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가르치는 변호사의 꿈 "기차 타고 북조선 거쳐 한국으로"
[사수만보] 고려인 민족학교에서 북 가르치는 고려인 4세 김 발레리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계절의 노래'는 봄·여름·가을·겨울을 열다섯 꼭지로 나눠 춤과 북, 노래로 표현했는데 마지막 장은 '강강술래'로서 아리랑 가무단·화랑북팀·리두가 무용단이 모두 나와 열정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 어제 '계절의 노래'가 아주 훌륭했다. 관중의 박수로 극장이 떠나가는 줄 알았다.
"우리도 감격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무대 뒤에서 학생들과 얼싸안고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김 발레리는 어제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랑 가무단과 화랑북팀의 학생들은 방과 후 교실에서 만나 호흡을 맞춘 정도이고, 리두가 무용단과는 겨우 세 번 정도 리허설을 했을 뿐이니, 실수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단다. 게다가 고려인 이주 1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여서 마음의 부담이 컸는데 모든 관중이 일어서서 오랫동안 박수를 보내고 앙코르를 청했으니 여운이 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 계절의 노래 중 화랑북춤팀의 공연. 맨 가운데 넥타이를 맨 남자가 김 발레리다. ⓒ 민병래
- 고려인 민족학교는 한국에서 잘 모른다. 어떤 곳인가.
"연해주에서 한글과 우리 민족문화를 가르치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곳이죠."
고려인 민족학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에 김 발레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뭇 진지해졌다. 그에게 학교는 누구보다 특별한데 바로 교장 선생님 김 발레리아가 그의 고모이고 우리 북춤에 눈을 뜨게 해준 스승이기 때문이다.
고려인 민족사회 재건 꿈꾼 고모이자 스승 김 발레리아
교장 김 발레리아는 고려인 3세로 소련이 해체될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김 발레리의 아버지가 터를 잡고 있던 연해주로 건너왔다. 중앙아시아 일대에 민족주의 기운이 고조되며 소수민족인 고려인이 핍박받게 된 까닭에서다.
어린 시절 김 발레리아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극장 배우들의 순회공연, 가을이면 어김없이 먼 길을 찾아와 심청가와 춘향가를 부르고 우리 가락을 노래했다. 동네 사람들은 해마다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아무리 바빠도 모두 모여 돼지를 잡고 아리랑을 부르며 흥겨운 잔치를 벌였다. 극단이 떠날 때는 내년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면서도 꼭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두 번째는 아버지의 눈물. 어느 날 아버지는 논일을 마치고 돌아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저 집시 아이들도 자기 말을 하는데 어찌 우리 고려인 아이들은 소련 말밖에 모르냐" 하면서 한탄했다.
김 발레리아의 어린 마음에 이 두 가지 기억이 씨를 뿌려 자신이 크면 민족학교를 세우겠다는 꿈을 꾸게 했다. 마침 그가 전공한 도서관학은 문화대학에 소속되어 있어서 예술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 청년 시절에 익힌 예술적 감수성을 갖고 돌아온 연해주에서 고려인 민족사회를 재건하고 우리 전통예술을 이어가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2019년에 김 발레리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려인 민족학교'를 세웠다. 고려인 4세, 5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글과 우리 전통예술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2층 건물을 빌려 200명의 학생을 모아 방과후 교실로 출발했다. 연해주 정부로부터 민족교육기관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재정 지원은 없어 김 발레리아 혼자 힘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야 했다. 학교가 세워진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며 재외동포청과 인천시교육청, 한국의 시민사회가 조금씩 지원해 주고 있으나 임대료, 교사 월급, 교재·교구비는 늘 부족했다.
하필이면 민족학교가 문을 열고 얼마 안 돼 코로나가 터지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이어져 학교를 둘러싼 사정은 나빠져만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 한 시간 반씩 운영되는 한글수업 참여자에게 1500루블(2만 6천 원)의 수업료를 받으나 턱없이 모자랄 뿐이다.
고모의 뜻 받들어 북 가르치는 선생으로 합류
김 발레리는 고모의 뜻을 존중해 개교 때부터 북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합류했으나 학교의 사정과 고모의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으니 그의 마음 또한 무겁긴 마찬가지다.
- 어떤 계기로 민족학교에서 북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건가요?
"중학교 때 우리 북춤을 알게 되었죠."
김 발레리는 93년생으로 올해 서른둘, 우수리스크에서 변호사 업무를 하고 있다. 어쩌다 그는 민족예술에 관심을 갖고 선생 역할까지 떠맡았을까? 사건은 열다섯 살에 일어났는데 고모 김 발레리아 집에서 3개월 동안 산 적이 있다. 고모는 그때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만든 '고려인민족자치회의 문화회관'에서 북과 춤 같은 우리 예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 계절의 노래 중 김 발레리의 단독 공연 모습. 그는 고려인 민족학교의 북 선생이다. ⓒ 민병래
김 발레리도 마침 중학교에서 친구와 팀을 만들어 아코디언과 기타를 치며 서툴게나마 음악 활동을 하던 때라 우리 예술을 허투루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어느결에 낯설고 신선한 우리 가락에 젖어들어 아예 회관에서 살다시피했다. 김 발레리는 특히 우리 북에 흠뻑 빠져 20여 년 가까운 지금까지 북채를 놓지 않았다. 기량을 높이려 고모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유튜브를 통해 우리의 다양한 북 춤을 배우고 따라 했다.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문제는 학교의 사정, 재정 형편이 어렵다는 소문이 돌아 요즘은 학생을 모집하는 데도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칫 연해주 동포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글교육마당, 민족예술 배움터가 사라지지 않을까 근심이 크다. 그래서 학교가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번 160주년 공연에 더 심혈을 기울였는지도 모른다.
고려인 민족학교의 어려운 사정을 잠시 뒤로 물리고 화제를 바꿔보았다. 음악을 좋아하니 K-팝에도 관심 있는지, 있으면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태양의 노래와 춤이 좋았어요."
한국의 전통문화에 눈을 뜨면서 그는 자연스레 한국의 대중음악에도 관심이 미쳤다. 그중에서도 태양은 단연 으뜸. 그의 춤과 랩을 수없이 따라 했다. 특히 '웨딩드레스'를 좋아했다. 그는 한국의 전통 가락과 K-팝을 몸에 익히며 조국을 동경하던 중 2016년에 김 발레리아의 딸인 사촌누나와 짧게나마 한국을 다녀갈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 도착해 제일 놀란 것은 고층 빌딩과 반듯한 거리, 깨끗한 지하철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제외한 우수리스크나 하바로스크 등 연해주의 많은 도시에는 고층건물이 많지 않고 도로 사정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나흘 동안 홍대와 경복궁을 둘러보며 고국의 내음을 흠씬 맡고 한류의 여러 분위기를 체험했다. 고려인에게 우리 음식문화가 내려오나 한국에서 맛본 비빔밥, 육개장은 특별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의 맛이 얼마나 깊은지 십분 느꼈다고 한다.
"기차 타고 북조선 거쳐 한국으로 가는 날 꿈꾼다"
문득 궁금했다. 러시아 국적인 그가 남녁땅만이 아니라 북녘땅도 다녀왔는지. 그는 아직이라며 "기차 타고 북조선을 거쳐 한국으로 가는 날을 꿈꾼다"는 가슴 속 바람을 말했다. 연해주의 우수리스크는 9800km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붙어있고 만주횡단열차가 지나가는 곳이다. 우리에게도 인연이 깊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발해의 15부 가운데 하나인 솔빈부가 있던 곳이다.
▲ 기차타고 평양을 거쳐 서울로 오고 싶다는 김 발레리. 그는 고려인 민족학교의 북 선생이다. ⓒ 민병래
연해주는 1863년 함경도 농민이 최초로 이주한 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즈음에는 우리 동포의 수가 10여만 명을 넘어섰다. 조선인은 이 차가운 땅에 벼농사를 지어 옥토로 만들었다. 나아가 이 땅에서 우리 동포들은 13도의군·성명회·권업회 등 항일결사를 만들어 민족해방전쟁에 나섰다. 우수리스크는 이 무장독립전쟁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런 우수리스크에서 두만강에 놓여있는 조선-러시아 우정의 다리까지가 250km 남짓, 기차로 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동해안을 따라 원산으로 가, 평양과 원산을 오가는 기차를 탄 다음 다시 서울로 향하면, 아침에 출발해 저녁 무렵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는 이렇게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 발레리의 얘기에 따르면 남북이 화합하고 교류가 잘 될 때는 고려인 동포의 어깨에도 신바람이 났단다. 반면 남북이 으르렁거리고 포탄이 오가면 뒤에서 "쟤들은 왜 저래"하는 수군거림이 오갔다. 연해주에는 고려인만이 아니라 한국과 조선에서 온 상사주재원이나 노무자들이 있으니 아무래도 조국이 평화 공존 분위기가 되면 고려인 동포사회와 연해주에 체류하는 남북 주민사이에도 스스럼 없이 교류가 이루어졌단다. 하지만 지금은 차가운 분위기만 감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러시아 정책으로 한국과 교류도 소원해져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비행기 편이 끊어진 상태다. 지금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가려면 강원도 동해시에서 배를 타거나 중국 길림성의 연길공항에서 내려 중-러 국경을 넘는 버스를 타고 훈춘 세관을 통과해 크라스키노야를 거쳐야 한다. 비행기로 인천에서 2시간이 안 되는 거리를 멀리 돌아가는 셈이다. 코로나 전에는 한국 관광객이 연 30만 명 이상이나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아 거리마다 한국어 안내판이 즐비하고 중심 거리에 LG 다리가 있을 정도로 경제 교류가 활발했는데 지금은 서리가 내려버렸다.
김 발레리는 고려인 사회에서 소중한 인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해 그 어렵다는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지금 러시아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살아갈 기반은 마련한 셈이다. 자신의 생활은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으나 그는 고려인 4세로서 조국과 인연을 놓지 않으려 한다. 아니 가늘어지는 끈을 동아줄로 바꾸려 노력한다.
김 발레리가 헤어질 때 다시금 힘주어 말한 두 마디에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다.
"우수리스크에서 기차 타고 평양을 거쳐 서울로 가고 싶어요. 고려인 민족학교가 살아남아 4세, 5세 청소년에게 한글과 우리 예술을 계속 가르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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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23.03.10.(최수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