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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화 계급도,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중요한 건 그저 달리는 것... 다치지 않고 잘 달리려면 내게 맞는 러닝화 선택해야

등록|2024.10.29 20:52 수정|2024.10.29 20:52
무언가를 시작할 때, 온갖 장비를 다 챙겨서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코웃음 치곤 했다. 해발 200미터의 뒷동산을 올라가는데 등산 전문 브랜드로 치장한 등산객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그랬다. (중략) 풀 세트로 장착하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런 내가 얼마 전, 러닝화를 샀다. 무려 20만 원짜리 러닝화를.

달리기의 가장 큰 장점은 딱히 필요한 게 없다는 것이다. 달리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도 한동안은 그 의지로 달렸다. 하지만 뛰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부상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발목을 잘 잡아주지 못하는 신발을 탓했다.

(중략) 드디어 새 신을 신고 뛰던 그날, 나는 '와, 진짜 다르긴 다르구나.'를 육성으로 내뱉으며 달렸다. 그전엔 지면과 발이 직접 닿는 느낌이었는데, 이 신발은 그렇지 않았다. (중략) 발목과 발등의 부상도 이후로 생기지 않았다. 뛰면 뛸수록 그간 무시했던 장비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 강주원, <보통의 달리기> 56-58쪽

나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달리기는 두 다리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신발장에 굴러다니던 낡은 운동화를 신고 달리다 3주 만에 무릎 부상을 입었다.

가성비 (그러니까 안 비싼데 좋은!) 러닝화를 찾고 찾았는데, 추천된 러닝화들이 15만~20만 원 사이. 내 평생 그렇게 비싼 신발을 산 적이 없었다. 안 살 수도 없고, 아무거나 샀다가 또 다치면 안 되겠고... 그래, 학원을 다녀도 한 달에 그 정도는 드니까... 최소한의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지갑을 열었다.

그랬던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고 반년 만에 러닝화 네 켤레를 샀다. 에... 그러니까, 사정은 이러하다.

반년 만에 러닝화 네 켤레

▲ 벌써 반년이라니, 500km 가까이 달렸다니. (러닝화 하나 더 사긴 샀어야 했네!) ⓒ 정유진


부상 방지를 위해서는 러닝화의 쿠션이 중요한데, 쿠션도 회복 기간이 필요하다는 거다. 매일 신으면 안 되고 하루는 쉬어줘야 한다고. 그러니 매일 달리기로 결심한 나로서는 최소 두 켤레가 필요하다는 말씀. 고르고 골라 샀던 러닝화를 신고 달리면서도 내게 맞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나는, 이번엔 비교 차 다른 브랜드의 가성비 좋다는 러닝화를 샀다.

그런 와중에 추천목록에서 늘 빠지지 않으나 내 기준 비싼 축에 속해서 단념한 러닝화가 반값 할인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시 말하지만 쿠션이 중요한 러닝화는 수명이 있는데 대략 500킬로미터를 달렸으면 바꿔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쯤 평생 달리기로 결심한 나로서는 그 운동화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모셔두기로 하고...

1번과 2번 운동화를 번갈아 신으며(장단점이 확실히 달랐다) 달리기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평생 달리기를 하겠다는 마음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달리기를 '일상의 운동'으로서 꾸준히 할 수도 있지만, 어쩐 일인지 도전하고 성장하고픈 욕구가 자꾸 샘솟는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오래, 온갖 곳을 달리고 싶은 것이다.

그 길은 풀코스 마라톤(더 나아가 울트라마라톤) 아니면 트레일 러닝인데, 풀코스 마라톤은 이대로 조금씩 훈련을 해나가면 되고... 트레일 러닝을 하려면 일단 트레일 러닝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침 추천 운동화가 또 할인을...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달리기를 안 했다면 나 역시 이런 구매 행위자를 보고 조용히 혀를 찼을 것도 같다. 물론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다 나처럼 러닝화를 '사대는' 건 아니겠지만(나랑 똑같이 달리기를 시작한 남편은 한 켤레만 샀다), 지금 나는 러닝화를 사겠다고 돈과 시간을 쓰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다치지 않고 계속 잘 달려보려고 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한 번 말하지만, 나에게 맞는 좋은 러닝화가 필수불가결하다.

달리기의 세계에서 중요한 건 '달리기'

그런데 이런 기사가 나왔다. '러닝 붐에 '러닝화 계급도' 유행... 급 나누기 문화 어디까지?', 러닝화마저 계급이 나뉘어 있고, 이는 모든 것에 등급을 매기는 우리나라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러닝 붐이고, 스포츠 브랜드마다 다양한 소비자에 맞춰 천차만별의 러닝화를 많이 만들어낸다. 그러니 브랜드 가치, 가격대, 내세우는 성능 등으로 줄을 세울 수도 있겠다. 그중엔 '헉' 소리 나게 비싼 러닝화도 당연히 있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상품처럼.

▲ '급' 나누기가 아니라, 러너의 목표와 수준에 따른 구분 아닐까. '계급'이란 말은 위트고. 내겐 이 표가 일종의 정보로 보인다. 아래 가격대가 텅 비어 매우 아쉽긴 하지만. ⓒ 온라인 커뮤니티 화면 캡처


하지만 '급 나누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걸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편을 가르고, 차별로 연결될 때가 아닌가? 서울대 나왔다고 우대하고, 임대 단지에 산다고 등굣길을 막는 것처럼 말이다.

비싼 운동화 신었다고 우대하거나 싼 운동화 신었다고 소외시키는 러닝 문화가 있을까? 아, '초보자 카본화 착용 금지' 유머는 있다. '못 달리니까 비싼 운동화 신을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라, '부상 방지를 위해 신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급 높은' 러닝화 신은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고, '급 낮은' 러닝화 신었다고 무시하는 러너가 있을까? 그러니까 달리기의 세계에서 '달리기'가 아니라 '러닝화'로말하려는 사람이?

반년 차 러너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러너라면, 달리기를 즐길 줄 알거나, 기록이 좋거나, 꾸준히 달리거나, 실력에서 확연한 변화를 보이거나, 도전을 멈추지 않거나, 핸디캡이 있음에도 달리거나, 달리기로 좋은 일을 하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선망을 품고 스스로도 그렇게 성장하려 한다고. 러닝화는 잘 달리기 위해 신을 뿐.

20,30대가 달리기를 많이 하면서, 착장에 더 신경 쓸 수는 있겠다. 운동화뿐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예쁘게, 더 멋지게, 더 힙하게 입고 신고 쓰고 차는 것이다(이런 건 눈에 잘 띈다). 그런데 그건 당연하지 않나? 사춘기 학생들이 친구 따라 스타일이 비슷해지고, 엄마들이 자신보다 아이를 치장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처럼. 보통의, 본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들도, 저 '계급도'만 보고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 특정 러닝화를 덜컥 사지는 않을 것 같다. 설사 처음 한 번 그랬을지라도, 계속 달리기를 한다면 다음엔 참고해서 자신에게 맞는 운동화를 찾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달리기를 이어갈 수 없을 테니까.

마음을 주게 되면 쓸 수밖에

ㅡ저도 한강에서 가끔 달려보는데, 요즘 느끼는 게, 예전에 골프 때처럼 요즘 달리기도 험블한 운동이 아니고, 패션이 장난이 아니야. 완전... 풀... 풀로 갖춰놓고...
ㅡ색깔도 깔 맞춤이 돼야 되고, 양말까지...
ㅡ브랜드도 통일시키죠.

ㅡ장비가 비싼 건지 처음엔 몰랐다가 저도 배웠을 거 아니겠어요. 러닝화도 비싸더만요.
ㅡ러닝화도 비싼 건 정말 비싸요.

ㅡ달리려면 팬티도 사야 되고, 벨트도 사야 되고, 반바지 따로 사, 신발 사야지, 머리띠 사야 되고. 양말도 새로 샀어. 안경도...
ㅡ저는 안경까진 아직 안 갔는데, 도구가 뭐가 있냐면, 가민워치를 하나 사줘야 돼. 그리고 샥즈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이어폰이 있어요.
ㅡ아, 골전도! 그것도 엄청 쓰더만... 가민워치에다가 저거 두 개면, 벌써 근 50 썼네.
ㅡ50 더 쓰죠.

ㅡ잘 뛰시는 분들? 다 갖추는 거예요?
ㅡ아, 그게 왜 그러냐면, 양말만 바꿔도 느낌이 달라요. 진짜로. 양말이 뭐라고... (양말 설명 한참) 접지력이 달라요.
ㅡㅋㅋㅋㅋㅋ
ㅡ지금 비웃은 거예요? 코로 웃은 거 같은데?
ㅡ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할 수가 없잖아.
ㅡ이 동네 세계에 그런 게 있다고요~
ㅡ이게 왜 그러냐면, 왜냐. 너무 힘들잖아. 진짜 너무 힘드니까, 그 미세한 차이에 위안을 받는 거야.
ㅡ진짜 그게 있어.
ㅡ애초에 안 달리면 되는 거잖아.
ㅡ건널 수 없는 선이 그어져 있구나. 달리는 세 명과 안 달리는 두 명과.

/팟캐스트 <손에 잡히는 경제>, "러닝이 언제부터 이렇게 비싼 취미가 됐나요" 중에서.

이 대화를 들으면서 나도 좀 웃었다. 그러니까 러닝화뿐 아니라 구매해야 할 것들은 온몸으로 확장되는데, 이에 대해 '달리는 사람'과 '달리지 않는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선'이 정말 있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 원래 마음을 주면 돈, 시간, 에너지 등 내 것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게 되니까.

물론 달리는 사람이라 해도, 사람마다 가치관과 소비습관 그리고 경제적 상황과 여건 등이 다르다. 그에 따라 실제 구매 양상은 다를 것이다. 그래도 각자 왜 그러는지 그 마음은 서로 알아줄 것 같다. 어느 부분에서 만족하거나 실망하고, 또 어느 시점에 시행착오를 겪고 교훈을 얻거나 무감해지는지 역시 다를 테지만.

아, 그나저나 나는 러닝화 쇼핑을 또 해야 한다. 온 가족이 '가족런' 마라톤대회에 나가기로 했는데, 몇 번 연습을 하더니 딸들도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알맞은 러닝화는 필수가 아니겠는가.

▲ '가족런' 신청에 절대 반대했던 둘째가 제일 열심. 달려보니 재밌지? ⓒ 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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