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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문학 감수성을 키운 남쪽 바닷가

어린 한강 자주 오가고, 지금은 아버지 한승원 작가 살고 있는 전남 장흥

등록|2024.10.26 13:54 수정|2024.10.29 17:20

▲ 한강 작가와 아버지 한승원 작가의 문학 감수성을 키워준 장흥 앞바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전라남도 장흥이 회자되고 있다. ⓒ 이돈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작가가 나고 자란 지역도 회자된다. 한강 작가가 광주광역시 중흥동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고향 전라남도 장흥의 정서를 물려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 한승원 작가도 딸의 노벨문학상 선정 직후 기자회견에서 "광주와 서울에 살면서도 딸에게 고향을 심어주려 했고, 방학 때면 꼭 시골에서 작은 일이라도 시켰다"면서 "장흥은 한강의 감수성을 키우는 데 큰 보탬이 된 곳"이라고 말했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한강 작가가 어렸을 때 자주 오가고 머문 곳, 지금은 작가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전남 장흥으로 간다. 장흥은 지난 2008년 문학관광 기행특구로 지정됐다. 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정남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정남진'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길게 흥할 장흥(長興)이다.

▲ 탐진강변에 자리한 장흥읍내 풍경. 전라남도 장흥은 산과 강, 바다를 모두 품고 있는 지역이다. ⓒ 이돈삼

▲ 장흥 여다지해변 풍경. 한승원 문학산책길이 이 바닷가를 따라 만들어져 있다. ⓒ 이돈삼


장흥은 일찍이 문학의 성지로 통했다. 한승원, 이청준, 이승우, 송기숙 등 걸출한 현대문학 작가를 배출한 고장이 장흥이다. 지금도 이대흠 등 현대문인 100여 명이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름난 문장가들도 장흥에서 많이 나왔다. 기봉 백광홍, 옥봉 백광훈, 존재 위백규 등등.

백광홍은 가사문학 작품 <관서별곡>을 지었다. 관서지방의 절경과 생활상, 풍물을 읊은 작품이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25년 앞선, 기행가사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위백규는 시와 글 모음집인 <존재집>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문맥이 현대문학 소설가와 시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처럼 '장흥에서 문장(글)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그런 연유다. 장흥군도 오래 전부터 글을 숭상하고 의로운 기상의 전통을 이어 간다는 의미로 '문림의향(文林義鄕)'의 기치를 내세우고 있다.

▲ 장흥 천관산 자락에 자리한 천관문학관 전경. 한승원과 한강 부녀를 비롯 이청준, 송기숙 등 장흥 출신 작가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이돈삼

▲ 한승원 문학산책길과 여다지해변. 장흥군 안양면 여다지해변을 따라 나 있다. ⓒ 이돈삼


장흥엔 문학 공간도 여러 군데 만들어져 있다. 문인 54명의 글을 바위에 새겨 비석으로 세운 천관산문학공원이 천관산 자락에 있다. <불의딸> <아제아제바라아제> <겨울잠봄꿈> 등의 작가 한승원과 한강 등 장흥 출신 작가들의 작품과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천관문학관도 있다. 여다지 해변을 따라 한승원 문학산책길, 이청준 생가를 중심으로 한 이청준 문학자리도 있다.

관산 신동마을 모래미 앞 돌섬은 이승우의 소설 <샘섬>의 무대이다. 이 섬은 생명의 원천인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자 많은 사람의 죽음을 부른 악몽의 섬으로 전해진다. 마을사람들은 '가스마리'(가슴앓이)라고 부른다. 천관산과 억불산, 바다와 탐진강 등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해 주는 곳이다.

▲ 여다지해변의 한승원 문학산책길. 한승원 작가 시가 새겨진 비가 줄지어 세워져 있다. ⓒ 이돈삼


▲ 고 이청준 작가의 생가.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한승원 문학산책로에 먼저 간다. 한승원 작가가 사는 '해산토굴' 부근 여다지 해변이다. 바닷가 소나무 숲길에 작가의 시비 30여 기가 20미터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산책길도 최근 깔끔하게 단장됐다. 바닷가를 거닐면서 시적 감수성을 채울 수 있는 문학산책길이다.

안양면 율산마을로 가면, 여다지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자신의 호를 단 '해산토굴'이다. 인근 회진면 신상리에 한승원 생가도 있다. 어린 한강이 오가던 큰아버지 집이다. 생가로 가는 마을길에 작가의 작품 속 문구가 벽화로 꾸며져 있다. 한승원과 한강 부녀 작가의 흔적을 찾으며 문학적 감성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승원 생가에서 멀지 않는 회진면 진목리는 한승원 작가와 동갑내기인 고 이청준 작가가 나고 자란 마을이다. 봄에 노란 유채꽃으로, 가을엔 하얀 메밀꽃으로 여행객을 불러들이는 곳이다. 선학동에서 야트막한 산길을 하나 넘어서 만난다. 작가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배경을 떠올릴 수 있다.

선학동의 하얀 메밀꽃은 다 졌지만,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천년학>의 세트장으로 쓰인 바닷가 선술집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해안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청준 문학자리까지 둘러보면 좋다. 금당도, 거금도, 소록도 등 크고 작은 섬도 눈앞으로 펼쳐진다.

▲ 영화 '천년학'의 세트로 쓰인 선술집. 장흥 회진 바닷가에 그대로 서 있다. ⓒ 이돈삼

▲ '팔문장마을' 별칭이 붙은 장흥 기산마을. 조선시대 문장가들의 글귀를 새긴 시비가 마을 입구에 줄지어 세워져 있다. ⓒ 이돈삼


장흥에서 옛 문장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도 있다. 안양면 기산마을과 관산읍 방촌마을이 대표적이다. 기산마을은 장흥에서도 문장을 대표하는 '팔문장마을'로 통한다. 조선시대 이름난 문장가 8명이 나왔다는 마을이다.

8명은 백광홍, 백광훈, 백광안, 백광성, 임회, 임분, 김윤, 김공희를 일컫는다. 기산마을 출신 문장가들이라고 '기산팔현'으로도 불린다. 마을 입구에 '팔문장 전통문화마을' 표지석과 함께 '기산팔현'의 시비가 줄지어 세워져 있다. 시비와 마을을 배경으로, 경관작물로 심은 코스모스도 지금 활짝 피어있다.

▲ 장흥 존재고택 사랑채. 존재 위백규가 나고 자란 집이다.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 방촌마을에서 가까운 천관산 장천재. 장흥 위씨의 학당과 재실로 쓰인 곳이다. ⓒ 이돈삼


방촌마을은 우리 전통과 민속이 살아있는 한옥마을이다. 존재 위백규가 나고 자란 마을이고, 수백 년 동안 씨 내림을 해온 장흥 위씨(長興 魏氏)의 집성촌이다. 존재 위백규는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이다. 실학의 상징 인물 다산 정약용보다도 30여 년 앞선 시대를 살았고, 정약용보다도 더 진보적인 생각을 지녔다. 학문은 물론 천문과 지리에도 능했던 위백규다.

위백규가 살았던 존재고택이 마을에 있다. 신와고택, 오헌고택, 판서공파종택, 죽헌고택, 근암고택도 있다. 가을날과 잘 어우러지는 옛집들이다. 장흥 위씨의 고문서와 목판, 장흥 위씨 유고 수백 점이 전시된 방촌박물관도 있다. 가까운 천관산 자락에 장흥 위씨의 학당과 재실로 쓰인 장천재도 있다.

장흥으로 문학기행을 하러 오가는 길에 들러볼만한 다른 곳도 많다. 탐진강변 정자도 감성을 채워준다. 경호정, 동백정, 부춘정, 사인정 등등. 저마다 다른 풍치와 풍류로 매력을 더해주는 정자다. 정자에서 유유자적한 시인과 묵객의 글까지 엿볼 수 있다. 마음속까지 청량하게 해주는 강바람도 기분 좋게 한다.

▲ 장흥 동백정 풍경. 장흥이 자랑하는 탐진강변 정자 가운데 하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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