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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 너무 좋다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4-1] 나는 나비

등록|2024.10.29 09:50 수정|2024.10.29 10:17
'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는 군대 가서 다쳐서 다리 한쪽이 무릎까지 없었다. 그래서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우리 4남매 중 내가 첫째 딸이고 둘째 딸, 셋째 딸, 막둥이가 아들이었다. 우리는 경북 문경 탄광촌에서 살았다. 시골에 살았지만 나는 농사일을 모른다. 나물 이름도 모른다. 아버지가 광업소 경비로 일해서 남들보다는 어렵지 않게 자란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여서 어릴 때 시골 공소에서 살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는 회장직을 맡고 계셨다. 우린 무조건 일요일이면 성당을 가야 했다. 진짜 가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한 번도 아버지, 어머니께 말을 해보지 못 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엄청 무서웠다.

아버지가 주무시거나 옆을 지날 때는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 다녔다. 우리 4남매 중 한 사람이 잘못하면 우리를 불러 놓고 첫째 4대, 둘째 3대, 셋째 2대, 막내 1대 이런 식으로 벌을 주셨다. 집 청소를 시킬 때도 완전 군대식으로 4남매를 불러 분배하여 시켰다.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하는 것,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이었다. 항상 나에게는 "넌 우리 집 맏이고 장남이나 다름없으니 동생들 잘 보살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라면서 동생들과 싸운 적이 없고, 다른 친구들과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우리 4남매도 욕도 할 줄 모르고 남들과 싸우고 문제 일으킨 적이 없다. 그렇게 별 탈 없이 어려움 없이 잘 자란 것 같다.

아버지가 동생들 잘 돌보라고 말씀하셔도, 난 그렇게 길들여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동생들을 특별히 돌보는 일도 없었지만, 동생들도 큰 말썽 없이 자랐고, 부모님이 나에게 부족한 것 없이 다 해주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한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형수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를 사랑했지만, 표현을 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정도 많았던 것 같다. 엄마한테도 잘하고, 벌 받은 것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도 별로 나쁘게 생각 들지는 않는다.

▲ ⓒ 픽사베이


머물고 싶은 계절

나의 학창시절은 별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다. 남들처럼 남학생들과 미팅도 한 번 못 해봤다. 선생님들이 가지 말라는 빵집은 왜 그렇게 가고 싶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난다. 남친도 사귀지 못 하고, 좋아하는 남학생한테 대시도 한 번 못 했다. 왜 그렇게 순진했는지 모르겠다. 친구네 과수원에 가서 사과 따주고 놀던 일, 깔깔대며 딸기밭에 갔던 추억들이 있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14살 때 다른 동네 친구 집에서 엄마 허락을 받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했던 남학생이 사는 동네였다.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면서도 남학생한테 얘기도 못 해봤다. 하룻밤을 보내고 이틀째 친구 부모님들이 오시지 않아서 하룻밤을 더 묵으려고 놀고 있는데, 저녁 무렵 엄마와 내 친구와 여동생, 셋이 나를 찾아왔다.

엄마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바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가 "하룻밤을 허락했는데 왜 집에 오지 않고 네 멋대로 놀고 있냐?"고 혼내시더니 "네 마음대로 살아봐. 너처럼 약속 안 지키는 딸은 필요 없다"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기찻길이었는데 엄마는 거기 누우시더니 "여기서 죽을 거다"라며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난 겁이 나서 울면서 엄마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라고. 아마도 엄마는 친구 집에서 놀 때 남학생들과 함께 지낸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평소 엄마는 우리에게 천사 같았다. 항상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며 뭐라도 부족한 것 없이 해주시려고 했다. 엄마는 우리를 평등하게 대해 주셨다.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한 봉 사면 우리 4남매 똑같이 나누어 주셨다. 지금 같으면 학창시절에 미팅도 해보고, 남친도 사귀어 보고, 친구들과 놀러도 다니고 조금은 놀아봤을 것이다. 엄마한테도 지금처럼 전화만 있었어도 자세히 설명하고 허락받아서 엄마를 속상하게 안 했을 것이다.

난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부모님 속 썩이고 마음 아프게 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졸업 후 친구들과 유원지 놀러 갔다가 남편을 만났다. 남편 팀과 우리 팀이 합석하여 함께 놀게 되었다. 남편이 다가와 말하는데 난 처음 만난 군인이라 너무 떨렸다. 당시 그는 의정부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매형하고 놀러 왔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이 들었다. 나는 처음 사귀는 남자라 엄마한테 편지 주고받는 남친이 있다고 모든 걸 다 얘기를 했었다. 편지 내용까지 보여주며 다 얘기했었다.

6개월 지나 제대하고 어느 날, 남편이 우리 부모님을 찾아왔다. 남편은 먼저 엄마에게 인사 드리고 "시내 같이 나갔다 오겠다. 저녁에 아버지를 뵙겠다"라며 허락을 받았다. 시내에서 영화 한 편 보고, 남편이 자기 둘째 누나한테 나를 데리고 가서 인사시켰다. 누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음날 집으로 왔는데 엄마는 화가 많이 나셨다. 엄마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남편이 부모님에게 넙죽 절을 하더니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어머님은 9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님도 17살에 돌아가셨단 것도 얘기했다. 난 그때 당시에는 결혼은 생각 안 했다며 싫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 엄마는 남편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큰아들처럼 생각하겠다며 허락하셨다. 남편이 집에 왔을 때 인상도 나쁘지 않고, 예의도 바르며,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니 마음이 약해지신 것 같다. 나의 인생 2막이 시작된다. 나는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너무 일찍 결혼해 후회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고 싶은 것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금의 나, 너무 좋다.

*연재4-2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정애씨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연세재단빌딩분회 조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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