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뀔 때마다 추락 반복... KBS는 포기할 수 없다
[민언련 칼럼] 적대와 혐오로 얼룩져가는 대한민국, 더 절실해진 공영언론 역할
민언련 칼럼은 시민사회·언론계 이슈에 대한 현실 진단과 언론 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글입니다. 시민들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기자말]
▲ 2023년 여름 극우성향 단체들이 서울 영등포구 KBS 앞에 근조화환을 설치했다. ⓒ 오마이뉴스
2023년, 지난해 여름 KBS를 둘러싼 여러 장면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대통령실은 방송법 시행령을 개정해 한국전력이 더 이상 TV수신료를 통합징수할 수 없게 했고, 공영방송 KBS와 EBS는 일시에 공적 재원에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됐다.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다. 공정한 방송을 만들자고 142일간 파업한 지 불과 5년 만에 KBS는 다시 벼랑 끝에 섰다. 더구나 이번엔 KBS가 정말 문을 닫을 것만 같았다. 그즈음 여러 스트레스가 겹치며 유명을 달리한 직원도 있다. 그는 생전 동료들에게 회사 상황에 대한 불안을 계속 토로했다고 한다. 집단적 공황이 내려앉았던 지난 여름, 우린 좀체 일어나지 못했다.
그 틈을 타 2023년 11월 1TV <더라이브>, 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와 <최경영의 최강시사>가 폐지됐다. 아직 임명장도 받지 않은 새 편성본부장이 일방적으로 프로그램 편성을 삭제한 것이다. 편성삭제는 일시적이었으나 직후 해당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작별 인사조차 못하고 사라졌으니, 기실 낙하산 사장과 편성본부장 취임 하루 전 폐지된 셈이다. 이제껏 보지 못한 무도함이었다.
올해 3월 이제원 제작1본부장은 세월호 10주기 다큐 불방을 결정했다. 총선 후 방송되는 다큐가 총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방영돼선 안 된다는 어불성설에 시사교양 PD들은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일제히 기명 성명을 냈다. 공포로 얼어붙었던 KBS에 피케팅을 하는 직원들의 외침이 처음 터져 나왔다. 이제원 제작1본부장은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고, 공정성 문제 등을 논의하는 사내 기구인 TV위원회와 공정방송위원회를 여는 것도 거부했다. 그가 취임한 연초부터 지금까지 쭉 말이다.
'조화 둘러싸기' 이후 끊임없는 공영방송 죽이기
▲ 미디어X 기자의 <역사저널 그날> 제작진에 대한 부적절한 질문을 다룬 MBC 뉴스데스크 5월 28일 보도 갈무리 화면 ⓒ 민주언론시민연합
싸움의 과정에서 제작진에 대한 모처의 협박도 있었다. 이제원 제작1본부장이 <역사저널 그날>에 국민의힘 미디어특위 위원이자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낸 조수빈씨를 진행자로 앉히려 했을 때, 제작진들은 점심시간에 본부장실 앞에 서서 침묵으로 항의한 바 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미디어엑스'라는 매체에서 담당 PD들에게 전화를 걸어 '왜 근무 시간에 피케팅을 했느냐?'고 물은 것이다.
난생 처음 듣는 매체 이름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공언련TV'란 섹션이 나왔다. 공정언론국민연대, 약칭 '공언련'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과 고대영·김인규·길환영 등 KBS 전임 낙하산 사장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진 단체다. 공언련은 본인들의 진영논리에 맞지 않는 프로그램들을 공격해 왔다. 제작진의 똑부러진 대응에 해당 매체는 다시 전화하지 못했으나, 우리가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를 또 한 번 확인한 사건이었다.
우리 사회에 극단적인 목소리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 파장은 공영방송에도 미친다. 이른바 '조화 투쟁'으로 시작된 공영방송 죽이기 작전은 여전히 극우성향 단체의 지원 속에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정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불공정 프레임을 씌우고 견제의 목소리를 없애려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공영방송을 없애려는 비상식 앞에서 다시금 깨달았다. 적대와 혐오로 얼룩져가는 대한민국에 공영언론 역할이 더욱 절실해졌다는 사실을.
공영방송 핵심조건을 지키기 위하여
▲ 10월 23일 KBS 본관 앞에서 열린 ‘KBS 사장 불법선출 중단 및 위법적 이사회 퇴진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권영길 언론노련 초대위원장(왼쪽)과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이 발언 중이다. ⓒ 민주언론시민연합
그래서 지칠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어 온 싸움. 이번 싸움도 결코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아득하기도 하지만, 공영방송 제작자로서 견뎌야 하는 일이다. 수신료로 월급을 받는 자들은 공영방송의 핵심조건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마땅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우리 곁에 서서 싸움을 응원해주고 있지 않은가.
2011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오를 합리화한 다큐를 내보냈던 KBS는 올해 여름에도 그의 독재를 미화한 다큐 <기적의 시작>을 광복절에 방영했다. 평생 민주화투쟁을 해온 원로인사들은 굽은 등을 하고 또 KBS를 찾아왔다. 얼마나 KBS가 미울까 싶으면서도 그 안에서 싸우는 이들을 기어코 달리 봐주려는 국민들은 여전히 있다.
당분간 우리는 판판이 질 것이다. 성명서를 천 장 만 장을 써도, 목이 터져라 피케팅을 해도, 낙하산 MC를 철회시키거나 프로그램을 살려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더러 지칠 때, 몇 번이고 우리 곁에 다시 서준 국민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낙하산 박민 사장이 KBS에 들어온 뒤 시사교양 프로그램만 4개가 폐지됐다. 프로그램을 만들던 작가, 조연출 등 프리랜서 제작진들도 일자리를 잃었다. 부끄러운 가장의 마음으로, 우리는 이 싸움의 흔적을 딛고 걸어 나갈 것이다. 이 희생들이 헛되지 않게. 지난 10월 23일, 낙하산 박민 사장은 연임 도전에 실패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www.ccdm.or.kr), 슬로우뉴스에도 실립니다.글쓴이는 조애진(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수석부본부장·시사교양PD)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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