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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과 구례에서 찾은 여순 사건 유적지

등록|2024.10.30 10:38 수정|2024.10.30 10:38
지난 주말 국립순천대학교 10.19연구소에 진행한 광양·구례 지역의 10.19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3사건의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 여순10.19로 인해서 여수·순천지역을 비롯하여 , 이번 기행지인 광양과 구례에서도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오전 일정인 광양의 유적지에 관한 안내자는 <함께하는 남도학연구원>의 임송본 이사였다. 그는 우리를 광양의 주령골로 안내했다. 주령골은 반송쟁이라도 불린다. 1948년 10월 20일에는 광양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순천으로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하지만 순천에 진입하기도 전에 봉기군의 기습을 받아 3~4명의 희생자를 내고 철수하였다. 광양경찰서로 복귀한 경찰들은 좌익혐의자로 유치장에 수감 중이던 사람들을 주령골로 끌고 가서 학살했다. 이것은 광양에서 일어난 학살의 시작이었다.

특히 당시 호남일보사의 기자였던 이경모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학살의 장면을 촬영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진은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지게에 실린 시신 앞에 누이가 통곡하는 모습과 같은 사진들이다.

광양10.19추모비광양10.19추모비 ⓒ 여경수


우리는 광양 시내에 있는 우산공원의 얕은 오르막을 따라 걸어 올라가서 광양10.19추모비를 찾아갔다. 광양시의 군화가 동백꽃인데, 광양10.19추모비에는 동백꽃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10.19와 관련된 사진들이 알림판에 담겨있다.

오후부터 시작된 구례 일정의 안내자는 10.19연구소 전 연구원 문수현씨였다. 그는 이동 중에 간문초등학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48년 11월 12일 새벽에 간문초등학교에 주둔한 진압군들이 봉기군들이 습격받고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압군들이 복귀해서 다수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 산동애가 노래비 ⓒ 여경수


우리는 산수유 사랑공원에 있는 산동애가비를 찾았다. 10.19 당시 산동면 상관마을에 살던 19세의 백순례가 좌익 혐의로 끌려가면서 산동애가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순례는 오빠 셋이 있는 막내딸이었다. 그런데 큰 오빠 백남승은 일제 징용 당시 사망하고, 1948년 11월에는 좌익혐의로 두 오빠와 백순례는 군경에 체포되었다. 작은오빠가 먼저 희생되었다. 막내오빠마저 처형될 위기에 놓이자, 어머니가 군인들에게 집안의 대를 잇도록 막내아들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결국은 백순례는 막내오빠를 대신해서 진압군들에게 학살당했다.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이 산동애가를 통해서 10.19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사건들의 현장을 찾아보니, 나는 앞으로 이들 현장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진실규명,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다시는 국가폭력이 일어나는 일을 방지하는 방안들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10.19연구소는 지난 1948년도에 발생한 여순(10.19)사건을 비롯하여 국가폭력을 연구하는 국립순천대학교 소속 연구소이다. 여순(10.19)사건의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국가폭력이 다수 발생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기존의 연구소 명칭인 여순연구소를 10.19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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