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따돌림 당하다 전학왔는데 유일한 친구가 왕따라면?

[넘버링 무비 405]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일렁일렁>

등록|2024.10.30 10:17 수정|2024.10.30 14:16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일렁일렁>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와이드 앵글 작품 가운데는 10대 소녀들을 중심으로 내면의 갈등을 다루고자 한 작품이 많았다. 선재상을 수상하며 운명과 선택에 대한 섬세한 탐구를 이뤄냈다는 평을 받은 송지서 감독의 <유림>이 있었고, 졸업을 앞둔 여중생들의 모습을 뒤따르며 이들의 하룻밤 모험을 그려내는 임이랑 감독의 <산책자들>이 그랬다. 이들 작품은 아직 채 여물지 못한 감정과 관계를 바탕으로 경쟁과 충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에너지를 포착해 스크린 위로 옮겨다 놓는 데 성공한다.

김예원 감독의 <일렁일렁> 또한 그중 하나다. 그는 전작인 <우연히 나쁘게>(2020)를 통해 청소년기의 여고생이 타자를 통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바라보며 내면을 그리고자 했던 바 있다. 하나의 상황 앞에 주어지는 끌림과 파괴라는 양가적 충동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의도에 해당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인물 사이의 관계로 조금 더 나아간다. 수영장을 같이 다니는 이름이 같은 두 친구 윤지우(금빈 분)와 송지우(유은아 분)의 관계다. 영화의 시작을 통해 두 사람을 단짝으로 이어준 그는 그사이를 헤집으며 관계가 일으킬 수 있는 상처와 갈등을 정확히 바라보고자 한다.

02.
"너 뭐가 문제야? 난 너랑 잘 지내고 싶은데."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친구가 된다. 전학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송지우가 쏟은 물고기 밥을 지나가던 윤지우가 도와주게 되는 상황.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이름이 서로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빠르게 가까워진다. 수영 또한 두 지우의 관계를 이어주는 하나의 도구다. 어릴 때부터 오래 수영을 해온 송지우는 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윤지우를 돕겠다고 나서며 함께 수영장을 다니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두 사람이 이렇게 단순한 이유로 절친한 사이가 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그 시작은 영화의 첫 장면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윤지우는 물에 잠긴 상태로 등장한다. 수영은 못하지만 잠수는 꽤 잘하는 편이다. 그런 그를 수영장 바깥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나연(김지우 분)은 윤지우와 잘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분명 비꼬는듯한 태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날카롭게 반응하는 그를 나연은 강하게 밀쳐 다시 빠뜨린다. 학교 폭력의 서사가 시작되는 자리다. 윤지우의 잠수는 자신의 일상을 괴롭히고 파괴하는 무리로부터의 해방이자 자신만의 시공간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제 그 일조차 침범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송지우 역시 이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따돌림과 폭력을 당하다 전학을 오게 되었다. 학교 폭력을 당하는 존재의 곁에 서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그 수렁의 깊이를 몸소 경험한 바 있다는 뜻이다. 그런 송지우가 지금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는 윤지우와 마주 서게 만들고 빠르게 친한 친구가 되게 만드는 영화와 감독의 의도는 일면 잔혹하기까지 하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윤지우의 곁에는 있어 줄 수 있지만, 다른 무리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윤지우의 옆에서까지 함께 서 있어 줄 수 있을까?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일렁일렁>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너 왜 말 안 했어? 너 왕따라며?"

영화가 바라보고자 하는 자리는 명확하다. 친구와 우정이라는 거대하고도 사소한 명분을 위해 자신이 도망쳐 나온 진창 속으로 다시 제 발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아직 10대에 불과한, 이제 막 그 수렁으로부터 벗어난 송지우의 선택은 우리가 짐작하는 바 그대로다. 친구와 생존, 우정과 안녕 사이에서의 위태로운 줄타기. 송지우는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다면서도 다른 아이들이 없을 때만 만나자는 제안을 건넨다. 물론 그렇게 다시 홀로 남겨지는 윤지우에게는 또 하나의 가혹한 현실이다. 이제 송지우는 나연의 무리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영화는 두 사람의 손등 위에 새겨진 금붕어 모양의 판박이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이미지를 통해 관계의 변화를 암시한다.

송지우라는 인물을 통해 감독이 이끌어내고자 하는 내면의 심리에는 하나가 더 있다. 이제 불안한 생존에 성공한 인물이 자신의 오롯한 안녕을 위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을 보이고자 하는 태도는 고난을 직접 경험한 바 있는 인물에게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불안과 공포 때문이다. 이제 송지우는 양측 사이에 서서 저울질하던 것으로도 모자라 무리와 함께 윤지우를 괴롭히는 일에 가담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미 위협당하고 있던 윤지우의 일상을 송지우 또한 밟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일렁일렁>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4.
하지만 정확히 뿌리 내리지 못한 임시방편의 삶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송지우의 과거가 나연의 무리에게 드러나는 순간 송지우는 다시 한번 버려지고, 이제 남는 것은 두 사람의 상처와 갈등뿐이다. 이제 무리가 폭력을 가해오는 쪽은 되려 윤지우가 아닌 송지우다. 그들의 시선에서, 약자여야만 하는 존재가 잠시라도 강한 척 자신들과 어울려 지낸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여전히 혼자 남겨진 윤지우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과거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 송지우에 대한 미움이 더해졌다는 것일까.

영화 전체를 통해 두 인물의, 정확히는 어느 쪽에도 명확히 서 있지 못한 송지우를 통해 복잡한 심리를 들여다보고 있지만 해당 인물을 악인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여전히 물속에 잠긴 채로 바깥세상과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윤지우의 모습과 그렇게 숨이 차오른 그를 구해내는 송지우의 모습을 영화가 마지막 지점에서 그리고 있는 이유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이제 두 사람의 손등 위에서 물고기 스티커는 모두 지워졌지만 첫 만남의 순수한 기억마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금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결의 일렁임 속에서 자라왔다. 지금의 선택이, 나의 이 작은 감정 하나가 어떤 모습이 되어 돌아오게 될지 알지 못한 채로. 나는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두 사람의 관계가 그곳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