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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탓에 놓칠 뻔했던 좋은 책, <슬픔의 방문>

[서평]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 재능... 장일호 에세이

등록|2024.10.31 17:09 수정|2024.10.31 17:09

▲ 장일호가 쓴 <슬픔의 방문> 겉 표지 ⓒ 낮은산


가슴에 늘 슬픔을 품고 살아가는 저는 이 책 제목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정한 책이 아니었다면, 스스로 <슬픔의 방문> 같은 제목의 책을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사IN 기자로 일하는 저자는 글 쓰는 것이 직업이었지만, "쓰는 것보다 더 많이 읽는 독자였다"고 합니다. 쓰는 일은 재능이 필요하지만, 읽는 것은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재능을 탓할 필요도 없었으며, 책장을 펼치면 누적된 지혜를 만날 수 있어 읽는 것이 더 행복했다고 합니다.

"행간에 숨기도 하고, 행과 행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세상과 몇 번이고 거듭 화해 했다. 무언가를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는 일이 많아지는 게 좋았다."(본문 중에서)

독자인 저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자가 책을 읽으면서 세상과 화해하는 과정을 글로 써서 이 책이 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저자가 여러 이유로 세상과 날을 새우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나면,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라 화해하는 과정이라고 쓴 것은 까닭을 알게 됩니다. 하고 싶은 기자 일을 하며, 나답게 살고 싶어 날을 세웠던 저자는 결혼도 남다르게 하였습니다.

"애인과 함께 살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결혼'을 둘러싼 거의 모든 절차를 생략하기로 했다. 우리에게 결혼은 집안의 일이 아닌 '두 사람의 일'이었고, 가족의 허락은 필요치 않았다. 예식이 없으니 청첩장도 찍지 않았고, 드레스도 입지 않았다."(본문 중에서)

저 또한 제 자식이 결혼해도 될 나이가 되니 이런 문장이 눈에 띕니다. 아들이 만약 이런 결혼식을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분명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하겠지만, 서운함은 남을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아들 혼례를 먼저 치른 선배가 "내가 할 건 당일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밖에 없더라" 하는 하소연을 들으며, 당연한 말인데도 그 서운함에 함께 공감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일'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일반화되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는 네 나이를 겪어 봤으니...내가 이해하는게 쉬울거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경험하는 갈등에 관한 이야기도 확실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앞서 읽었던 책에 나오는 인상 깊은 구절을 인용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글을 써 나갑니다.

"아무래도 나는 네 나이를 겪어 봤으니까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완벽하게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그 반대보다는 쉬울 거야, 그러니까 윗세대가 이해하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수신지 작가의 <노땡큐: 며느라기 코멘터리> 중에서)

시어머니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이 싸워서 얻은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료 여성들이 끊임없이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면서 함께 얻은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이가 들으가면서 다음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는 지 새겨보게 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스무 살이 넘은 후에 40년 가까이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며 살아온 저는 장일호 작가의 인용문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데런 맥가비가 쓴 <가난 사파리>라는 책에서 인용한 구절인데요. 저는 앞으로 이 구절을 제대로 읽기 위해 <가난 사파리>를 읽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우리가 먼저 정직해지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생에는 없을 것이다. 이 체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갈 것이고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데런 맥가비가 쓴 <가난 사파리> 중에서)

저 역시 체제가 바뀔 수 있으리라 믿었던 때도 있었고, 권력이 바뀌면 확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제 평생에 혁명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동감하지만, 이 불합리한 세상과 구조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없습니다.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 변화가 절실한 사람들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가는 길의 끝에 더 나은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싫어하는 건 빨리 잊고, 좋아하는 건 늘려야

그때까지 세상만 탓하지도 말고 무기력해지지도 말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텐데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 책을 읽으며 저는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본문 중에서)

하지만 싫어하는 것들을 금방 잊어버리는 일이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경험이 많을텐데요. 뇌과학자들은 사람의 뇌는 원래부터 나쁜 걸 오래 기억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부러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이는 것이 필요하겠더군요.

친구나 지인들은 "넌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잖아."하고 부러워하지만, 정작 저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긴장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버킷 리스트에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채워야겠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대하는 저자 장일호의 낙관적인 태도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더군요. "시대의 안과 밖을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말이 인상 깊었던 건, 지역에서 서른 해 넘게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아가는 저도 어려운 현장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방문'이라는 제목 때문에 놓칠 뻔했던 좋은 책을 '독서 모임' 덕분에 잘 읽고 마음에 채웠습니다. 책을 읽어도 제 마음에 담긴 슬픔이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지만, '슬픔'이라는 단어 때문에 지레 겁먹지 말자는 결심은 하게 되었습니다.

스물두 꼭지의 에세이는 모두 자신이 앞서 읽었던 책에 나온 문장들이 스며 있는데요. 따옴표가 없으면 다른 사람의 글이란 걸 절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저자의 글솜씨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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