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불편한 노인이 보고 와서 "머리털 곤두선다"한 곳
[중국동북3성여행기 3] 만주 항일 독립운동의 출발지 용정
▲ 일제가 고사시킨 소나무 자리에 동포들이 정자를 세워 '일송정'이 탄생했다. 앞에 보이는 작은 소나무는 2003년에 새로 심은 소나무라고 한다 ⓒ 오문수
일행의 3일째 목적지는 만주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용정이다. 오래간만에 중국을 방문해서인지 토요일인데도 차가 붐빈다. 중국이 발전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나 차가 많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뻥 뚫린 고속도로와 즐비한 현대식 건물이 놀랍기만 하다. 차는 많아졌는데 교통법규 준수는 아직도 미흡해 보여 가이드에게 물으니 재미있는 답변이 나왔다.
가이드의 재미있는 답변에 박장대소한 일행은 가이드 별명을 '그러려니' 가이드로 부르기로 했다.
일행이 연길을 떠나 용정시내에 들어가기 직전 도로변에는 과일 파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차를 세워 맛있다는 "사과배가 있느냐?고 묻자 대뜸 "한국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69세 중국동포 아주머니는 "오랜만에 고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만났다"며 사과배를 듬뿍 담아 줬다.
일제경찰이 쏜 총탄에 14명 희생된 반일 의사릉
용정에서 일행이 방문한 첫 번째 목적지는 '3.13 반일의사릉'이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 곳곳에서 전해오는 독립 만세운동에 고무된 3만여 중국동포들은 1919년 3월 13일 용정시에 모여 시위 행진에 나섰다.
▲ 3.13반일의사릉 앞에서 큰절을 올린 후 기념촬영한 일행들 모습 ⓒ 오문수
시위대가 용정 일본총영사관을 향해 행진하며 '일본놈은 물러가라! 등 구호를 외치자 주둔한 일본군과 경찰들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14명이 사망하고 15명은 부상, 30여 명이 체포됐다. 사흘 뒤 중국동포들은 사망자들을 이곳에 안장했다.
일행은 묘비 앞에서 큰절을 올린 후 곧바로 '15만엔 탈취사건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자동차 도로에서 벗어나 계곡쪽으로 100여 미터를 가니 어른 크기만한 돌에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란 표지판이 나왔다.
▲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라고 기록된 안내문 ⓒ 오문수
계단을 올라가니 커다란 돌에 15만원 탈취사건 현장임을 알리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 15만엔 탈취사건기념비를 둘러보는 일행들 ⓒ 오문수
'15만원 탈취사건'이란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원' 최봉설·윤준희·임국정·한상호·김강·박웅세 6인이 용정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수송되는 현금수송대를 습격해 군자금을 탈취한 사건을 말한다. 가이드는 "당시 15만엔은 지금으로 치면 5조원 정도되는 큰 돈입니다"라고 말했다.
거사 전 철혈광복단원들은 은행원 전홍섭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동량 어구 버드나무 숲에 매복하여 수송대를 습격 현금 15만 원(엔)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용정에 있었던 전홍섭이 일경에게 붙잡히고 밀고자가 생기면서 단원들의 신원이 노출되어 1920년 1월 31일 새벽 3시 윤준희·임국정·한상호는 신한촌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고, 최봉설만 탈출에 성공하였다. 탈취한 자금은 일제에 압수당하였다고 한다.
중국동포가 발견한 우물 '용정'의 이름을 따서 용정시가 탄생했다
일행이 탄 차가 용정시 중심가에 차를 세우자 가이드가 "이곳이 바로 '용정(竜井)'이란 지명의 발상지입니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시내 한 가운데 평범해 보이는 우물이 있고 우물 주위에는 고사목 한 그루가 서있었다. 우물가에 세워진 '용정지명 기원지' 비석 내용이다.
▲ '용정'이란 지명의 기원이 된 우물 모습 ⓒ 오문수
"1879년부터 1880년 경에 조선에서 이민 온 장일석, 박인원은 우물을 발견하고 우물가에다 '용두레'를 세웠다. 용정지명은 여기서 유래했다. 1934년 용정촌 주민 리기섭이 발기하여 우물을 수선하고 약 2m 높이의 비석 하나를 세웠는데 그 비문을 '용정지명 기원지 우물'이라고 새겼다. 1986년 용정현 인민 정부에서는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되었던 우물을 다시 파고 비석을 세웠다."
중국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비암산이다. 비암산은 가곡 <선구자> 속에 나오는 일송정이 있는 곳이다.
비암산 전망대(420m)에는 원래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독립군들은 용정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을 내려다보며 비밀회의를 했다. 항간에는 이 소나무가 총영사관을 덮치는 형국이라 1938년에 일제가 고사시켰다는 후문이다.
현재 지름 30여㎝ 정도의 소나무는 2003년에 다시 심었고 고사목 자리에 정자를 지어 '일송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송정을 오르기 위해서는 바윗돌을 넘어야 한다.
일행이 일송정을 오르려는 순간, 다리가 불편해 부축받으면서도 이를 보고 내려오는 노인을 만났다. 그에게 일송정을 올라 본 소감을 들었다.
경남 창녕에서 왔다는 78세 노인의 얘기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피땀 흘려 싸운 조상들이 생각나 머리털이 곤두섭니다. 우리 정치판을 보세요.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싸움질만 하는 것 같습니다."
▲ 일송정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용정시내 모습으로 벌판 사이를 흐르는 강이 해란강이다. ⓒ 오문수
▲ 비암산 전망대에는 원래 그림속에 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만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하던 중국동포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벌였던 곳으로 지형상 소나무가 일본총영사관을 덮치는 형국이어서 일제가 고사시켰다고 한다. 훗날 동포들이 고사된 소나무 자리에 정자를 세워 '일송정'이 탄생했다고 한다. ⓒ 오문수
전망대에서 용정 시내를 바라보니 오른쪽에 해란강이 흐르고 80리 평강벌(평야)과 40리 서전벌(평야)에는 중국동포들이 심었을 걸로 여겨지는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일행이 <선구자> 노래를 큰소리로 합창하고 난 후 전망대 아래로 내려오자 그 곳에는 돌비석에 '일송정'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진을 찍다가 둥그런 돌에 글씨가 지워진 흔적이 있어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원래 '선구자' 가사가 적혀 있었는데 당국에서 지웠다고 해서 안타까웠다.
▲ 일송정을 내려와 주차장에 내려오니 전망대와 다른 '일송정'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지만 왼쪽 큰 바위에 있는 글씨가 지워져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원래 <선구자> 가사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무슨 이유로 지웠는지 모르지만 씁쓸했다. '그러려니' 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오문수
북간도로 이주했던 선구자들은 민족운동과 민족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1906년 이상설이 세운 서진서숙(학교)은 제일 민족 학교이며, 북간도 지역에 은진중학, 명신여고, 동흥중학, 영신중학(광명중학), 대성중학, 광명여고 등 명문학교 6개가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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