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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이하 취급에 폭력, 굶기까지"... 82년만에 차려진 제사상

일본 조세이탄광 갱구 앞 추모제, 눈물 흘린 유족들... 일본 시민사회 "일 정부의 적극적 해결 노력" 촉구

등록|2024.10.29 11:09 수정|2024.10.29 21:26

▲ 조세이탄광 갱구 앞을 바라보던 전석호(92)씨가 1942년 2월 3일 이곳에서 숨진 어버지를 생각하며 연신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다. ⓒ 조정훈


"아버지 저 왔습니다."

휠체어에 겨우 몸을 기댄 백발의 노인은 이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렁그렁한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옆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해보세요"라고 했지만 말을 잊은 듯 손수건으로 눈물만 닦았다.

바닷물이 반쯤 찬 갱구(탄광 입구)를 바라보고 차려진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올린 전석호(92)씨는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사이 누군가 가져다 놓은 스피커에서 구슬픈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한일 양국의 취재진을 만난 전씨는 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하기 전 가족이 함께 탄광 근처에 살았다고 했다. 사고가 난 후에는 갱구가 막혔고, 그는 매일 이곳을 찾아 울었다며 "가슴이 아파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슴 아파 말이 나오지 않는" 비극의 현장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바닷가 근처에 있는 조세이탄광(長生炭鑛·장생탄광) 입구인 갱구 앞에서 한국과 일본 유족 20여 명이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이곳은 지난 1942년 2월 3일 바닷물이 갱도로 흘러들면서 조선인 노동자 136명을 포함한 183명이 수몰돼 사망한 곳이다.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조세이탄광 갱구가 지난 9월 26일 일본 시민단체의 힘으로 열렸다. 일본 시민단체인 '장생탄광의 물비상(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회(아래 새기는회)'는 조세이탄광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장비를 동원해 찾았다.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진 갱구는 폭 2.2m, 높이 1.6m로 입구를 막고 있던 송판을 깨부수자 물이 쏟아져 나왔다.

▲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입구에서 바라보면 멀리 바닷가에 환기구인 피야 2개가 보인다. 1942년 2월 3일 오전 이곳에서 한국인 136명을 포함한 183명이 수몰돼 숨졌다. ⓒ 조정훈


▲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입구인 갱구. 지난 9월 26일 찾아낸 갱구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돼 있고 바닷물이 반쯤 차 있다. ⓒ 조정훈


한일 양국의 유족들과 시민들이 찾은 이날 갱구 입구는 바닷물이 반쯤 차 있었다.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갱구 안쪽은 금방이라도 희생자들이 살아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바라본 바닷가에는 원형 콘크리트 구조의 환기구인 피야 2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새기는회는 유족들의 뜻을 확인하고 추도식을 준비했다. 추도식은 한일 양국의 시민들과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식 제사와 일본식 제사, 대구에서 온 참배객의 추모의식 순으로 진행됐다. 제단 주변에는 이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한국인 유족회 회원들의 영정사진도 걸렸다.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조세이탄광 입구인 갱구 앞에서 한일 양국의 희생자 유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모여 추모제를 열었다. ⓒ 조정훈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입구인 갱구 앞에 모인 유족들은 82년 만에 갱구를 바라보며 큰절을 올렸다. ⓒ 조정훈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회 공동대표는 개회인사를 통해 "저희는 드디어 갱구를 열고 82년 동안 닫혀 있던 어둠에 빛을 비출 수 있었다"며 "유족들의 염원인 유골 발굴의 희망을 갖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노우에 대표는 "이달 말 유해 발굴을 위해 갱구 안으로 잠수부를 투입할 예정"이라며 "한 조각의 유골이라도 발견되면 일본 정부에 유해 발굴을 위해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물 이하의 취급 받았다"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조세이탄광 갱구 앞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일본인 희생자의 아들인 츠네니시 가쓰히코(82)씨와 그의 아들이 추모하고 있다. ⓒ 조정훈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갱구 앞에서 일본 시민단체인 새기는회는 유족들을 초대해 추모식을 열었다. 새기는회 이노우에 요코 공동대표가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큰절을 올리고 있다. ⓒ 조정훈


"어머니 저는 일본의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 밑에 갱도가 통과하고 있어 바다 위를 다니는 어선의 통통거리는 소리도 들려올 정도의 아주 위험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탈출할 생각입니다..."

이곳에서 희생된 김원달씨의 손자인 김영철씨는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다시 읽었다. 김원달씨는 편지에서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이 편지는 김원달씨의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지난 2005년 4월 새기는회가 만든 <증언자료집>에 실렸다.

김씨는 편지에서 "울타리는 3m정도의 두꺼운 송판으로 둘러져 있고 그 밖을 빼곡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며 "마치 포로수용소와 같은 곳"이라고 묘사했다. 또 "일체의 자유도 없이 외출도 할 수 없는 구속된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말을 하고 일을 거부라도 하면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고 폭력을 당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굶는다"라고 전했다. 그는 "반드시 탈출해서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끝맺었다.

희생자 백한흠씨의 외손자인 강일호씨는 조사를 통해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하나뿐인 외동딸은 평생을 그리움과 보고픔에 아버지를 그리며 이곳 근처를 여러 번 헤매이다 끝내 보지 못하고 하늘에 별이 돼 사랑하는 아버지 곁으로 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유골을 찾아 부녀의 한이라도 풀 수 있게 기대와 염원을 간직하면서 이곳에서 외할아버지 이름을 불러본다"며 "조금만 기다리시면 고향으로, 부모님 곁으로, 사랑하는 딸 곁으로 모시겠다"고 울부짖었다.

"일본 정부, 적극적으로 발굴해 희생자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야"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입구인 갱구 앞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한 보광원 주지 한우스님을 비롯한 한국 추모단 30여 명이 추모하기 위해 연꽃지화와 태극기를 들고 들어오고 있다. ⓒ 조정훈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갱구 앞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춤꾼 박정희씨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진혼무를 추고 있다. ⓒ 조정훈


한국에서 온 참배객들은 미리 준비한 연꽃지화를 헌화한 뒤 큰절을 올리며 추모했다. 춤꾼 박정희씨는 진혼무로 차가운 바다 속에 묻혀 있는 영혼들의 넋을 위로했다. 박정희씨가 진혼무를 추자 이를 지켜보던 유족들과 시민들은 함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참배단 고문인 송의익 전 영남외국어대 교수는 추도시를 통해 "일본 속담에 '냄새나는 물건에 뚜껑을 덮는다'는 말이 있다. 일본은 언제까지 역사의 부끄러움을 감출 것인지 묻고 싶다"며 "유족의 입장에서 희생자가 82년간 어둡고 차가운 바다 속에 잠든 채 방치돼 온 것을 이해할 수 있거나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일본 정부와 지방정부는 수십 년 동안 유해 발굴에 나서지 않고 핑계만 대고 있는 것 같다"며 "유족들도 나이가 들어 한 분, 한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서둘러 조사하고 적극적으로 발굴해 돌려줘야 되지 않느냐"라고 강조했다.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갱구 앞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춤꾼 박정희씨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진혼무를 추고 있다. ⓒ 조정훈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갱구 앞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춤꾼 박정희씨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진혼무를 추고 있다. ⓒ 조정훈


새기는회는 29일과 30일 본갱도가 안전한지를 확인한 후 해안의 피야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갱도 안으로 들어가 유해발굴에 나설 예정이다. 이날 조사 결과를 검토해 1km 유해 발굴에 대한 가능성과 조사 방법 등을 결정하고 유골이 발견되면 DNA 감정도 실시한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조세이탄광 사고 희생자들의 매장 위치와 깊이가 명확하지 않아 발굴작업이 어렵다면서 유해 발굴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하지만 새기는회는 갱구 입구가 열렸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새기는회와 유족들은 유골이 나오면 일본 정부에 직접 발굴을 요구하고 진상 규명과 사과를 요구한다는 계획이다.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뿐 아니라 유족들도 양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양현 장생탄광희생자 대한민국유족회장은 "82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차디찬 바다 속에서 두고 온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강제노동에 혹사당하다 억울하게 희생당하신 분들이기에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고 머리를 숙였다.

양 회장은 "매듭을 묶은 자만이 매듭을 풀 수 있다"며 "일본 정부는 탁상공론처럼 인도주의, 현실주의라는 말에만 집착하지 말고 유족들의 간절한 바람인 유해를 발굴하고 고향에 봉안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촉구했다.

▲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 갱구 앞에서 한일 양국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추모제를 지낸 후 단체 사진을 찍었다. ⓒ 조정훈


일본인 희생자의 아들인 츠네니시 가쓰히코(82)씨는 "사고 나흘 뒤 태어나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적도, 안아본 적도 없다"며 "아버지가 여기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만일 유골을 찾는다면 아버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조세이탄광은 일본 정부의 노동 동원 계획에 따라 1939년부터 1942년 사이 한반도에서 1258명이 강제로 동원됐다. 조선인들이 많아 '조선탄광'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가혹한 환경에서 이들은 하루 12시간씩 2교대로 쉬지 않고 석탄을 채굴했고 몸이 아프다거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30분쯤 갱도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한국인 136명을 포함한 18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누군가에 의해 갱구는 폐쇄됐고 82년 동안 이들은 차가운 바다 속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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