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4명의 실험... 이리 완성도 높을 줄이야
[넘버링 무비 406] 영화 <더 킬러스>
▲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 (주)루믹스미디어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앤솔로지, 서로 다른 여러 작품을 하나의 작품집 아래 모아놓은 영화를 접하기는 쉽지 않다. 각각의 작품 사이를 연결할 만한 지점을 만들어내기도 용이하지 않거니와 창작자들이 가진 저마다의 개성과 스타일이 하나의 유사한 그림을 완성해 내기가 어려운 탓이다. 활자로만 이루어진 문학 작품의 경우에도 어려움이 많다고 하는데, 직관적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이게 되는 영화는 더욱 그렇다.
출발점은 총괄 크리에이터를 맡은 이명세 감독이다. 그는 이번 작품을 기획하게 된 계기로 '지속 가능한 영화 작업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한다. 창작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면서 자본의 문제와도 함께 성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은 그가 머물렀던 1930년대의 분위기를 그려낼 수 있는 장점과 더불어 각자의 스타일이 담긴 4편의 작품으로도 한 편의 영화와 같은 느낌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그는 말한다.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한 김종관·노덕·장항준 감독 역시 서로 다른 스타일로 하나의 영화를 완성할 수 있는 기획에 마음이 이끌렸다고 말한다. 업계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다고 알려진 이명세 감독과 함께 작업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하나의 이유였다. 각각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과 표현에 대해서는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려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내는 것. 네 편의 작품이 더해져 완성된 2시간 남짓의 영화 <더 킬러스>는 그렇게 완성됐다.
▲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 (주)루믹스미디어
02.
김종관 감독의 <변신>에는 등에 칼이 꽂힌 채 눈을 뜨게 된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뱀파이어와 흡혈의 소재로 한 일종의 복수극처럼도 보이는 이 작품은 그동안 감독이 그려왔던 세계관을 생각하면 다소 의외의 결과물을 완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7), <조제>(2020) 등의 작품을 통해 보여줬던 차분하면서도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번 작품은 감독의 어떤 변신처럼 다가온다. 그에게도 이렇게 역동적이고 뜨거운 면모가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다.
두 번째 이야기인 <업자들>은 <연애의 온도>(2013), <특종 : 량첸살인기>(2024)의 노덕 감독이 선보이는 오랜만의 스크린 작품이다.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의뢰된 살인 청부가 하청의 하청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코미디. 네 편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현실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풍자와 익살스러움을 모두 잃지 않은, 빛나는 작품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놓인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 압권이다.
장항준 감독은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를 통해 최근 연출했던 또 다른 작품 <오픈 더 도어>(2023)에서와 같이 서사 속에 숨겨진 비밀 하나를 동력으로 삼아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서스펜스의 힘은 그가 뛰어난 감독이라는 사실을 다시 입증이라도 하듯 탄탄한 긴장감과 강렬한 에너지를 선보인다. 어떤 상상을 하더라도 이 작품에서는 분명히 한 번 길을 잃고 그의 지휘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는 영화에 대한 그의 오랜 열망이 오롯이 담긴, 그가 이뤄온 스타일리시 무비의 정수와도 같은 작품이다. 첫인상은 서사보다 이미지와 감독 특유의 스타일에 기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미국 대공황기의 풍경을 담아 시대의 은유를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범법자와 추방자들이 모인 지하 세계 디아스포라 시티에 매일 같은 시각,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이들을 찾아온 두 킬러의 이야기로 흑백의 무성영화다.
▲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 (주)루믹스미디어
03.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 <더 킬러스> 속 네 작품 모두에서 심은경이라는 배우의 다양한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최근 작품이었던 <신문기자>(2019), <블루 아워>(2020) 등의 작품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변신>의 주은에서부터 <무성영화>의 선샤인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역할과 모습으로 스스로가 작품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가 된다. 배우 스스로는 하나의 영화 안에서 서로 다른 4개의 역할을 연기할 기회였기 때문에 처음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한다.
심은경 배우가 이번 프로젝트의 중심축이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명세 감독과의 인연이 컸다. 과거 또 다른 프로젝트에서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던 감독은 이번 프로젝트의 특성상 한 배우가 연결점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 심은경 배우를 떠올렸다고 한다. 김종관 감독과의 인연도 있다. 감독의 차기작인 <낮과 밤은 서로에게>의 주연으로 참여하고자 준비하고 있던 상황에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됐다.
한편, 배우의 변신과 더불어 하나 더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인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 1942)을 각각의 감독이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찾아보는 일이다. 미국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작가의 작품을 네 명의 감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스크린 위에 투영해 낸다. 그 자체를 세트로 활용하기도 하고, 작품이 담긴 액자 그대로 하나의 소품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 (주)루믹스미디어
04.
영화 <더 킬러스>는 확실히 전에 없던 영화처럼 느껴진다. 4명의 감독이 각자의 스타일로, 그것도 장르적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라는 것이 특히 그렇다. 고백하자면,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만의 명확한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화합과 동화보다는 분절과 이질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귀하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감독 모두는 각자 깨닫고 얻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노덕 감독의 경우에는 인물 모두를 균형감 있게 다루는, 앙상블의 영역에 대한 부분이다. 그 어려움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여러 인물을 다루는 경험으로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됐다고 한다. 개인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거대한 자본, 익숙한 셋업과 내러티브가 아니라도 영화는 이처럼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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