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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는 나에게 속해있을까...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프롬>

등록|2024.11.01 14:09 수정|2024.11.01 15:11
나는 나에게 속해 있을까? 나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을까?

에리히 프롬의 철학을 서울대 박찬국 교수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책,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에서 프롬은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시장에서 매매되는 어떤 물건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경제 시장, 결혼 시장 등에서 성공적으로 '팔리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경험, 생각, 감정, 행동 등을 시장의 요구에 맞추느라 나 자신을 소외시키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도서관 책장에 꽂힌 이 책의 제목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프롬>을 보았을 때 반사적으로 이 책을 꺼내 들었다는 건 아마 나 역시 현대인의 불안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반증이었을 것이다. 현대인의 불안이라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식상한 주제이지만 속시원히 해결할 수 있는 명확한 치료법도 없어 평생을 따라다니는 괴로운 질병이기에 간과할 수는 없다.

▲ 책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 김지영


그렇다면 대체 불안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소외시키는 삶이 불안을 불러오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기질이나 성향 차이 때문일까?

에리히 프롬의 이론에 따라 불안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근대에서 중세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세사회에서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정 지위를 부여받았고 이러한 신분질서는 신이 정한 것으로 여져졌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오히려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꼈다.

중세 말기로 오면서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급, 부르주아가 등장하고 농노는 노동자로 대체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원하는 이에게 제공하고 원하는 곳에 거주할 수도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개인주의'가 나타나게 되었고 사람들은 신분의 억압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개인으로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중세의 신분질서가 마련해 주었던 안정감과 소속감을 상실하면서 고독하고 불안해졌다. 프롬의 표현에 따르자면 '도처에 적의가 번득이는 세상에 자신이 홀로 내던져져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고독감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사람들은 더 많은 권력과 부, 명예를 추구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권위나 소유에 의지하게 되었다.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의 등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대중 집회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보다 큰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면서 힘을 얻게 된다. (중략) 만일 한 개인이 자신의 작은 일터나 자신을 왜소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대기업의 조직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대중집회에 참여하면서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일체감을 경험한다면, 그는 대중암시의 마술적인 영향에 굴복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소위 '비이성적'인 권위에 굴복한다. 물론 집단의 한 구성원이 되는 경험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아가며 일체감을 느끼는 경험은 한 사람의 인격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이 사이비 종교 단체와 같은 비이성적인 단체일 경우이거나, 혹은 이성적인 집단이더라도 지나치게 권위를 내세워 개인을 하나의 기능적 부품으로만 취급한다면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는 있어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프롬의 말처럼 어려워질 것이다.

현대인들이 소유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 역시 프롬은 지나치게 소유양식을 추구하는 사회로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독특한 쇼핑 아이템이나 패션을 추구하지만, 이런 소유양식은 거짓된 욕망으로 또다른 공허함만 불러온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취향을 온전히 자신만의 개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와 미디어, SNS에서 자유로운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SNS 피드와 PPL 광고, 그런 광고에 영향을 받은 또 다른 타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스스로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에 교묘하게 스며들어 있는 자본주의적 '권유'는 도처에 만연하다.

'이 최신 핸드폰을 사용하면 너는 유행에 민감하고 감각적인 사람처럼 여겨질 거야. 저 위스키를 마시면 너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불행한 감각을 모두 잊어버리고 행복해질 거야, 그 가구를 집에 들어놓으면 너의 삶의 질은 상승할 거야'라는 등등의 달콤하고 유혹적인 권유들 말이다.

프롬은 이러한 소유양식 대신 '존재양식'을 지향하는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양식'이란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박찬국 교수가 말한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온전히 '존재양식'만 추구하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저자는 신체만 해도 완벽하게 건강한 인간은 찾아보기 어렵듯 삶도 그러하며,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건강한 '존재양식'적인 삶의 지향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프롬의 이론이 의의가 있다고 본다.

프롬의 철학은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현실에 온전히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이상적'인 학문 같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불안한 대략적 원인과 그에 따른 행태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답답한 안개 속에 갇혀 있던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또 다른 권위에 복종하거나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추구하거나,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한다고 해서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부와 명예, 삶의 편의를 제공하는 물건에 대한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단지 프롬의 말처럼 사랑과 책임감과 관심의 회복을 통해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사는 일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생활과 자아의 균형을 지키며 자신을 주체적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요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 광장은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자유로운 놀이터가 된다 ⓒ Unplash


도서관 앞 광장을 지나며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광장은 아이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된다. 술래잡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씽씽이를 타고 달려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는 장소인 것이다.

이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아이를 소유물로 여기고, 예민하고 똑똑한 아이에게 교묘하게 상처를 주며 자신을 바보라고 느끼게 만들었다고 한다. 권위주의적인 사회, 물질이상주의 사회에서 사는 구성원 역시 이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이 이런 광장 같다면 어떨까.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저 아이들처럼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릴스나 쇼츠의 끊임없이 자극적인 컨텐츠로 도파민을 충족시키지 않아도 밖으로 나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흥미로운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또 다른 공허함을 불러오는 가짜 욕망을 떨쳐낼 수 있다면. 자신의 창의성을 무시당하지 않고 개인의 독특한 성향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런 삶이 가능하다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불안한 표정을 지우고, 입가에 슬몃 미소가 떠오르는 삶을 희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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