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공놀이' 무시당하던 야구, 천만 관중 사로잡은 비결
[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지난 2024년 9월, 한국 프로야구 KBO리그가 출범 42년 만에 사상 최초로 천만 관중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프로스포츠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한국에 야구(Baseball)라는 스포츠가 전해진 지는 백여 년에 불과하다. 한때 '그깟 공놀이'라며 무시당하던 야구는,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리며 남녀노소 누구든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마성의 스포츠가 됐을까.
지난 23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는 '프로야구는 어떻게 천만 관중을 사로잡았나'편을 통해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은 야구의 역사를 조명했다.
조선 엘리트가 즐겨한 스포츠
한국에 야구가 처음 전래된 것은 조선 말기인 19세기 말이다. 이길용 기자가 작성한 <조선야구사>에 따르면 '야구의 토산국인 아메리카(미국)로부터 일본을 거쳐 조선에 처음 수입되기는 서력 1904년 봄의 일'이라고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당시 미국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한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조선인을 모아 야구를 가르친 것이 한국야구의 첫 시초다.
초창기에는 '서양 공치기' '배쓰볼' 등으로도 불렸으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인 '야구(野球, 들판에서 하는 공놀이)'라는 명칭이 차츰 자리 잡았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한국 야구에는 일본 야구의 영향이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에서 야구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다. 오늘날의 중·고교를 중심으로 조선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야구가 전파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일제가 공립학교에 야구부를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스포츠를 이용하여 조선의 엘리트를 일본에 충성하도록 키워내려고 했던 의도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지금과는 전혀 달리, 야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적지 않았다. 각종 장비가 필요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야구는 '부유한 도련님들이나 하는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었던데다, 일본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일본인의 스포츠'라는 민족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1921년 휘문고보(현 휘문고) 야구부는 100% 조선인 선수들로 팀을 꾸렸음에도 당당히 전 조선 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2년 뒤에는 조선 학교로는 일본 최고의 아마추어야구 대회인 '고시엔'에 진출하여 일약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휘문고보의 돌풍을 두고 국내 언론에서는 '이것이 민족적 의거가 아니고 그 무엇인가, 조선 운동계 역사의 신기원인 초유의 미거이며 환희'라고 극찬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우리만의 야구
한국야구가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 우리만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대를 맞이하며 조선의 야구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미군과의 친선경기를 가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 사정상, 야구인들은 야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미군의 지원이 필요했다. 미군 역시 당시 연이은 전쟁으로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야구 종주국답게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야구 경기 이벤트는 자국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한국인들과 교류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기에 미군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전력상 한국 대표팀은 미군 대표팀을 이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잉거프리센 미군 소령은 친선경기를 앞두고 "만일 우리를 상대로 점수를 낸다면 1점당 야구공 120개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는 당시 화페가격으로 3만 원이며, 1946년 기준으로는 서울의 중급주택(약 1만 3000원)을 2채 사고도 남는 비싼 가격이었다. 야구가 괜히 고급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한편으로 그 정도로 미군이 우리 대표팀의 실력을 만만히 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한국대표팀은 예상을 깨고 미군과 접전을 벌였다. 비록 끝내 패하기는 했지만 점수를 내는 데 성공하며 접전 끝에 3대 4. 불과 1점차로 석패했다. 놀란 미군은 결국 약속대로 30다스(약 9만 원) 상당의 공을 지급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낸 360개의 공은 훗날 한국의 야구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씨앗이 된다.
1946년 국내 최초의 학생 야구제전인 '청룡기' 대회가 열렸다. 대회 주최자로 개최 자금이 필요했던 <자유신문>이 은행에 담보로 맡긴 것이 바로 미군으로부터 받았던 야구공 30다스였다. 선배들이 미군과의 경기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해 받아낸 공 덕분에, 한국야구의 꿈나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야구는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르면 야구 경기가 TV와 라디오 등을 통하여 중계되며 야구의 인기가 크게 높아진다.
1963년 9월,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숙적 일본을 예선과 결승에서 두 번이나 격파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대표팀의 4번 타자로 결승에서 홈런과 결승타점 포함 3타점을 홀로 책임지며 승리의 주역으로 활약한 인물이, 훗날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김응용이다.
아시아선수권 우승은 한국야구가 국제무대에서 최초로 정상에 올랐던 기념비적인 장면이었다. 또한 광복 이후 국제대회에서 일본에 당한 7연패 사슬을 끊어낸 최초의 승리였다. 일본야구를 넘어서야 한다는 모든 국민들의 간절 염원을 야구대표팀이 광복 18년 만에 이루어낸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국민적 환대
야구대표팀은 아시아선수권 우승 이후 열렬한 국민적 환대를 받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야구대표팀을 청와대로 초청해 '한국야구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야구장에 최초로 조명탑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야간에도 야구 경기도 가능해졌고 평일에도 학생과 직장인의 야구 관람이 활성화되는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자연히 선수들의 운동 환경이 크게 개선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또한 높아진 야구의 위상과 인기는 고교야구의 황금기와 실업야구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다수의 은행팀과 공기업에서 잇달아 신생 야구단을 창단하기에 이르렀고, 아시아선수권 이듬해인 1964년에는 한국야구 최초로 실업 13팀이 참여하는 정규시즌 제도가 도입되면서 경기 수가 늘어난다.
197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는 듯했던 한국야구에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온다. 당시만 해도 실업 야구 선수들은 기업 소속의 직원 신분이었다. 야구를 아무리 잘해도 정해진 월급 외에는 약간의 추가 수익을 얻는 정도에 불과했고, 야구로 계속 먹고 살 수 있다는 뚜렷한 희망이 없었다. 선수들은 차라리 빨리 은퇴하고 기업에서 일반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돈벌이에는 더 유리했다. 이러다 보니 전도유망한 아마추어 유망주들도, 일단 실업야구에 입단한 이후에는 더 이상 목표로 삼거나 올라갈 만한 비전이 없었다.
1975년, 민간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롯데에서 자이언츠 실업야구단을 창단한다. 자이언츠는 이듬해부터 실업야구리그에 참가했고,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은 선발하는가하면 재일동포 선수와 지도자까지 영입하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자이언츠 구단의 운영 비용은 다른 실업팀의 수배에 이르렀다. 대기업 구단인 자이언츠의 투자는 당시 한국야구계에서 침체된 실업야구의 한계를 어떻게 돌파해야하는지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며 훗날 프로야구의 출범에도 영감을 제공했다.
1982년 3월 27일, 한국야구에 큰 전환점이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야구를 전문적인 직업으로 하는 '프로야구'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당시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성난 국민의 여론을 돌리고 민심을 다독이기 위하여 스포츠를 활용하려고 했다. 이미 저변이 확대된 야구는 빠르게 프로로 전환하기에 가장 적합한 종목이었다.
6개 구단 체제로 시작한 프로야구는 출범 첫해부터 무려 143만의 관중을 동원해 뜨거운 돌풍을 일으켰다. 야구팬들은 이미 고교와 실업야구에 익숙해져 있던 데다 '지역 연고제'로 인해 '내 고향팀인 프로야구팀은 곧 그 지역의 정체성'이라는 인식이 곧 응원팀에 대한 높은 관심과 충성심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1982년 24승을 올린 에이스 박철순(OB), 4할 타자 백인천(MBC 청룡) 등 팬들의 인기를 주도하는 스타플레이어들도 연이어 등장했다.
또한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9월에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제 27회 세계야구선수권 대회가 열린다. 한국은 결승에 올라 숙적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은 7회까지 일본에 2-0으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으나 '약속의 8회'에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3점 홈런 등 명장면을 만들어내며 5득점으로 전세를 뒤집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대회는 한국야구가 사상 최초로 세계 정상에 오르며 대한민국에서 야구가 명실상부한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
이후 한국 프로야구는 40여 년 역사 동안 수많은 명장면과 전설적인 선수들을 배출해 왔다. 1980-90년대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는 총 9회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전승을 거두며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한국 프로야구 최다우승(KIA 시절 포함 11회)이라는 '왕조'를 건설했다. 이러한 해태의 선전은 군사정권 시절에 차별과 탄압을 받았던 호남인들의 한을 대신 풀어주는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고 최동원(롯데)과 선동열(해태)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로 꼽힌다. 영남과 호남이라는 두 지역을 대표하는 당대의 에이스이자 팀을 정상으로 이끈 두 투수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고, 실력과 업적 또한 용호상박이었다.
1987년 5월 16일 사직야구장에서 벌어진 두 투수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선발 맞대결은 장장 4시간 56분의 혈투 속에 15회 완투 무승부, 투구수 도합 441개(최동원 209개, 선동열 232개)라는 희대의 진기록을 남기며 지금도 세기의 명승부로 남았다. 이 이야기는 훗날 영화 <퍼펙트게임>의 소재가 됐고, 2022년 선동열과 최동원은 나란히 '한국프로야구 40주년 기념 레전드 40인' 중 1, 2위로 나란히 선정되며 그 위상을 인정받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를 필두로 김병현,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 등 해외파 선수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한국야구의 국제적 위상과 경쟁력은 높아진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해외파 선수들에 더 쏠리기 시작한 국민적 관심과, 선진야구를 보며 높아진 눈높이 등으로 인하여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줄어드는 부작용도 생겼다.
90년대 후반을 강타한 IMF 금융위기로 줄어든 국내 모기업들의 투자, K리그와 2002 한일월드컵 등 경쟁 종목들의 인기 돌풍까지 겹치며 한국야구는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여기에 폭력적이고 후진적인 관중 문화, 전문화된 시대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 낡은 야구스타일, 현실에만 안주했던 KBO의 미숙한 행정 등도 침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야구의 국제대회 선전은 야구 인기 부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프로를 망라해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출전한 2006초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돌풍, 2008 베이징올림픽 9전 전승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호성적이 이어지며 한국야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2008년 이후 중계권 계약과 미디어 채널 다양화, 온라인 문화의 활성화 등으로 인하여 프로야구 전 경기가 생중계되기 시작하면서 팬들의 야구 접근성이 크게 높아졌다. 여성과 젊은 팬들의 대거 유입으로 거칠고 과격하던 관중 문화가 대폭 개선되었고, 개성 넘치는 응원 문화와 굿즈개발 등 다양한 상업적 마케팅이 활성화됐다. 이제 야구장은 다채로운 볼거리, 먹거리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종합 오락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NC 다이노스와 KT 위즈의 합류로 프로야구단은 전국 10개구단 체제로 규모가 확장됐다. 신생팀들의 약진에 이어 2023년에는 LG 트윈스가 29년 만에 정상에 올랐고, 올해는 최다우승팀이자 전통의 명문인 KIA와 삼성이 나란히 정규리그 1, 2위를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하는 등 관중동원력이 높은 인기구단들의 연이은 선전도 프로야구의 천만 흥행을 이끈 원동력으로 꼽힌다.
1982년 출범 이후 42년의 세월 동안 한국프로야구는 명실상부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수많은 선택지와 변수가 존재하는 야구는 종종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기의 순간에도 극적인 홈런 한 방으로 운명이 바뀌는 야구에 열광하는 건, 우리 인생도 언젠가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과 위안을 얻기 때문 아닐까.
지난 23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는 '프로야구는 어떻게 천만 관중을 사로잡았나'편을 통해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은 야구의 역사를 조명했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스토리
한국에 야구가 처음 전래된 것은 조선 말기인 19세기 말이다. 이길용 기자가 작성한 <조선야구사>에 따르면 '야구의 토산국인 아메리카(미국)로부터 일본을 거쳐 조선에 처음 수입되기는 서력 1904년 봄의 일'이라고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당시 미국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한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조선인을 모아 야구를 가르친 것이 한국야구의 첫 시초다.
초창기에는 '서양 공치기' '배쓰볼' 등으로도 불렸으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인 '야구(野球, 들판에서 하는 공놀이)'라는 명칭이 차츰 자리 잡았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한국 야구에는 일본 야구의 영향이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에서 야구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다. 오늘날의 중·고교를 중심으로 조선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야구가 전파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일제가 공립학교에 야구부를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스포츠를 이용하여 조선의 엘리트를 일본에 충성하도록 키워내려고 했던 의도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지금과는 전혀 달리, 야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적지 않았다. 각종 장비가 필요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야구는 '부유한 도련님들이나 하는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었던데다, 일본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일본인의 스포츠'라는 민족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1921년 휘문고보(현 휘문고) 야구부는 100% 조선인 선수들로 팀을 꾸렸음에도 당당히 전 조선 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2년 뒤에는 조선 학교로는 일본 최고의 아마추어야구 대회인 '고시엔'에 진출하여 일약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휘문고보의 돌풍을 두고 국내 언론에서는 '이것이 민족적 의거가 아니고 그 무엇인가, 조선 운동계 역사의 신기원인 초유의 미거이며 환희'라고 극찬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우리만의 야구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스토리
한국야구가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 우리만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대를 맞이하며 조선의 야구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미군과의 친선경기를 가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 사정상, 야구인들은 야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미군의 지원이 필요했다. 미군 역시 당시 연이은 전쟁으로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야구 종주국답게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야구 경기 이벤트는 자국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한국인들과 교류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기에 미군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전력상 한국 대표팀은 미군 대표팀을 이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잉거프리센 미군 소령은 친선경기를 앞두고 "만일 우리를 상대로 점수를 낸다면 1점당 야구공 120개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는 당시 화페가격으로 3만 원이며, 1946년 기준으로는 서울의 중급주택(약 1만 3000원)을 2채 사고도 남는 비싼 가격이었다. 야구가 괜히 고급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한편으로 그 정도로 미군이 우리 대표팀의 실력을 만만히 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한국대표팀은 예상을 깨고 미군과 접전을 벌였다. 비록 끝내 패하기는 했지만 점수를 내는 데 성공하며 접전 끝에 3대 4. 불과 1점차로 석패했다. 놀란 미군은 결국 약속대로 30다스(약 9만 원) 상당의 공을 지급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낸 360개의 공은 훗날 한국의 야구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씨앗이 된다.
1946년 국내 최초의 학생 야구제전인 '청룡기' 대회가 열렸다. 대회 주최자로 개최 자금이 필요했던 <자유신문>이 은행에 담보로 맡긴 것이 바로 미군으로부터 받았던 야구공 30다스였다. 선배들이 미군과의 경기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해 받아낸 공 덕분에, 한국야구의 꿈나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야구는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르면 야구 경기가 TV와 라디오 등을 통하여 중계되며 야구의 인기가 크게 높아진다.
1963년 9월,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숙적 일본을 예선과 결승에서 두 번이나 격파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대표팀의 4번 타자로 결승에서 홈런과 결승타점 포함 3타점을 홀로 책임지며 승리의 주역으로 활약한 인물이, 훗날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김응용이다.
아시아선수권 우승은 한국야구가 국제무대에서 최초로 정상에 올랐던 기념비적인 장면이었다. 또한 광복 이후 국제대회에서 일본에 당한 7연패 사슬을 끊어낸 최초의 승리였다. 일본야구를 넘어서야 한다는 모든 국민들의 간절 염원을 야구대표팀이 광복 18년 만에 이루어낸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국민적 환대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스토리
야구대표팀은 아시아선수권 우승 이후 열렬한 국민적 환대를 받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야구대표팀을 청와대로 초청해 '한국야구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야구장에 최초로 조명탑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야간에도 야구 경기도 가능해졌고 평일에도 학생과 직장인의 야구 관람이 활성화되는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자연히 선수들의 운동 환경이 크게 개선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또한 높아진 야구의 위상과 인기는 고교야구의 황금기와 실업야구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다수의 은행팀과 공기업에서 잇달아 신생 야구단을 창단하기에 이르렀고, 아시아선수권 이듬해인 1964년에는 한국야구 최초로 실업 13팀이 참여하는 정규시즌 제도가 도입되면서 경기 수가 늘어난다.
197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는 듯했던 한국야구에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온다. 당시만 해도 실업 야구 선수들은 기업 소속의 직원 신분이었다. 야구를 아무리 잘해도 정해진 월급 외에는 약간의 추가 수익을 얻는 정도에 불과했고, 야구로 계속 먹고 살 수 있다는 뚜렷한 희망이 없었다. 선수들은 차라리 빨리 은퇴하고 기업에서 일반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돈벌이에는 더 유리했다. 이러다 보니 전도유망한 아마추어 유망주들도, 일단 실업야구에 입단한 이후에는 더 이상 목표로 삼거나 올라갈 만한 비전이 없었다.
1975년, 민간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롯데에서 자이언츠 실업야구단을 창단한다. 자이언츠는 이듬해부터 실업야구리그에 참가했고,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은 선발하는가하면 재일동포 선수와 지도자까지 영입하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자이언츠 구단의 운영 비용은 다른 실업팀의 수배에 이르렀다. 대기업 구단인 자이언츠의 투자는 당시 한국야구계에서 침체된 실업야구의 한계를 어떻게 돌파해야하는지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며 훗날 프로야구의 출범에도 영감을 제공했다.
1982년 3월 27일, 한국야구에 큰 전환점이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야구를 전문적인 직업으로 하는 '프로야구'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당시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성난 국민의 여론을 돌리고 민심을 다독이기 위하여 스포츠를 활용하려고 했다. 이미 저변이 확대된 야구는 빠르게 프로로 전환하기에 가장 적합한 종목이었다.
6개 구단 체제로 시작한 프로야구는 출범 첫해부터 무려 143만의 관중을 동원해 뜨거운 돌풍을 일으켰다. 야구팬들은 이미 고교와 실업야구에 익숙해져 있던 데다 '지역 연고제'로 인해 '내 고향팀인 프로야구팀은 곧 그 지역의 정체성'이라는 인식이 곧 응원팀에 대한 높은 관심과 충성심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1982년 24승을 올린 에이스 박철순(OB), 4할 타자 백인천(MBC 청룡) 등 팬들의 인기를 주도하는 스타플레이어들도 연이어 등장했다.
또한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9월에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제 27회 세계야구선수권 대회가 열린다. 한국은 결승에 올라 숙적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은 7회까지 일본에 2-0으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으나 '약속의 8회'에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3점 홈런 등 명장면을 만들어내며 5득점으로 전세를 뒤집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대회는 한국야구가 사상 최초로 세계 정상에 오르며 대한민국에서 야구가 명실상부한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
이후 한국 프로야구는 40여 년 역사 동안 수많은 명장면과 전설적인 선수들을 배출해 왔다. 1980-90년대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는 총 9회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전승을 거두며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한국 프로야구 최다우승(KIA 시절 포함 11회)이라는 '왕조'를 건설했다. 이러한 해태의 선전은 군사정권 시절에 차별과 탄압을 받았던 호남인들의 한을 대신 풀어주는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고 최동원(롯데)과 선동열(해태)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로 꼽힌다. 영남과 호남이라는 두 지역을 대표하는 당대의 에이스이자 팀을 정상으로 이끈 두 투수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고, 실력과 업적 또한 용호상박이었다.
1987년 5월 16일 사직야구장에서 벌어진 두 투수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선발 맞대결은 장장 4시간 56분의 혈투 속에 15회 완투 무승부, 투구수 도합 441개(최동원 209개, 선동열 232개)라는 희대의 진기록을 남기며 지금도 세기의 명승부로 남았다. 이 이야기는 훗날 영화 <퍼펙트게임>의 소재가 됐고, 2022년 선동열과 최동원은 나란히 '한국프로야구 40주년 기념 레전드 40인' 중 1, 2위로 나란히 선정되며 그 위상을 인정받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를 필두로 김병현,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 등 해외파 선수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한국야구의 국제적 위상과 경쟁력은 높아진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해외파 선수들에 더 쏠리기 시작한 국민적 관심과, 선진야구를 보며 높아진 눈높이 등으로 인하여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줄어드는 부작용도 생겼다.
90년대 후반을 강타한 IMF 금융위기로 줄어든 국내 모기업들의 투자, K리그와 2002 한일월드컵 등 경쟁 종목들의 인기 돌풍까지 겹치며 한국야구는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여기에 폭력적이고 후진적인 관중 문화, 전문화된 시대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 낡은 야구스타일, 현실에만 안주했던 KBO의 미숙한 행정 등도 침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야구의 국제대회 선전은 야구 인기 부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프로를 망라해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출전한 2006초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돌풍, 2008 베이징올림픽 9전 전승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호성적이 이어지며 한국야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2008년 이후 중계권 계약과 미디어 채널 다양화, 온라인 문화의 활성화 등으로 인하여 프로야구 전 경기가 생중계되기 시작하면서 팬들의 야구 접근성이 크게 높아졌다. 여성과 젊은 팬들의 대거 유입으로 거칠고 과격하던 관중 문화가 대폭 개선되었고, 개성 넘치는 응원 문화와 굿즈개발 등 다양한 상업적 마케팅이 활성화됐다. 이제 야구장은 다채로운 볼거리, 먹거리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종합 오락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NC 다이노스와 KT 위즈의 합류로 프로야구단은 전국 10개구단 체제로 규모가 확장됐다. 신생팀들의 약진에 이어 2023년에는 LG 트윈스가 29년 만에 정상에 올랐고, 올해는 최다우승팀이자 전통의 명문인 KIA와 삼성이 나란히 정규리그 1, 2위를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하는 등 관중동원력이 높은 인기구단들의 연이은 선전도 프로야구의 천만 흥행을 이끈 원동력으로 꼽힌다.
1982년 출범 이후 42년의 세월 동안 한국프로야구는 명실상부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수많은 선택지와 변수가 존재하는 야구는 종종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기의 순간에도 극적인 홈런 한 방으로 운명이 바뀌는 야구에 열광하는 건, 우리 인생도 언젠가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과 위안을 얻기 때문 아닐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