으로 돌아갔네요."

-밀러는 위닝턴 기자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영국에서 위닝턴 가족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듣고 난 후 위닝턴이란 한 인간은 너무나 마음이 약하고 심지가 깊고 온화한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기 당시 한국인의 민간인학살에 관련된 사진을 보고 직접 현장에 참여하여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취재를 한 종군기자로서 누구보다 한국전쟁 관련 자료는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사후라도 그는 꼭 진실을 밝히는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10좌) 2019년 6월 에더스가 대전위령제 참석한 모습 우) 대전 유족과 슬픔을 나누는 모습(사진 제공:밀러) ⓒ 밀러


- 위닝턴의 전 부인이었던 에스더가 대전 골령골 위령제 때 참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스더는 남편 위닝턴과 골령골 사건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기에 에스더도 골령골 사건을 잘 알고 있어서 한국에 오고 싶어 했어요. 2019년도 6월에 여행 경비도 본인이 부담하여 먼 나라 한국으로 방문하였어요. 그래서 골령골 위령제 때 참석하여 추모사도 했어요. 에스더가 위닝턴이 1970년대 싣고 다녔던 샌들을 들고 위닝턴의 인물을 알리며 대전 유족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있어요."

- 마지막으로 밀러가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와 삶의 방향이 잘 맞는 파트너를 만나서 결혼도 했고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한국인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에게 마음이 끌렸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너무 좋은 분들과의 인연이 계속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점점 이 일에 빠져드는 듯합니다. 나의 작은 양심과 에너지 그리고 열정을 쏟으면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속담처럼 말입니다."

인터뷰 도중에 밀러가 필자에게 좋은 일 한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필자가 '감사합니다. 봉사활동 차원에서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밀러가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자기와 똑같다고 엄지손가락으로 최고 하면서 서로 함박웃음이 터졌다.

필자는 밀러 박사의 사연을 마무리하면서 앨런 위닝턴의 자료와 유품이 어두운 자료실에서 밝은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일은 밀러와 필자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필자도 전국 학살지에 묻혀있는 피학살자들을 어둠에서 밝은 빛으로 꺼내어 주는 가교역할이다. 위닝턴의 자료와 유품도 언제까지 어두운 자료실에서 기약 없이 밝은 빛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밀러의 노력과 관심으로 70년이 넘게 비밀리 은폐되고 공개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지금에서야 진정한 주인을 찾아서 먼 이국땅 한국의 품으로 안겨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번 기회에 밀러 박사와 황인호 전 대전 동구청장 두 분의 중요한 역할이 언젠간 더욱 빛나길 기대하면서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필자는 민간인 학살지 관련 조사와 유해 발굴 작업 그리고 기사를 쓰면서 고난도 많지만 밀러 같은 해맑고 착한 사람이 있기에 힘을 얻게 된다. 하루속히 앨런 위닝턴의 사료집을 연구할 연구자가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사진 11(좌) 밀러 박사 인터뷰 때 해 밝은 모습 (우) 밀러, 은미, 필자와 헤어지면서 찍은 모습 ⓒ 김영희


다음 달에 34화가 계속됩니다.

사진명함 ⓒ 김영희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편집부에서 편집을 확인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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