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를 데리고 연고 없는 달동네로 간 까닭
[열 개의 우물] 만석동-십정동에서의 추억
김미례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열 개의 우물>이 2024년 10월30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70-80년대 여성노동과 인천 빈민지역의 탁아운동을 함께 했던 여성들을 조명했다. 그녀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그 시대를 살았는지, 그 이후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따뜻하게 함께 품어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서 열 편의 기획기사를 준비했다.[편집자말]
하지만 내가 사람들에게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인천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인천이 고향 같아요"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동네는 고작 두 해를 지낸 동구 만석동 판자촌이다. 편의상 '판자촌'이라고 썼지만, 사실 그 곳은 판잣집도 아닌 루핑집들이 갯벌에 모여 만들어진 동네였다. 검은 천에 기름을 먹여 대강 지붕을 두른 것을 '루핑'이라 부른다. 어른들은 새벽부터 공장이나 갯벌로 나갔고 밤에는 천막 아래서 굴 껍데기를 깠다. 나의 젊은 어머니는 연고 없던 그 동네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비영리 공부방을 열고 꾸려나갔다.
만석동 철거투쟁 속에서 만났던 인연들
▲ 큰물공부방 아이들만석동 43번지 ⓒ 문보미
어머니는 큰물공부방 활동과 만석동 철거투쟁 과정에서 만났던 인연들을 기억하신다. 비록 글자는 잘 몰라도 리더십도 있고 똑똑하셨다던, 가족과 이웃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있던 아주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나에게 공장과 갯벌의 바다가 다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종종 자랑처럼 말한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십 분만 걸어 나가면 바다였어."
"아, 좋았겠다."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다른 풍경이리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진심으로 말한다.
"응, 좋았어."
큰물공부방이 있던 만석동이 흐릿한 어린 기억 속 고향 같다면, 해님방이 있던 십정동은 돌아갈 집 같다. 가끔 꿈에서 철거되기 전의 그 동네를 걷는다. 어릴 때 내 눈에 비친 것처럼 비탈은 가파르고 골목은 길다. 좁은 골목에는 때묻은 스티로폼 박스 위 붉은 분꽃과 메꽃들이 올라서 있다. 삐걱대는 은빛 샷시문이 있는 해님방이 있고, 좀더 걸어가면 유리문이 달린 해님책방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선생님들이 웃으신다. 큰물공부방에서도 해님 공부방에서도 우리는 같은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공포, 이제 우리는 비로소 알았네. 아주 작고 작은 곳."
밤에 자다가 슬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잠결에 어른들의 두리번거리는 말을 들었는데, 나보다 몇 살 많던 관순이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취한 아버지에게 자주 맞아 어두운 낯빛이었지만 가끔 수줍게 웃곤 했던 언니였다.
우리 어머니는 가정폭력으로 쫓겨나 골목에서 울고 있던 젊은 아주머니를 집에 데려와 재우기도 하셨다. 폭력들이 더 낮은 곳으로 흐르던 달동네에서 그래도 아주머니들은 서로 먹을 것을 나눴고, 우리는 즐겁고 씩씩하게 놀았다. 해님방을 중심으로 한 동네 주민들의 힘으로 더 큰 폭력들을 막아내기도 했다.
반강제 복강경 수술과 관련된 싸움에서 이긴 적도 있다. 한 번은 해님방으로 동네 아주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마침 있던 어머니를 붙잡고 외쳤다고 한다.
"보미 엄마, 나 좀 숨겨줘요. 살려줘요."
그때는 '하나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여기저기 붙어있던 시기였다. 정부는 불임시술을 하는 병원에 지원금을 주었고, 병원들은 가난한 동네를 돌면서 '간단한 무료 수술'이라며 여성들을 꾀어 데려가 불임 시술을 시켰다. 사인을 한 뒤에는 '마음이 바뀌었다, 안 하겠다'고 해도 간호사들이 양 옆으로 팔을 잡고 봉고차에 태웠다고 한다. 그날도 간호사들을 피해 달아나던 아주머니가 해님방으로 온 것이었다. 정확한 정보도 충분한 상담도 진료도 없는 마구잡이 수술이라, 당연히 후유증도 컸다. 해님방에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모아 제출한 건의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동네를 순회하는 가족계획 요원이나 병원 봉고차에 유입되어 수술을 받았습니다..
[...]정부의 시책을 믿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형편인데, 당시 받은 수술로 인해 수술 전에는 겪지 않던 통증(극심한 생리통, 구토, 허리통증, 하반신 마비 등)으로 매일 일정한 기간 또는 수시로 몸져눕게 되고, 그 치료비 또한 적지 않습니다.
해님방을 중심으로 강력히 문제제기 한 결과, 피해 여성들은 복원 수술과 후유증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그 상황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무언가 바뀌어간다는 것 알 수 있었다. 늘상 아팠던 앞집 아주머니가 뭔가 눈을 빛내면서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을 본 것도 같다.
만석동-십정동 생활은 '축복'이었다
▲ 해님놀이방제 1회 해님놀이방 졸업식의 보미 ⓒ 해님공부방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 외에도 해님방을 중심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난하고 험한 동네라고 고쳐주지 않고 몇 달째 방치해둔 고장 난 공중전화, 모퉁이가 위험하게 깨져나간 시멘트 계단 하나하나 주민의 의견을 모으고 싸우면서 고쳐나갔다고 했다. 어머니와 함께 해온 주민들의 힘으로 그러한 싸움은 계속됐다. 어머니는 구의회에서 일하고, 시의회에서 일하고, 구청장으로 일하면서도 계속 싸움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풀뿌리 생활정치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과 같은 말들이 당연한 속에서 나는 자라났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엄마 잘못 만나서 어린 아이들이 달동네에서 고생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어린 우리가 만석동에서, 십정동에서 자란 것은 드문 축복이었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열개의 우물>에서 김현숙 선생님은 달동네 탁아운동 시기를 회고하며 "그땐 진짜 행복했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몰라"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하신다. 아이들 생일이라고 없는 살림에 닭 한 마리 고우면, 공부방 선생님들을 꼭 불러서 먹였다던 어머님들 이야기도 하신다. 우리 어머니도 말씀하셨다. 그땐 빈 입으로 다녀도 굶지를 않았다고.
바로 보름 전 그 동네 어머니들을 또 뵈었다. 영화에도 나온 해님방 자모회 '자수정' 어머니들이다. 삼십 년 넘게 두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모이시는데, 마침 모임날이 어머니 생신이었다. 앞집 살았던 윤미 어머니(본명 박순분님)는 반갑게 나를 옆자리에 앉히고 어릴 때처럼 내 먹을 것을 챙겨주셨다. 고기를 같이 구워먹고 어머니가 사 오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지금은 다들 흩어져 살고 계시지만, 이럴 때 나는 어쩐지 든든해진다.
열 개의 우물 속에서 나는 자랐다
▲ 북성포구만석동 북성포구에서 ⓒ 감 픽쳐스
<열개의 우물>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었다. 신소영 선생님이 내 어릴 때 기억과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십정동이 지금 헐리고 거기에 빽빽한 아파트, 40층 50층 높이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어요. 해님방에서 또는 해님방 주변에서 이제 서로 아이들을 어떻게 잘 키울지, 또 우리 동네가 어떻게 하면 또 살맛나는 동네가 될 수 있을지, 그런 걸 같이 공부했죠. 또 어떤 일을 같이 하고 마을 잔치도 같이 하고 하면서 함께 만든 경험과 가치가 있잖아요. 동네는 헐렸어도 그렇게 자라왔던 엄마들, 할머니들, 또 아이들이 다 여기저기 퍼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기 나름의 자리에서 또 그 역할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어릴 적 골목들은 꿈에서나 만날 수 있다. 어린 내가 좋아했던 바다 만석 포구는 매립되어 개발 중이다. 그래도 마을 잔치 때 손잡고 빙빙 돌던 강강술래의 기억과 같이 먹던 밥상과 함께 부르던 노래, 이웃들과 '같이 만들어온 가치'는 두레박에서 계속 길어 나오는 시원한 물처럼 우리의 어딘가에서 반짝인다. 열 개의 우물 속에서 나는 자랐다.
덧붙이는 글
보미는 현재 여성학을 공부 중이며, 전 큰물공부방과 해님공부방의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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