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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난영에서 고두심 거쳐 영화 <지슬>까지

[서평] 김종원 평론가의 <제주영화사>

등록|2024.10.30 16:11 수정|2024.11.01 08:23
해방 이전 전라남도의 행정구역이었던 제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기는 1922년 순회 활동사진대에 의해서였다. 1903년 조선에 활동사진이 들어오고 한국영화의 원년으로 평가받는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1919년 단성사에서 선보인 후 3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1923년부터 민간 중심의 활동사진 상영회가 개최됐고, 1930년에는 일본인이 제주 최초의 극장 '창심관'을 개관한다. 활동사진과 공연이 선보였던 창심관을 통해 데뷔한 가수가 있었으나 바로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었다.

창심관에는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과 함께 변사 역할을 하던 제주사람 김성택이 있었다. 영어교사였던 김성택은 자신이 번역한 <아기 예수> <예수의 흔적> 같은 슬라이드 사진과 단편영화를 도민들에게 보여주고 해설하는 일을 하다가 창심관과 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성택은 1930년대 오사카에서 나운규 감독의 <사랑을 찾아서> 변사로 나섰다가 흥분한 나머지 한국말로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고 필름을 압수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사랑을 찾아서>는 나라 잃은 유랑민의 비극을 그린 영화로 원제가 <두만강을 찾아서>였으나 검열 과정에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제주 출신 최초 영화인인으로 평가되는 김성택은 1970년대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등장해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던 가수 혜은이(본명 김승주)의 부친이었다.

제주영화의 모든 것

▲ 김종원 평론가의 <제주영화사> ⓒ 한상언영화연구소


원로평론가 김종원 선생이 최근 발간한 <제주영화사>에는 제주영화의 시작과 현재까지의 과정 및 여러 뒷이야기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제주 출신 최초의 배우와 제작자, 제주에서 처음 촬영된 영화를 비롯해 제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등등 한국영화에서 제주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담아 놨다.

<제주영화사>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전후 제주영화사의 중심은 극장이었다. 대도시 중심으로 영화사들이 있었으나, 제주는 소비하는 곳이었기에 극장이 제주영화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활동사진 관람 욕구가 커지면서 흥행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창심관에 이어 해방 직전인 1940년대 초반에는 조일구락부극장이 개관했고, 제주극장과 현대극장으로 이름이 바뀌며 1987년까지 이어졌다.

제주 출신 최초의 배우는 1920년대에 후반에 등장한 강석우 강석연 남매였는데, 윤백남 감독 <정의는 이긴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강석연 배우는 한국농구의 원로 방열 선생의 어머니다.

제주를 담은 최초의 영화는 1946년 7월 국도극장에서 상영된 <제주의 풍토기>으로 조선영화사 뉴스반이 한라산 학술조사대와 동행해 촬영한 것이었다. 이후 한국전쟁 전후 제주와 관련된 영화는 4.3 항쟁이 주된 소재가 된다.

1948년 미군 통신부대 촬영팀이 14분 분량 기록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를 만들었고, 1950년에는 4.3을 기록한 <한라산전투기>가 부산 부민관에서 상영됐다. 제주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는 1953년 제주경찰국에 제작한 <한라산에 봄 오다>였다. 이 역시도 산으로 피신한 야산대의 귀순을 독려하는 선무공작용 기록영화였다.

제주영화사의 시작은 독립영화

한국영화에서 제주영화가 부각 된 것은 2013년 오멸 감독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이 계기였다. 4.3 항쟁을 미학적 화면으로 그린 독립영화 <지슬>은 2012년 부산영화제를 통해 주목받은 후 이듬해 3월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앞서 1992년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 굴의 슬픈 노래>로 싹트기 시작해 2003년 김경율 감독의 <끝나지 않은 세월>로 4.3.항쟁을 그리려 했던 제주 독립영화가 이뤄낸 결실이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4.3과 제주의 역사성이 영화를 통해 구현된 것이었다.

보는 영화에서 만드는 영화로 제주영화의 지형을 변화시킨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4.3 항쟁 진상규명 요구가 높아졌다. 의식있는 영화인들이 이를 발판 삼아 제주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된 것이다.

저자 역시 책에서 '제주영화사'의 새로운 시작을 독립영화로 평가하고 있다.

'제주 영화역사에서 독립영화가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는 참으로 크다. 영화제작의 불모지에서 오직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는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제주의 독립영화인들은 일찍이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자본과 시장, 인적 등 여러 여건이 따르지 않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몸을 던져 시나리오를 쓰고 카메라를 둘러메고 촬영 현장을 뛰어다닌 결과가 이렇게 알찬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주 현지인에 의한 영화의 제작은 그것이 비록 독립영화의 형식을 빌린 것이라 해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제주영화사는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그 이전의 제주영화 발자취는 외지로 나간 이 지역 출신 영화인들의 활동을 기록하는 수준에 머문 아쉬움과 한계가 있었다. 제주 독립영화인들의 왕성한 활동에 자극받아 유능한 신인들이 나올 수 있게 된다면 이는 앞서 독립영화에 눈 뜬 김경률, 오멸 감독 등이 애써 심어놓은 묘종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제주영화사>에는 '그 이전의 제주영화 발자취'들이 주로 담겨 있다.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제주신보사를 강제로 접수해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던 김묵 감독에서부터 한국전쟁 때 제주로도 피란해 정착한 임원식 감독과 두 아들 임종호, 임종재 감독, 제주에 박물관을 만든 신영균 배우, 서귀포 안던면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장선우 감독, 많은 영화에 출연했던 한태일 배우, 70년대 하이틴 영화의 기수였던 문여송 감독, 국민 엄마로 불리는 고두심 배우, 제주 한림에서 태어난 김희애 배우 등등 수많은 제주 영화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1980년대 한국영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나섰던 양윤모 평론가, 현재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양윤호 감독, 한국영화감독협회 김종진 감독, 과속스캔들 양형철 감독, 임흥순 감독까지 다양한 제주 영화인의 출연작을 망라했다. 제주영화사이기도 하지만 제주영화인 인명사전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 책의 특징이다.

▲ 지난 10월 23일~27일까지 열린 15회 제주프랑스영화제에 참석해 <제주영화사> 북토크를 하고 있는 김종원 평론가 ⓒ 제주프랑스영화제 제공


구순 바라보는 영원한 현역 평론가

<제주영화사>가 갖는 의미는 영원한 현역을 강조하는 평론계의 살아있는 역사가 제주의 영화역사를 정리했다는 점에 있다. 1937년생으로 구순을 바라보는 김종원 평론가는 1960년대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만들어질 때 핵심이었다.

제주를 대표하는 1세대 평론가로 고향에 대한 애정과 후세에 전하고 싶은 영화역사학자로서의 의무감이 책 곳곳에 배어 있다. 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해방 전후 제주영화의 이야기들이 한국영화사의 소중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제주영상위원회 출범 과정과 제주아태영화제 그리고 지역에서 열리는 유일한 특정국가 영화제인 제주프랑스영화제까지, 제주에서 만들어졌거나 개최된 행사의 전개 과정도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다.

배타성 강한 섬 지역에서 제주 태생이 아닌 외지인을 따로 구분하는 게 일반적인데, 제주에 정착한 영화인들도 제주영화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도 특별하다. 제주영화라는 큰 틀에서 제주와 인연이 있는 모든 영화인 아우르고 있다.

<제주영화사>는 출간 과정에서 다소 곡절이 있었다. 2008년 당시 사단법인 제주영상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2015년 원고가 완성됐으나, 제주영상위의 이름이 바뀌고 업무가 변동되는 과정에서 출간이 되지 않고 긴 시간 잠들어 있었다. 한국영화사 연구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한상언영화연구소의 노력으로 1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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