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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총알 박힌 시한부 인생, 수많은 '폐인' 양산

[드라마 보는 아재] 소지섭-임수정 주연의 정통 멜로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록|2024.10.28 10:23 수정|2024.10.28 10:23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통해 전국 관객 집계가 시작된 2003년 이후 한국영화는 총 24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했다. 하지만 이제 제법 흔해진 24편의 천만 영화 중에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멜로 영화는 찾을 수 없다. 실제로 역대 멜로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지난 2012년에 개봉해 전국 706만 관객을 동원했던 박보영,송중기 주연의 <늑대소년>이었다.

사실 극장가의 주요 고객이 10~30대 여성이고 그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가 멜로임을 고려하면 멜로 영화 중에 아직 천만 영화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다소 의외로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중에서도 <왕의 남자>와 <해운대>,<광해, 왕이 된 남자>,<국제시장>처럼 멜로 요소가 포함된 영화도 적지 않지만 이 영화들의 장르를 '멜로'로 구분하는 관객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대중들이 멜로 감성을 영화가 아닌 TV를 통해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워낙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슴 시린 멜로 드라마를 잘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지난 2004년 날씨가 쌀쌀해지던 초 겨울에 방송돼 많은 폐인을 양산했던 처절한 멜로 드라마 <미안하다,사랑한다>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신예 캐스팅-나쁜 대진운 극복하고 대히트

▲ 은채(왼쪽)는 무혁이 세상을 떠나고 1년 후 무혁을 처음 만났던 호주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 KBS 화면캡처


1998년 MBC 베스트극장 <소영이 즈그 엄마>를 통해 데뷔한 이경희 작가는 2000년 KBS 주말드라마 <꼭지>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2003년에는 인기가수 비의 드라마 데뷔작 <상두야 학교 가자>의 각본을 썼다. 그렇게 단막극과 주말드라마, 미니시리즈, 시대극과 학원물을 다양하게 오가던 이경희 작가는 2004년 정통 멜로물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통해 다소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주연배우들 역시 시청자들이 기대했던 '스타 캐스팅'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소지섭은 <유리구두>와 <천년지애>,<발리에서 생긴 일>에 출연한 라이징 스타였지만 <천년지애>는 성유리, <발리에서 생긴 일>은 조인성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작품이었다.

여주인공 송은채 역의 임수정도 검증되지 않은 신예 연기자였던 것은 마찬가지. 2001년 <학교4>로 주목 받은 임수정은 2003년 영화 <장화,홍련>과 < …ing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어려 보이는 동안 외모와 뛰어난 연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데뷔 후 네 편 연속 고등학생을 연기했던 임수정은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본인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20대 중반의 가수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았다.

드라마의 경우 동 시간대에 방송되는 경쟁작도 대단히 중요한데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대진운도 썩 좋지 않았다. 당시 MBC에서는 최불암과 차인표,전광열,유동근 등이 출연한 대하드라마 <영웅시대>가 방영 중이었고 SBS는 김래원과 김태희를 내세운 <러브스토리 인 히버드>가 대기하고 있었다. 2004년 11월 지상파 3사 월화드라마 중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인지도가 가장 약했던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04년 연말 지상파 3사 월화드라마 대전의 승자는 KBS의 <미안하다, 사랑한다>였다. 방영 초부터 꾸준히 10%중·후반대의 시청률을 유지하던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최종회 시청률 28.6%로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닐슨코리아 시청률 기준). 특히 <미안하다,사랑한다>의 이야기에 몰입한 시청자들은 스스로를 '미사폐인'이라 부르며 각종 커뮤니티에 드라마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박효신의 OST 대히트-극 중 패션까지 유행

▲ "밥 먹을래, 나랑 같이 죽을래"로 대표되는 <미안하다,사랑한다> 속 명대사는 훗날 수 많은 매체를 통해 패러디됐다. ⓒ KBS 화면캡처


사실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자 주인공과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함께 자란 소꿉친구를 짝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스토리 라인은 전혀 새롭지 못하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 오들희(이혜영 분)를 향한 차무혁(소지섭 분)의 복수가 등장하지만 무혁과 은채(임수정 분)의 사랑이 깊어지면서 무혁의 복수는 더 이상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경희 작가는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트리기 위해 스토리에 반전을 주기 보다는 '정통멜로'의 색깔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주력했다. 무혁의 한국행 이후 출연이 없었던 지영(최여진 분)이 마지막회를 앞두고 한국을 찾아와 무혁에게 미국행을 권하지만 무혁은 이미 이복동생인 최윤(정경호 분)에게 모든 것을 주고 미련 없이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슬픔을 극대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숨은 주역은 바로 음악이었다. 특히 박효신이 나카시마 미카의 동명곡을 리메이크한 <눈의 꽃>은 '소몰이 창법'의 대명사였던 박효신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서정적으로 변하게 된 계기가 된 노래였다. 어느덧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방송된 지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날씨가 추워지면 거리에서 박효신의 <눈의 꽃>이 흘러 나온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2004년 KBS 연기대상에서 소지섭과 임수정이 네티즌 상과 베스트커플상, 남녀 인기상, 남자 우수상, 여자 신인상을 수상했고 2005년 백상예술대상과 한국방송대상에서는 작품상을 수상했다. 대만과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UAE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방영되면서 국제적인 사랑을 받은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현재 OTT 채널 < Wavve >와 < WATCHA >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신인배우들로 채웠던 서브주인공

두 주인공 소지섭과 임수정도 아직 신예 딱지를 완전히 떼기 전이었지만 서브 주인공 정경호와 서지영은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실질적인 데뷔작이었을 정도로 초짜 신인이나 다름 없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오들희의 아들이자 인기가수 최윤을 연기한 정경호는 은채의 짝사랑을 받던 초반 비중은 상당히 컸지만 무혁과 은채가 사랑에 빠지고 최윤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비중이 점점 줄어 들었다.

2002년 4인조 혼성그룹 샵이 해체된 이후 한 동안 공백기를 가졌던 서지영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강민주 역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신인들이 맡았던 서브 주인공들의 아쉬운 연기는 왕년의 스타 배우이자 최윤의 어머니 오들희를 연기했던 이혜영의 열연으로 만회했다. 오들희는 전성기 때 영화 감독의 아이를 가져 쌍둥이를 출산했지만 은채의 아버지(이영하 분)가 몰래 쌍둥이를 고아원에 버렸다. 오들희는 드라마 초반까지 사치와 허영이 가득한 악녀 이미지로 나왔지만 사실 차무혁 못지 않은 드라마 속 최대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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