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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 잡아라", 야밤에 가건물 세운 외지인 수백명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 ⑧] 생존권 요구한 행담도 주민들, 개발에 맞서다

등록|2024.10.29 16:20 수정|2024.10.29 16:20

▲ 행담도를 관통하는 서해대교(서해안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1997년경 추정.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행담도 주민들은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냉수를 찾는다. 그날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솟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행담도 주민들은 행담도 개발로 고향에서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행담도 개발은 크게 2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는 서해대교 개발과 행담도 휴게소 건립이다. 2단계는 기존 섬 6만9000평에다가 섬 주변 갯벌 7만5000평을 추가로 매립해 국제관광휴양지를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1990년 1단계 개발 계획... 행담도 관통 서해대교와 휴게소 건립

정부가 서해안고속도로건설 계획(1단계)을 수립할 때는 1990년이다. 그런데 서해안고속도로 구간 중 행담도를 관통하는 서해대교 건설이 알려지자, 행담도를 국제관광휴양지로 개발하는 계획이 뒤따랐다.

"80년대 말부터 행담도 고속도로 개발 계획이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행담도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가나보다 했지, 쫓겨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 이은주

▲ 행도를 관통하는 서해대교 건설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먼저 서해대교 건설과 휴게소 건립 과정을 살펴보자.

도로공사는 서해대교를 1993년 11월에 착공해 2000년 11월 10일에 개통했다.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서평택 나들목)과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송악 나들목)을 잇는 교량으로, 총연장 7.31km, 왕복 6차로다. 건설사는 대림건설-럭키개발이었다. 이중 행담도를 관통하는 구간은 럭키개발(현 GS건설)이 맡았다.

행담도 휴게소는 서해대교가 완성된 이후인 2001년 1월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에서 가장 규모가 큰 휴게소이자 한국에서 유일하게 섬 위에 있는 휴게소다. 당시(1992년 6월) 당진군은 서해대교와 휴게소 건립 계획이 알려지자, 행담도 국제관광휴양지 개발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서해대교를 이용하는 관광객을 위해 휴식 및 편익 공간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장밋빛 청사진에 그쳤다. 대신 외지인들의 행담도 땅을 본격 사들이게 하는 시발점이 됐다.

애초 행담도는 심복현(沈福鉉)의 소유였다. 그러다 1922년 행담도인 매산리 산 1번지(면적 18정, 5만4000㎡) 전체가 일본 기후현에 사는 노리다케 겐스케, 오카야마현의 요시하라 두 사람 공동소유로 이전됐다. 헐값에 매수한 것으로 보인다. 노리다케는 경성세무감독국 지적계장으로 일하다 지적협회 서울시 업무주임으로 온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충남지역 토지 측량을 하다 행담도를 접하고 눈독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 서해대교와 행담도휴게소 건립 공사가 한창이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개발 계획에 투기꾼 몰려

해방이 되면서 행담도는 국가에 귀속됐다. 6.25전쟁이 끝난 이후 정부는 매년 일정 면적을 주민들에게 불하해 매매했다.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소유권을 주민들에게 넘겨준 것. 땅을 소유한 주민들은 콩과 보리, 옥수수 등 곡식을 일궜다.

그런데 이 땅은 개발계획이 알려지면서 외지인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외지인들이 섬 땅을 왜 이리 사려고 하나' 하면서 하나둘 땅을 팔았다. 외지인들은 땅을 팔려고 하지 않으면 시세보다 더 많은 돈을 얹어 매매를 유도했다.

"80년대 중후반까지 유일하게 밭 같은 거 해서 곡식을 빼먹으려고 안 파는 사람들은 불과 한 20%나 될까. 거의 한 80, 90%는 다 외지인 거였어요." - 임은순, 표선동, 한정만

▲ 1987년 5월 26일 경향신문 기사. 제목은 '무인도를 잡아라'. ⓒ 경향신문 갈무리


▲ 1991년 9월 6일 매일경제 기사에는 '해안 섬 투기 바람 몸살' 제목을 달았다. 기사 소제목은 '당진, 태안 일대 목 좋은 곳 대부분은 외지인 소유'다. ⓒ 매일경제 갈무리


"무인도를 잡아라"라던 언론

1987년 5월 26일 기사에는 <경향신문> 기사에는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무인도를 잡아라' 제목의 기사를 보면 "서해안지구 환상의 도로로 일컫는 서해안고속도로 계획이 구체화하면서 최근 서남해안 인접 도시와 부동산 업계는 사람이 사는 섬은 물론 자그마한 무인도를 사겠다는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중략) 삽교호에서 빤히 보이는 행담도. 10여 가구의 주민과 인천의 모 씨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섬은 얼마 전까지 평당 1만 원에서 2만 원 하던 것이 5만 원까지 껑충 뛰었다"라고 전했다.

1991년 9월 6일 <매일경제> 기사에는 '해안 섬 투기 바람 몸살'이란 제목을 달았다. 기사 소제목은 '당진, 태안 일대 목 좋은 곳 대부분은 외지인 소유'였다.

"서해안 개발붐을 타고 충남 지역 서해안 섬이 외지인들의 투기 대상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서해안 고속도로 경유예정지인 신평면의 행담도는 전체 5만4천 평 중 78%인 4만2천 평이 외지인소유이다. 외지인들이 섬을 사들이면서 평당 평균 3천~4천 원짜리 행담도의 땅값은 4만~5만 원 선으로 치솟아 호가하고 있다."

▲ 1996년 당시 당진군의 행다목 개발계획. ⓒ 당진시


▲ 행담도 국제관광휴양지 개발계획 조감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주민들이 2단계 행담도 관광단지 개발계획을 접했을 때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땅을 팔아넘겼을 때였다.

"땅을 팔아넘길 때까지만 우리는 이게 개발된다는 정보를 알지 못했어요. 정부나 당진군에서 그런 얘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 임은순, 표선동, 한정만

2단계 개발계획은 국제관광휴양지... 도로공사, 행담도 전체 강제수용

당진군의 관광지 개발계획을 구체화한 곳은 도로공사였다. 1995년, 도로공사는 서해안 고속도로 시행자인 한국도로공사가 건교부로부터 고속도로 휴게소 등을 건립하는 연접개발계획 승인을 받아냈다.

1996년 7월에는 도로구역을 섬 전체로 확장·고시했다. 곧 행담도 전체(6만9000여 평)를 강제 수용하고 섬 전체를 도로공사 소유로 만들었다. 당시 충남도는 행담도에 도유지 6000여 평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공사는 충남도와 당진군은 행담도 개발사업에서 배제했다.

▲ 서해대교 공사과정에서 행담도 앞 바다에서 포획된 고래 . 2000년 7월 촬영.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도로공사는 주택에 대해서도 무허가 건물이거나 정부 소유라며 건물 철거비만 주겠다고 했다.

"정부에서 70년대에 새마을 주택이라고 지어준 게 있지요. 주민 대부분(18가구 중 10가구)이 새마을 주택에 살았는데 세입자로 돼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표선동(당시 행담도 주민대책위원장), 김종순

이때부터 주민들은 도로공사 측에 이주 및 생계 대책 수립과 영업보상 등 생존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크게 이주대책, 생계 대책, 영업보상, 어업보상 등 네 가지였다. 정부와 도로공사는 이중 보상이라며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미 아산만권 산업단지개발사업 때 보상이 끝나 이중 보상은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산만권 개발에 따른 보상은 행담도를 강제로 떠나야 하는 게 아닌 공사로 인한 피해보상이라 액수가 얼마 안 됐거든요." - 표선동, 김종순

이주대책 요구하며 수개월간 무기한 농성, 그러나

▲ 개발로 바닥층까지 속살이 드러난 행담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1997년 9월부터는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와중에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행담도에 서해대교 인터체인지가 건설되고 관광지로 개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지인들이 보상을 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급조해 가건물을 만들려 했다. 이렇게 보상 목적으로 행담도로 찾아오는 사람이 수백 명에 달했다.

주민들은 자체모임을 결성하고 이들을 막았다. 투기 세력이 기승을 벌일 경우 원주민들에 대한 보상과 대책 마련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들이 야밤을 이용해 가건물을 세우자, 주민들은 불침번을 서가며 이들을 막았다. 도로공사는 주민들의 이런 노력을 뒤로 한 채 아무런 답변 없이 공사를 가속했다.

도로공사는 섬을 계속 파헤쳤고 레미콘 공장까지 들어섰다. 주거지와 1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자 제일 먼저 마시는 물이 오염됐다. 교각이 들어서면서 소음과 비산먼지, 피부질환까지 겹쳤다. 날아드는 먼지는 온 집안과 섬 전체를 시멘트 가루로 뒤덮였다. 도로공사와 LG건설은 일명 구사대를 동원해 주민들을 강제 해산시키려 꾀했다.

"시공사인 LG건설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는 듯했다. 도로공사는 물론 충남도, 당진군에서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갑자기 건설사 측이 동원한 구사대가 몰려들어 심한 욕설과 함께 여성들의 머리채를 끌고 다녔다. 안전모에 물을 퍼담아 주민들에게 끼얹었고, 심지어 노인들을 들어 올려 바닥에 내팽개치기까지 했다. 칼을 들이대며 협박도 했다. 주민 대다수가 심하게 다쳤다."

1999년 주민들은 결국 모든 터전을 잃고 섬을 떠났다

일부 주민은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됐다.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주민 농성은 주민 행담도 주민대책위원장인 표선동 씨가 공무방해혐의로 검찰에 연행되면서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주민들은 도로공사와 이주보상비를 받기로 하고 사실상 싸움을 종료했다. 1999년 주민들은 결국 모든 터전을 잃고 섬을 떠났다(도로공사는 이주보상비도 10년이 넘게 질질 끌었다. 2014년에서야 보상이 이뤄졌다. 이주보상비는 가구당 1억2500만원이 전부였다).

▲ 행담도 갯벌매립 반대 현수막 (2000년 9월).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주민들이 섬을 떠나자, 행담도 2단계 개발계획(관광단지 조성)이 본격화됐다.

1997년 터진 외환위기는 행담도 관광지 개발계획을 급가속시키는 원인이 됐다. 정부는 외자 유치에 몰두했다. 한국도로공사는 1999년 5월, 외자 유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도로공사는 행담도 해양관광레저단지 개발 사업자로 싱가포르 에콘(ECON)사를 선정하고, 현대건설과 함께 행담도 개발(주)(ECON사 지분 63.9%)를 만들었다.

행담도 개발(주)는 2004년 완료를 목표로 기존 섬 6만9000평뿐만아니라 굴과 바지락 등 해산물이 지천인 주변 갯벌을 매립해 해양수족관과 실내 수영장, 해양테마공원 등을 갖춘 해양복합휴게시설을 짓겠다고 밝혔다.

국제관광레저단지 조성 목적으로 갯벌 7만5000평 매립

▲ 개발매립과 개발로 지형이 바뀐 행담도, 위의 사진이 개발 전 모습이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당진지역 시민사회단체는 2000년 8월, '행담도 갯벌살리기 당진군민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행담도 주변 공유수면 매립계획과 위락단지 조성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당시 당진군은 갯벌 매립 최소화를 요구했다. 행담도가 속한 신평면의 오성환 신평면장(현 당진시장)도 의견서를 통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동안 도로공사에서 도로 확포장 공사 때 땅을 수용하는 일은 있었지만 섬 전체를 송두리째 빼앗는 경우는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행담섬은 당진군민의 휴식공간이다. 그런데 행담도 개발계획 승인시 주민공청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주민공청회를 개최하고 개발이익을 지역주민이 받을 수 있게 해달라" - 2000년 7월 신평면 의견서, 당시 면장 오성환(현 당진시장)

2008년까지 기존 섬 6만9000평에다 섬 주변 갯벌 7만5000평이 추가 매립됐다. 하지만 주민들을 내쫓고 갯벌까지 매립한 행담도에 국제관광휴양시설은 없다. 도대체 행담도 개발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다음 기사 9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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