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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프로그램 출연한 연쇄살인범, 피해 여성의 최후

[리뷰] 영화 <오늘의 여자 주인공>

등록|2024.10.30 15:02 수정|2024.10.30 15:02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피치 퍼팩트>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배우 애나 켄드릭의 감독 데뷔작 <오늘의 여자 주인공>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켄드릭은 감독직을 수행함과 동시에 영화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본작은 1970년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연쇄살인범이 텔레비전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건의 전후를 다룬다.

대중의 이목을 끈 강력 범죄자를 다룬 미디어는 줄곧 '가해자에게 지나친 서사를 부여한다'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범죄자 본인을 사건의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관객이 피해자 대신 가해자에게 이입하게끔 각색했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범이자 식인귀였던 제프리 다머를 다룬 <다머>, 그리고 '도끼 살인마' 캔디 몽고메리를 다룬 <러브 & 데스>등 최근작 역시 이러한 지적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오늘의 여자 주인공>은 이러한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 '로드니'의 성장기나 살인 동기에 집중하는 대신, 피해 생존자인 '셰릴'과 '에이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러면서도 자칫 부족해질 수 있는 극적 긴장감 역시 성공적으로 조성했는데, 이는 이야기의 '악당'을 연쇄살인범이 아닌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사회 전체'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악역은 살인마 아닌, 살인 조장하고 방관하는 사회

▲ 영화 <오늘의 여자 주인공> 스틸컷 ⓒ 넷플릭스


<오늘의 여자 주인공>은 배우 지망생 셰릴이 연애 프로그램에 나가면서 시작된다. 이 프로그램에서 '오늘의 여자 주인공'이 된 셰릴은 얼굴을 가린 남자 셋에게 차례로 질문을 던지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이 세 남자 중 한 사람이 연쇄살인범이었다는 것이 가장 '공포스러운' 요소이지만, 본작에서 셰릴이 마주한 공포는 한 명의 흉악 범죄자 그 이상이다.

셰릴은 훌륭한 학력의 소유자임에도, 프로그램 진행자로부터 '남자들이 기죽을 수 있으니 최대한 밝고 멍청한 척하라'는 지시를 듣는다. 플러팅이라는 명목하에 셰릴을 향한 끝없는 성희롱 역시 이어지고, 자기 주관을 섞은 말을 하려는 순간 진행자의 차가운 눈빛을 받는다. 셰릴은 '무대의 주인공은 당신'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작 무대 위에서는 남자들이 경쟁 끝에 쟁취하는 '보상'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하도록 강요받은 것이다.

본작은 '남자 3번'으로서 연애 프로그램에 참여한 로드니의 과거 살인 행적과,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셰릴의 이야기를 교차하여 보여준다. 영화의 중반부에서는 피해자를 촬영하는 로드니의 카메라 플래시와 연애 프로그램 촬영장의 조명을 겹치게 하여 화면을 전환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병적인 강간 살인범의 시선'과 '여성의 인간성을 착취하는 미디어의 시선'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묵직하게 지적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오늘의 여자 주인공>이 제공하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은 연쇄살인범이 체포되는 장면이 아니라, 방송 사고를 틈타 전열을 가다듬은 셰릴이 방송을 역이용해 남자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장면일 수밖에 없다. 셰릴은 '여자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보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친절을 베푸느냐?' 그리고 '여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 등 큐시트에 없던 본질적인 질문을 만들어 내 출연 남자들이 자기 가면을 벗고 분노하게 만든다.

그동안 직업이 사진가였던 살인마의 피해 여성들이 '카메라 앞에서의 진실한 모습', 즉 거짓 없이 가장 취약해진 모습을 보였다면, 이 순간만큼은 셰릴을 얕본 남자들이 그 처지에 있게 된 것이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현실

▲ <그레이엄 노턴 쇼> 스틸컷 ⓒ BBC1


셰릴은 자신의 기습 질문에 그나마 나은 답변을 한 '남자 3번' 즉 로드니를 프로그램의 승자로 선언한다. 하지만 방송이 끝나고 난 뒤, 무언가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셰릴은 로드니에게 자신의 가짜 전화번호를 주고 그와의 연을 끊으려 한다. 로드니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인적이 드문 주차장에서 셰릴을 쫓아가 죽여버리려 한다.

갑자기 튀어나온 방송국 퇴근 인파 덕분에 간신히 살아난 셰릴은 배우로서의 꿈도 포기하고 아예 이사를 가 버리는 등 자신의 안전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상대'가 아니라 '가장 자신에게 상처입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골랐는데도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단지 '옛날 일이다'라고 치부해 넘길 수 있을까? <오늘의 여자 주인공>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여성의 안전에 관한 본작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해 보인다.

일례로, 배우 시얼샤 로넌은 지난 10월 25일, BBC의 토크쇼인 <그레이엄 노턴 쇼>에 폴 매스칼 등의 남자 배우들과 함께 등판한다.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는 위급 상황에 묵직한 핸드폰을 호신용으로 쓸 수 있다는 말이 나오자, 진행자를 비롯한 남자 배우들은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며 해당 발언을 조롱하기 시작한다.

이때 시얼샤 로넌이 "하지만 그것(호신이 필요한 상황에 대한 걱정)이야말로 여자들이 항상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며 지적한다. 이 단순하고도 강렬한 장면은 순식간에 바이를(viral) 화 되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고, 수많은 네티즌의 공감을 끌어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소위 '점잖은' 남성들조차도 여성의 안위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여성의 걱정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게 된다. 그렇게 여성 안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민하거나 '히스테릭한' 여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위협은 남녀의 신체적 차이가 아닌 근본적 위계 격차에서 발생한다.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가 여전하고 '승진을 위해 몸을 요구한' 남자가 비판받는 대신 '승진하기 위해 몸을 댄' 여자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상, <오늘의 여자 주인공>과 <그레이엄 노턴 쇼>에서 보인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아나 켄드릭은 본인의 감독 데뷔작을 통해 당당하게 선언하는 듯하다. 여성의 안전은 '요즘은 치안 좋다'라는 말로 일축할 수 없다고, 근본적인 성평등을 이루지 못하면 제2, 제3의 '로드니'는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처럼 <오늘의 여자 주인공>은 1시간 35분의 담백한 러닝타임 안에 서스펜스와 사회적 메시지를 응축시킨 수작임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감독' 애나 켄드릭의 다음 작품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본작의 성공이 더욱 많은 '사실적 호러' 영화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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