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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에서 시작됐다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울분 삭이던 한국 학생 분노 폭발

등록|2024.11.01 09:40 수정|2024.11.01 10:16

▲ 밤에 만난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댕기머리 사건 현장인 옛 나주역 앞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나는 피가 머리로 역류하는 분노를 느꼈다. 가뜩이나 그놈들과 한 차에 통학하면서도 민족 감정으로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여 지내온 터인데, 그들이 우리 여학생을 희롱하였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적인 충격이었다. 더구나 박기옥은 나의 사촌 누님이었으니, 나의 분노는 더하였다. 나는 박기옥의 댕기를 잡고 장난을 친 후쿠다를 개찰구 밖 역전 광장에서 불러 세우고, 우선 점잖게 따졌다.'

박준채(1914~2001) 선생의 회고집 '독립시위로 번진 한·일 학생 충돌'의 일부분이다. 박준채는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 박준채의 검사 피의자 신문조서. 박준채의 이름과 직업, 연령, 주소 등이 적혀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 옛 나주역사.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의 현장이다. ⓒ 이돈삼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열차 안. 후쿠다, 다나카 등 일본인 중학생들이 하굣길의 한국 여학생 박기옥과 이광춘, 이금자의 댕기머리를 당기며 희롱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준채가 후쿠다를 꾸짖었다. 후쿠다가 '조센징'을 들먹이며 무시했다. 후쿠다가 '조센징 놈이 뭐라고 까불어?' 하는 바람에,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는 게 박준채의 회고 글이다. 사건을 목격한 일본인 순사도 일본인 학생 편을 들었다.

일제 치하에서 감정을 삭이고 있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 학생들의 단체 싸움으로 번졌다. 이른바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이다.

박준채와 박기옥이 살던 집이 나주 남파고택(南坡古宅)이다. 남파고택은 밀양박씨 청재공파 종갓집이다. 박준채는 박준삼(1898∼1976)의 동생, 박기옥과 사촌이었다.

박준삼은 3·1운동에 참여, 옥살이를 했다. 광복 뒤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나주위원장을 맡았다. 나주에 민립중학교(나주중학교 전신)도 세웠다. 박기옥은 나중에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끈 서태석의 며느리가 된다.

▲ 옛 나주역사. 지금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 나주역사’라는 의미를 담아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


▲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을 그린 벽화. 죽림동 거리에 그려져 있다. ⓒ 이돈삼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시작된 한국과 일본 학생의 충돌은 이튿날 통학열차 안에서도 일어났다. 11월 1일 광주역에서 또다시 부딪혔다. 3일 광주고보 학생의 1차 봉기, 12일 2차 봉기로 이어졌다. 27일엔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 봉기로 확산됐다.

광주 통학생 30명이 퇴학 당했다. 많은 학생이 구속됐다. 그럼에도 학생 봉기는 멈추지 않았다. 댕기머리 희롱을 당한 이광춘은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백지동맹'을 이끌었다. 백지동맹은 시험 때 연필은 물론 글자 하나도 쓰지 말자는 저항을 일컫는다.

나주와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 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퍼졌다. 만주와 연해주, 중남미 멕시코와 쿠바 등지에 사는 한민족도 동참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하 3대 독립운동이 됐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들불처럼 번진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지정됐다. 학생들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라 독립운동으로 확산된 것이다.

▲ 나주 소녀상.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을 배경으로 세워졌다. ⓒ 이돈삼


▲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내부. 학생독립운동 전개과정을 소상히 알려준다. ⓒ 이돈삼


학생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나주역이다. 당시 나주역은 호남선 노안역과 다시역 사이에 있었다. 2001년 7월 호남선이 복선화되면서 영산포역과 통합돼 나주시 송월동으로 옮겨갔다. 지금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 나주역사'라는 의미를 담아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옛 나주역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역사는 1913년 호남선 개통에 맞춰 지어졌다. 70년대까지 나주교통의 요충지였다. 나주 상권과 문화 중심지였다. 여인숙과 음식점, 주점 등이 역전에 들어서고, 활기를 띠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나주역사 앞에 학생독립운동 기념탑과 기념관도 들어섰다. 기념관에선 학생독립운동 과정을 보여준다. 1전시실에선 일제의 호남 침탈, 침탈의 전초기지였던 영산포와 나주 이야기를 풀어준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나주에서 일어난 의병활동과 일제의 탄압, 나주학생독립운동의 이유와 배경, 전개과정을 설명한다. 2전시실은 나주역 충돌 이후 들불처럼 번진 학생독립운동의 전개과정, 나주학생 봉기와 투쟁 등으로 꾸며졌다.

▲ 나주시 죽림동 전경. 남산시민공원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 이돈삼


▲ 나주반. 간결하면서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 이돈삼


옛 나주역 일대가 전라남도 나주시 죽림동(竹林洞)에 속한다. 옛 지명은 죽포면이다.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는 나루 죽포진이 있었다. 전함을 수리하는 전선소(戰船所), 무기를 보관하는 군기고(軍器庫)도 있었다. 영산창에서 한양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과 지역을 지키는 수군기지 역할을 했다.

지명은 대숲이 많았던 데서 유래한다. 죽공예품도 상인들한테 인기를 끌었다. 상인들은 대바구니에 나주특산 배를 담아 열차 안팎에서 팔기도 했다.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앞에 무형문화재 나주반(羅州盤) 전수교육관도 있다. 조선에서 세 손가락에 꼽힌 나주반은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면서도 견고했다. 둥근 다리 선이 날렵하고, 다리와 다리를 연결하는 가락지는 미끈했다. 한 마디로 소박하고 실용적인 상이다. 나주반은 중요무형문화재 '소반장'으로 지정된 김춘식 선생이 명맥을 잇고 있다.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도 있다. 1894년 동학군 수백 명이 초토영(현 나주초등학교 터)에서 희생됐다. 사죄비는 일본과 한국민 성금에다 나주시의 도움으로 청소년수련관 옆에 세워졌다.

▲ 동학농민군 희생자 기리는 사죄비. 일본과 한국민 성금에다 나주시 도움으로 세워졌다. ⓒ 이돈삼


▲ 옛 나주읍성 동점문. 일제강점 때 훼철된 읍성 4대문 가운데 동문이다. ⓒ 이돈삼


옛 나주읍성 동점문도 복원돼 있다. 나주읍성은 평지와 구릉에 쌓은 평산성이다. 성곽 둘레 3679m, 면적 97만4390㎡에 이른 큰 성이었다. 동점문은 일제강점 때 훼철된 읍성 4대문 가운데 동문이다. 인근에 남고문도 있다.

동점문과 삼성아파트 사이에 다께나까 통조림공장(옛 화남산업)도 있었다. 군납용 쇠고기 통조림을 생산한 공장이었다. 날마다 소 200∼300마리를 잡았다고 전한다. 죽은 소의 영혼을 달래는 작은 위령비가 세워졌다. 광복 이후엔 복숭아(황도, 黃桃)를 가공하고, 파병 군인용 김치통조림도 만들었다.

남산시민공원도 지척이다. 공원엔 한말 의병장 김태원 기적비와 조정인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호국영령을 기리는 현충탑도 있다. 공원에서 죽림동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남산시민공원에 세워진 의병장 순절비. 오른쪽에 김태원, 왼쪽에 조정인 의병장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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