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경제의 토대, 마을공동체 관계망
'2024 살림학연구소 첫돌맞이 한마당잔치' 살림꾼 주제발표②
인류의 공동과제인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 앞에 민의 주체역량으로 새로운 생태계 이루고자 2023년 살림학연구소가 태어났다. 그 길에 동참하는 개인과 단체가 모여 지난 10월 3~6일 '살림학연구소 첫돌맞이 한마당잔치'를 열었다. 그 자세한 이야기를 살림꾼 주제발표, 강연 등으로 나눠 연재한다.두 번째는 살림꾼 주제발표 <살림경제>다. 오닉스인사인트 원 살림꾼(연구원)이 발표했다.[기자말]
▲ 2024 살림학연구소 첫돌맞이 한마당잔치에서 살림경제 주제로 이야기하는 살림꾼 원 ⓒ 살림학연구소
삶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살림경제
회사 성장률이 목표치에 미달해 연봉이 동결됐다. 직원들은 가파른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사실상 연봉이 줄었다 반발하고, 회사를 떠나기도 한다. 한두 회사가 아니라 모든 회사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저성장이 장기화돼 실질임금이 줄어든다면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까? 먹는 것, 주거, 양육과 교육, 건강, 노후, 문화 등 거의 모든 살림영역을 돈을 써서 해결하는 지금의 구조에서 대안은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
"대안적 경제체제에 대한 이론적 작업은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 등을 통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어요. 경제는 통전적으로 짜인 사회구조의 한 모습인데, 경제제도만을 떼어 내서 대안을 논하는 환원적인 접근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요. 살림경제는 경제를 삶과 동떨어진 물질적 생산과 소비만으로 정의하지 않고, 삶과 통합된 실천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기에 대안도 통전적 삶의 바탕에서 생성돼야 한다고 봐요. 또 양식과 제도보다는 그 아래 실천을 일으키는 힘, 관장하는 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주체가 어떻게 생성되고 조직되는지, 그 힘과 주체작용을 어떤 배치 속에서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합니다. 이는 실천전략을 만들어 갈 때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 주제발표 경청하는 살림학연구소 길벗들 ⓒ 살림학연구소
살림경제의 바탕, 마을공동체라는 관계망:두레, 오산마을 사례
자본의 무한증식 경제가 대두된 시기는 짧게는 100년, 길게는 약 300년 전이다. 그전까지 경제는 경세제민, 즉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였다. 경제라는 말뜻에 원래 자본을 증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살림경제'에 가깝다.
원 살림꾼은 무한증식 경제논리와 다른 질서로 살아온 이들의 삶에서 지혜를 길어 올려 대안을 모색해 볼 수 있다 했다. 자본주의 근대화로 인해 붕괴되기 이전의 마을 모습인 조선후기 두레와, 일제강점기 오산마을 사례를 예로 들며 살림경제 질서로 살아온 이들이 역사 속에 있었음을 밝혔다.
두레는 조선후기 농촌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경제적 조직이다. 두레는 개별 농민의 필요를 채우고 공동체 단위의 살림경제구조를 만들었다. 개인 소유지와 마을 공유지를 두레가 공동으로 운영했고 이를 통해 거둔 소산을 공동으로 분배하기도 했다. 마을에 농사짓기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의 농사를 거들고, 마을 전체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함께했다. 두레는 공동체적 가치를 생성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경제적 토대 역할을 했다.
1930년대 대표적인 협동조합 지역사회로 꼽히는 오산마을은 조선말 신민회운동에 기반한 이상촌 마을이 토대였다. 마을에서 학교와 조합은 마을을 교육과 산업으로 구조화시키고 정신과 물질이라는 양면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담당했다. 조합은 주민들의 호혜적 경제관계를 구체화한 양식이었다.
원 살림꾼은 두레와 오산마을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적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민의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했던 이들이 마을공동체에 기반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과정에서 살림경제적 관계가 출현했다는 점이라 했다. 그들에겐 대안적 경제제도가 이론적으로 모색한 산물이 아니었다.
"두레는 매일 만나 어려운 일은 서로 돕고, 일상의 의례와 행사, 공동노역을 하며 살아온 관계였어요. 객관적이고 합리적 논리라든가 제도로서 이 땅에 뿌리내렸던 것이 아니라, 그저 눈만 보고 숨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다정하고 끈끈한 인간관계가 바탕이었던 거죠. 오산마을의 학교와 조합이라는 두 축을 가능하게 한 것도 강한 공동체적 관계성을 지닌 마을이었어요. 남강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를 설립하면서 학교, 마을에 가족, 문중을 이주시켜 새로운 마을문화를 일으키고자 했어요. 이 뜻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이주했고 이렇게 모인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적 훈련을 받았고 학생과 주민들은 한 마을에서 차별 없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았어요."
또 두레와 오산마을이 쇠퇴한 과정을 통해 살림경제라는 실천을 일으키고 지속하는 힘은 국가나 자본이 아닌 마을공동체적 관계망에서 온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제도적 형태에 대안적 실천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러나 두레, 협동조합의 근본적인 힘은 민이 국가나 자본이 아닌 마을공동체적 관계망에 의존해 자기 생존과 필요를 해결해 가는 데 있었어요. 일제강점기 오랜 세월 공동체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마을공동체를 행정적으로 통폐합하여 와해시키고 관 중심의 마을 단체를 조직하면서 마을의 자주성이 약화돼요. 이 흐름 속에서 두레도 점점 힘을 잃게 돼요. 오산학교는 1930년대 중반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면서 학교 규모를 키우고 제도권 교육기관으로 변하게 돼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물질적 토대는 더 나아진 듯 보였어도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공동체성은 약화되었어요."
▲ 주제발표 들으며 질문하는 길벗들 ⓒ 살림학연구소
이어서 지금 살림경제 사례는 국가와 자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치 자족하는 삶을 꾸려 온 대안적 마을공동체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나눴다. 현대사회는 앞선 역사적 사례와 달리 살림경제가 자라날 수 있는 조건인 신뢰에 기반한 공동체적 관계가 부재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공동체적 관계망을 복원하는 것이 살림경제를 현실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살림경제로 삶터를 일구는 마을공동체:밝은누리 사례
원 살림꾼은 본인이 살고 있는 밝은누리 삶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밝은누리 인수마을은 어린아이가 밤마실 갈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살며 같은 터와 물리적 동선을 공유하는 마을공동체로 살고 있다. 인수마을에서는 두레 울력 품앗이라는 살림경제의 원리로 공동의 삶을 꾸려 간다. 두레는 살림경제를 구현하는 상호 협조체라는 성격을 넘어 삶에서 마주하는 필요와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며 풀어 간다.
인수마을밥상은 형태는 개인 사업체지만 마을 식구들이 품앗이를 바탕으로 밥상을 운영하고 있다. 밥 먹는 이들이 밥값 내는 데 끝나지 않고 모두가 밥상의 운영 주체라는 마음으로 참여한다. 밥상운영을 책임지는 밥상지기가 고정적으로 밥을 짓고, 마을 사람들은 일주일 혹은 한 달에 횟수를 정해 같이 밥 짓는 모심지기로 함께하거나 하루를 마감하는 뒷정리와 청소를 돕는 밥상지킴이로 참여한다. 때마다 벌어지는 김장잔치, 매실청 담그기와 더불어 마늘 까기, 제철김치 담그기, 밥상청소와 수리 등 울력에 참여한다.
밝은누리 홍천마을엔 법률사무소 해원이 있다. 해원은 서울 인수마을에서 지내며 변호사로 일하던 이가 홍천마을로 귀촌 후 서석면에 연 법률사무소다. 홍천군은 전국에서 면적 기준 가장 넓은 군이지만 홍천군에 변호사 사무실은 해원이 유일하다. 국가적으로 변호사 수는 크게 늘었지만 서울 쏠림현상이 심해 지방으로 갈수록 법률서비스를 받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그럼에도 정부 정책으로는 마땅한 대안을 찾기가 어렵다. 자본의 흐름에 따라 변호사들의 배치가 서울, 대도시 법원 중심으로 결정되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사람들은 관계로부터 단절되면서 우울함을 경험했다. 경제는 위축되었다. 밝은누리에서는 격리로 인해 마을밥상에 갈 수 없을 때, 배달앱으로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을 벗들이 밥상에서 도시락을 싸서 문 앞으로 배달해 주었다. 격리가 길어져 장 보기 어려운 이들이 많아졌을 때, 마을먹거리장터에서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반짝 배달 품앗이로 필요한 식료품을 배달해 주기도 했다. 돌림병이라는 위기상황이 오히려 살림경제의 위기 탄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자리한 법률사무소 해원 ⓒ 밝은누리
지속가능한 살림경제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공동체적 주체
조선후기 두레, 일제강점기 오산마을, 그리고 밝은누리 사례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마을공동체를 바탕으로 국가나 자본의 힘을 거슬러 자립, 자족하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즉, 마을공동체를 토대로 새로운 공동체적 주체를 생성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지속가능한 살림경제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길인 것이다.
먹는 것, 주거, 양육과 교육, 건강, 노후, 문화 등 거의 모든 살림영역을 돈을 써서 해결하는 지금의 구조에서 대안은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 원 살림꾼은 주제발표를 마치며 앞으로 살림꾼, 길벗들과 함께 살림경제를 실천해 가며 길을 만들어 가겠다 했다.
"자본주의 원리를 공기처럼 마시며 살아왔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난 삶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어떤 관념으로 꿈꾸기보다는 삶을 하나씩 만들어 가면서 길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일상의 문제를 실제로 풀어 가면서 대안을 만들어 온 살림꾼들과 여기 오신 길벗들이 함께 자기 삶을 스스로 언어화하며 소통해 갈 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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