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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싫다면서 아프면 달려오는 남자... 이런 사랑 어때요?

[리뷰] ENA <나의 해리에게>

등록|2024.10.25 10:30 수정|2024.10.25 12:11
(*이 기사는 방송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돌보고 싶다.' 이 문장은 최전선에서 하는 고백이다. 누군가의 무력함을 지루하게 생각지 않고, 누군가의 결핍을 버겁다고 내치지 않을 때 가능한 문장이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기쁨만 주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논하는 사랑이 그런 종류의 것이다.

ENA <나의 해리에게>는 마음속 깊은 상처로 새로운 인격이 발현된 아나운서 은호(신혜선)와 전 연인 현오(이진욱)에 관한 이야기다.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사랑스럽지 않다. 사랑했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가 또 싸운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다'고 하면 거짓이다. 하지만 서로를 '돌봤다'고 하면 사실이다. 어쩌면 사랑이란 단어의 가장 가까운 동의어는 돌봄이라고, 드라마가 말했다.

사랑할 때도, 헤어져서도 '돌보는' 사이

▲ <나의 해리에게> 화면 갈무리 ⓒ ENA


은호와 현오는 빈집 같은 사람들이다. 어렸을 적 부모를 잃은 은호는 친척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동생과 함께 컸다. 그러나 동생은 은호가 억지로 보낸 졸업여행에서 실종됐고 할머니는 충격에 세상을 떠난다. 현오의 아버지는 노름꾼이었고, 어머니는 가출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빚더미에 빠진 현오는 전주(錢主)의 도움으로 겨우 컸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전주 할머니와 그의 동료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약속 아닌 저주에 걸려있다.

그런 둘이 같은 방송국에서 동료 아나운서로 만났다. 사내 운동회에서 현오는 처음 인사한 은호에게 다짜고짜 자신을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래 놓고 운동장 바닥을 샅샅이 살핀다. 몇 시간이고 말없이 뒤적이는 현오 때문에 은호가 분노를 터뜨리자 그제야 숨은 비밀을 말한다. 사실 자신의 어머니가 남기고 간 목걸이를 찾고 있었다고.

끝내 목걸이를 찾지 못하지만, 은호는 현오에게 약속한다. 그 목걸이를 자신이 꼭 찾아주겠다고. 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한다. 첫 만남에서 밑바닥을 보인 현오와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은호. 그들이 사랑에 빠진 건 순리였다.

그러다 8년째 사귀던 해에 은호는 "결혼하자"고 말했고, 현오는 매정하게 떠났다. 죽을 때까지 전주를 도와야 하는 자신의 굴레에 은호까지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별은 서로를 향한 '돌봄'을 선명하게 했다. 둘은 앙숙처럼 싸웠지만, 서로를 도왔다. 현오는 회사에서 찬밥 신세가 된 은호를 돕겠다고 프로그램 편성을 바꾸고 보직까지 내려놓았다. 반대로 은호는 무엇이든 하겠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현오를 도와달라고 빌었다. 헤어졌지만 둘은 상대의 표정을 끝없이 살폈고, 사랑했던 사이라서 알 수 있는 힘듦을 알아챘다.

미묘한 사이에 기폭제가 된 건 은호였다. 가족, 남자친구, 이젠 아나운서라는 직업마저 위태로워지자, 은호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런 은호를 찾은 건 현오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빈틈을 채웠다.

마치 사귀었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모든 곳에 손을 뻗었다. 은호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고, 집을 청소하고, 동네를 걸었다. 그의 투정을 들어줬고, 차마 말하지 못할 때는 표정으로 읽었다.

아픈 은호를 향한 현오의 사랑은 일방적인 보살핌이었다. 모든 걸 잃은 은호는 시름시름 앓았고 현오는 질려하지 않고 옆에 있었다.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항상 그에게 돌아가려고 했고 마침내 명분을 찾은 사람처럼 현오는 '아프다'는 은호의 말에 되레 미소를 지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대신 '도와주겠다'는 그들의 사랑은 끝없이 취약한 서로를 감쌌다.

'가끔씩 아파주라'

▲ <나의 해리에게> 화면 갈무리 ⓒ ENA


헤어진 것도, 재결합한 것도 아닌 나날들이 이어졌고 여느 때처럼 현오는 함께 외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 말에 기운을 차린 은호가 채비를 하던 도중, 현오는 전화를 받게 된다. 전주 할머니가 위급하다는 전화에 현오는 어떠한 말도 없이 떠났다. 마치 '결혼하자'는 말에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그들의 마지막처럼.

다시 빈집에서 은호가 멍하게 서 있던 찰나, 현오가 황급히 돌아와서 말한다.

"아파라. 이렇게 가끔씩 아파주라. 그래 줄래, 주은호?"

현오는 아픈 은호를 돌보며 다시금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무기력한 그를 돌보고, 보살피면서 여전한 마음을 느꼈다. 그렇기에 '가끔씩 아파달라'는 이기적인 부탁에서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진다. 너무 사랑해서, 아픈 순간에만 찾아가려는 것이 현오의 사랑이기에.

그러나 은호는 그 사랑을 변심이라 여겼고, 둘은 그렇게 작별한다. 사랑이 재개되는 건 은호가 다시 취약해진 순간이었다.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그에게 새로운 인격이 발현됐고, 홀로 숲속으로 도망친 것이다. 현오는 은호가 숨어있는 곳으로 찾아가 그를 다시 일상으로 돌려놓는다.

이번에는 말도 내뱉지 못할 만큼 아파하는 그를 보며 현오는 완강히 다짐한다. '은호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고. 그리고 은호도 한 가지 깨닫는다. 이중인격을 오가는 자신에게 필요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돌봐 준 현오라는 사실을. 전속력으로 서로에게 달려간 둘은 마침내 완전히 웃는다.

<나의 해리에게> 전반에는 '돌봄' 키워드가 깔려 있다. 자신의 노후를 돌봐줄 사람을 찾기 위해 어린 현오를 거둔 전주 할머니부터, 부모를 잃고 친척에게 버림받은 은호와 동생을 돌본 아주 먼 친척 할머니, 그리고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은호의 또 다른 인격 '혜리'에게 받으며 그의 모든 순간을 돌보고 싶다고 고백한 주연(강훈)까지.

멜로 드라마지만,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랑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관계에서든 당신을 돌보고 또 도와주겠다는 말이 가장 많이 오갔다. 어떻게 보면 '사랑해'보다 덜 낯간지럽지만, 그보다 숭고할지 모른다.

단단한 껍질 밑에 숨은 누군가의 취약함을 돌보고 싶다는 드라마의 사랑법. 이런 게 사랑이라면 도무지 할 자신이 없다. 그저 은호와 현오의 사랑을 지켜볼 수밖에.

▲ <나의 해리에게> 메인 포스터 ⓒ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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