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의 '아파트'에 푹 빠진 뉴욕 사람들, 딸이 만들기 시작한 것
노래 덕에 '한국 랜덤 게임'에 대한 관심 덩달아 높아져... 고등학생 딸, 게임 목록까지 적고 있네요
▲ 로제와 브루노 마스(Bruno Mars)의 듀엣곡 '아파트(APT.) ⓒ 더블랙레이블
"엄마! 아파트 게임 빨리 가르쳐주세요!"
갑자기 날아온 고등학생 딸아이의 문자에 당황했다. 지금쯤이면 방과후 육상부 몸풀기 스트레칭을 하고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갑자기 웬 아파트 게임? 그러나 더 당황스러웠던 건 한국 사람인 내가 한국 게임이라는 아파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뉴욕시에서 한참 떨어진 주택지구에 산다. 딸아이는 내게 배운 한국의 간단한 친목 게임을 친구들과 하곤 했다. 구구단 게임, 007 빵 같은 놀이 말이다. 그러나 미국 아이들의 놀이에 묻혀 어쩌다 한 번쯤 있는 일일 뿐이었다.
어쨌든 친구의 제안에 우리 엄마가 당연히 아파트 게임도 알고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내가 모르겠다 하니 아이도 당황한 모양이다. 아이는 내게 더 황당한 질문을 해온다. 그런데 아파트가 뭐냐고.
우리 동네에서 보는 2~3층 작은 건물이 아니라 도심지에 빽빽하게 서있는 빌딩형 아파트먼트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아파트'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미국 전역서 흘러나오는 '아파트'
블랙핑크 멤버 로제와 미국의 유명 팝스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가 음원 차트를 휩쓰는 중이란다. 한국에서 음방 1위를 하더니 발매 일주일 만에 음악 스트리밍앱 스포티파이에서 1억 스트리밍을 돌파했다.
딸아이의 요청에 일단 뮤직비디오를 봤다. 그제서야 요즘 가는 데마다 흘러나오는 노래가 로제의 '아파트'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트나 가게, 카페에서도 연일 흘러나오고, 심지어 아침 산책길 내 곁을 걸어가던 여성과 주차장에서 본 젊은 여성들도, 월마트에서 지나쳤던 십 대들도 '아파트'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아파트가 K-pop의 아파트일 줄이야!
채영이가 좋아한다는 랜덤게임 아파트도 검색해 보았다(로제의 한국 이름은 박채영이다. 노래 '아파트'의 도입부에는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이라는 술게임 멘트가 흘러나온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데다 음주 문화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저 '벌주 게임' 정도로 여겨졌다. 걸리면 술을 마셔야 하니 고등학생에겐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아이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이미 쇼츠를 보고 노래도 게임도 알고 있었다.
미국은 가족이나 친구 간에도 술 문화에 다소 엄격한 편이다. 그렇지만 대학생이나 젊은 층이 모이는 파티나 특별한 날의 하우스 파티에서는 과음하기도 한다. 주변 이십대 청년들에게 미국 술 파티 게임이나 벌칙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성적으로 거리낌이 없고, 좀 더러운 걸 마시게' 한단다. 양말이나 신발에 술을 부어 마시거나 탁구공을 튀겨 공이 들어간 맥주잔을 들이키는 등 벌칙이 좀 역겹다고.
이러다 과음하는 K 술문화가 퍼지는 건 아닐지,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런데, 내 걱정과는 다른 방향으로 '아파트'가 번졌다. 우리 집 아이들이 아직 십대여서 그런지 술보다는 '한국 랜덤 게임'을 더 알려줄 수 있는지 주변에서 물어오기 시작했다.
'K 랜덤 게임' 열풍으로 이어질까
▲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입생로랑 패션쇼 뒤풀이 현장에서 가수 로제와 모델들이 '아파트'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을 소개한 KBS. ⓒ KBS 유튜브 갈무리
쇼츠나 틱톡에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 일종의 '준비물'이 필요한 게임이 다수다. 그러나 'K 랜덤 게임'은 그저 둘러앉기만 하면 된다. 지난 금요일, 딸을 데리러 십대들의 모임에 갔다가 붙잡힌 나는 즉석에서 007빵, 인디언밥, 구구단, Go-Back-Jump(3-6-9) 같은 '고전 게임'을 알려줘야 했다. 대학생 시절, 외국 친구들과 부담 없이 놀던 게임을 딸과 친구들에게 전수해준 셈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곰곰 생각하다가 벌칙으로 술을 마셔야 한다는 점을 빼면 놀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아이들을 불렀다. 우리 가족은 미국의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이면 저녁 식사 후에 함께 게임을 한다.
보드게임은 물론 틱톡(에서 유행하는) 게임, <신서유기>나 <1박 2일> 같은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게임으로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금요일은 '패밀리 나이트'로 정하고 돌아가면서 호스트를 맡는다. 영화 보기, 체스 하기, 미니 탁구 등 호스트가 정한 레크리에이션을 하며 짧게라도 퀄리티타임(quility time)을 가지려고 노력해 왔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십대 아이들이 늙은 엄마와 잘 놀아준다.
아파트 게임의 벌주 대신 작은 잔에 우유를 따라 술을 대신했다. 들이킬수록 배도 부르지만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지 않기로 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오랜만에 맘껏 웃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의 그룹 채팅방엔 K 랜덤 게임에 대한 반응이 솔솔 올라오는 중이다. 한국어를 잘 몰라도 상관없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 금세 퍼지는가 보다. 도대체 어디서 봤는지, 친구 중 하나가 우유를 마신 뒤에 컵을 머리 위에서 털었는지 물어보더란다.
새삼 놀랍다. K 드라마나 영화, K pop이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알리는 전도사가 된 지는 오래지만, 노래 한 곡이 뭔가 토탈 패키지처럼 한국의 언어, 놀이, 음식, 생활을 다 전달할 수 있다니 말이다.
"엄마, 그런데 그거 알아? 미국 친구들은 디비디비딥 게임을 어려워해. 손(동작)이 안 된데."
알고 있었다. 학창 시절 나의 외국인 친구들도 그랬다. 반짝반짝 손동작이 어려워 사이렌 게임을 할 수가 없었다. 외국인들은 '반짝반짝 작은 별' 동요 율동도 유치원 때 안 배우나?
▲ 로제, 브루노 마스 - 아파트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 유튜브 갈무리
'아파트' 덕에 오랜만에 아이들과 한국 게임을 하며 한참 웃었다. 고등학생 딸은 지금 게임 리스트를 만드는 중이다. 부끄러움이 많은 딸은 'K 게임 해볼래?' 하고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었다. 모임에는 낯선 문화에 시큰둥해 하는 아이가 꼭 있는 법, 굳이 한국의 놀이를 꺼내고 싶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제는 친구들과 꼭 딸기 게임, 바보 게임(숫자 틀리게 말하기), 만두 게임을 해보고 싶어졌단다. 로제덕에 K 푸드처럼 K게임의 장벽이 낮아진 덕이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의 학교나 놀이터에서 아파트나 딸기 게임, 눈치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줄넘기, 농구와 함께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될 거라 상상하니 괜히 웃음이 난다. 보드게임처럼 미국 가족들이 둘러앉아 구구단 게임이나 손병호 게임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아랴.
내 바람대로 K술문화가 아닌 K놀이가 더 유행할 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K는 흥이고, 세계를 흥겹게 한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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