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그림을 못 그리는 디자인강사가 그림책을 내기까지

첫 그림책 <나가 볼까?> 속 소심하고 겁 많은 곰치 이고르, 바로 나였다

등록|2024.10.28 15:55 수정|2024.10.28 15:55

▲ 김진경 ( 작가)  ⓒ 화성시민신문


곰치 이고르와 청소놀래기 에밀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첫 그림책 <나가 볼까?>가 지난 9월 출간되었다.

<나는 곰치>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온라인 공모전에 냈던 때부터 실제 그림책으로 출간되기까지 만 6년이 걸린 것이다. <나는 곰치>와 <나가 볼까?>를 비교하면, 양쪽의 스토리라인이나 캐릭터는 좀 달라졌다. 곰치가 놀란 눈으로 날치를 본다는 공통점을 빼면 두 개는 거의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그림책이냐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림책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면 서점에서 아이들을 위해 직접 그림책을 하나 하나 골랐고, 그렇게 고른 책들을 밤마다 지겨울 정도로 읽어주다 보니 그림책 몇 권은 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림책을 찾지 않을 정도로 자랐지만 우리집 책장에는 아직도 그림책들이 빼곡하다.

문학을 공부했지만, 오랫동안 나는 작가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나는 스토리텔링에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자신 있었던 영역은 '중간'이었다. 번역을 하거나 인터뷰를 해서 글로 정리하거나 어려운 글을 쉬운 글로 풀어쓰거나 하는 정도의 중간 역할이 나에게 잘 맞았다. 나는 기자, 편집자, 번역자, 기획자의 역할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들 주변을 맴돌았다.

대학원에서 디자인이론을 공부하면서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디자인이야말로 나와 잘 맞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나는 특별한 목적 없이 인간과 삶 자체를 이해하려는 인문학의 관점과 디자인을 결합해서 교양교육으로서의 디자인교육을 하고자 했다. 내 안의 어린이를 불러내서 디자인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실은 아직도 아이인 내가,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 기획을 빌미로 놀러 나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 공간 디자인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내가 공간의 크기를 몸으로 아는 것이 필요했다. 교실의 높이와 너비를 줄자로 재어보았자 수치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교실의 사물들과 공간을 몸으로 재어 보면 공간과 사물의 크기에 대한 이유를 은연 중에 알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통합 수업을 위해서는 살아 있는 계절을 찾아서 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계절의 얼굴을 그려보자. 나뭇잎 하나에 들어 있는 계절의 색깔을 모두 찾아 보자. 이런 수업을 하다 보니, 음, 이건 그림책과 다르지 않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디자인수업과 그림책의 문법은 완전히 다르기에 내가 기획했던 디자인 수업을 그림책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하지 못했다.)

그림책으로 건너오는 일의 가장 큰 장애물은 그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림 못 그리는데'라는 생각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디자인 강사이면서도 이 생각을 내내 품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리지만 아이들을 위한 수업에서는 틀을 기획하고 판만 깔아주면 두려움 없는 아이들이 쓱쓱 그려나가니까 상관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림 못 그리는 걸 들키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과 수업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려 보는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지역아동복지센터 친구들을 위한 감정놀이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는 내가 먼저 종이 위에 내 마음을 그려내 예시로 보여주고, 초등학교 디자인수업을 하기 전에는 새벽부터 학교에 일찍 가서 그림을 그렸다. 잘 그리기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잘 관찰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었다.

조금씩 그리다 보니,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그림그리기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교육 프로그램을 먼저 시작했지만, 어쩌면 어른들에게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엄마들이 먼저 괜찮아지면 아이들은 자연스레 모든 것이 좋아진다. 내가 그랬듯이, 엄마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에는 인색하다. 2022년 그물코카페에서 엄마들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외출, 나를 위한 특별한 예술여행)을 기획했다.

오래 알고 지내던 연극놀이 강사 선생님 두 사람을 불러 함께 했다. "나는 그림 못 그려. 나는 연극 못해." 첫 시간에 와서 이렇게 말하는 엄마들과 놀면서 친해졌다. 나 역시 '그림 못 그리는 엄마'이기에 그들에게 다리를 놓아주고 싶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종이를 보지 않고 그리기나 습식 수채화를 통해 최대한 부담을 덜어내려고 했다. 엄마들의 일상은 전래동화의 장면들과 중첩되면서 연극 작품이 되었다.

엄마들에게 삶이 예술이라고, 예술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림책을 출간하는 일에는 수많은 장벽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출판사의 입맛에 맞아야 했다.

동탄복합문화센터에서 독립출판한 작품을 들고 봉담도서관에서 발표할 때 생각보다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조금 자신감이 생긴 나는 여러 출판사에 투고 메일을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고도 두 번의 그림책 워크숍을 거쳐 겨우 그림책을 낼 수 있었다. 너무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느낀 건 그림책 내기는 정말 어렵다는 것, 하지만 그만두기에는 너무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이 시점에서 생각나는 건 김민기의 노랫말이라는 것.

"내가 오른 봉우리는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말하자면, 소심하고 겁 많은 곰치 이고르는 나 자신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화성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