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최고 거장, 30년 만 복귀... 169분에 풀어낸 속내
[김성호의 씨네만세 870] <클로즈 유어 아이즈>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오로지 영원불변한 것이 없다는 말만이 변치 않는 진리로 통용된다. 시간의 흐름이란 너무도 격렬하여 십 년이면 뽕나무밭도 바다가 된다는 옛말이 더는 신기하게 들려오지 않는다. 도시가 일어나고 지역이 쇠락하는 데 불과 몇 년이면 충분할 정도가 아닌가.
변화는 형태의 바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느 것은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진다. 급상승한 최저임금이 동네 골목상권의 아르바이트생을 줄이지만, 또 그 제도는 그사이 키오스크며 테이블오더 같은 새로운 기술의 침투를 불러온다. 바뀐 제도와 기술은 사회 전반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다. 오래도록 변치 않을 것 같던 예술조차도 옛것 그대로는 남지 못한다.
한때 영화는 콧대 높던 예술의 위협적인 적자였다. 문학과 음악, 회화와 연극, 건축과 무용에 이르는 종래 예술의 갈래들이 지닌 특징을 홀로 포괄하며,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는 역량까지 갖춘 덕이었다. 철학은 영화가 앞선 여섯 종목에 이어 일곱 번째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격렬히 논의한 끝에 영화에 '제7예술'이란 칭호를 안겼다. 일곱 번째로 공인된 예술, 새로 등장한 영화라는 것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누구도 온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영화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지라도
그러나 그 뒤의 운명은 모두가 아는 바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것 같던 첨단의 예술은 이내 고래의 것이 될 처지에 놓였다. 극장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영화제는 OTT 작품에까지 문호를 연다. 예술이란 말이 민망할 만큼 새로운 무엇도 시도하지 않는 작품이 최고 인기작으로 흥행을 거듭한다. 아(我)에서 타(他)로 이어지는 표현과 수용의 시도에 심혈을 기울이는 창작자가 영화예술 전반을 통틀어 한 줌에 불과하다. 창작자뿐인가. 수용하는 이들은 영화를 그저 시간 때우는 용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재미를 넘어 의미를 찾는 일이 비웃음과 마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지고 자리를 잃어가는 영화예술에 대한 영화다. 보다 정확히는 그 예술에 매혹된 적 있는 이들의, 그들이 저들의 예술에 보내온 정성에 대한, 무엇보다 예술이 인간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꿔낼 수 있다고 믿는 믿음에 대한 작품이다. 영화 속 인상 깊게 등장하는 "드레이어 이후로 영화에 기적은 없었어"란 말은, 도리어 감독이 영화가 한때는 기적을 품고 있었다 믿고 있단 걸 방증한다. 영화가 일으키는 기적을 믿는 이, 그런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되겠다.
그 구성부터 독특한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영화 속 다른 영화, 그러니까 필름 시대에 찍은 걸로 보이는 작품의 파편으로 채워진다. 그 영화의 오프닝이 곧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도입이 되고,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다시 이 작품의 엔딩을 채운다. 그 절묘한 관계 맺음은 이 영화가 필름 시대의 유산을 이어받은 작품이며, 그 정서를 가지고 있음을 내보인다.
주인공은 스페인의 나이 든 영화인 미겔(마놀로 솔로 분)이다. 어느덧 칠십대에 접어든 그가 한 TV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안을 받는다. 이유인 즉, 22년 전 실종된 제 영화의 주연배우 훌리오 아레나스(호세 코로나도 분)에 대해 말해달란 것. 훌리오는 미겔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함께 해군 소속으로 근무하며 전 세계 바다를 다니기도 했다.
실종된 주연배우... 22년이 흘렀다
영화를 시작하고 잘생긴 훌리오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미겔은 창작자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차, 첫 영화를 대차게 말아먹고 겨우 돌입한 두 번째 영화 주연으로 제법 명성이 있던 친구 훌리오가 출연하게 된 것이다. 한때의 미남자가 주름 가득한 장년 배우가 되었지만, 미겔의 입장에선 그마저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그렇게 촬영에 돌입하고 단 두 신을 찍은 뒤 그가 실종되고 말았다 했다.
이뤄진 촬영은 같은 곳에서 진행된 처음과 마지막신이다. 어느 유대인 부자가 중국에 있는 제 혈육을 찾아달란 요구를 해오고, 훌리오가 그를 받아들여 딸을 찾아오는 이야기. 그 사이 중국에서 있었을 모험들은 훌리오가 실종되는 바람에 촬영하지 못하고 영화가 종결되기에 이른다. 22년 뒤 남은 건 그 두 장면과 약간의 메이킹필름 뿐. 영화도 망치고 친구도 잃은 그 아픈 기억을 미겔은 마주하기로 한다. 끝끝내 잘 풀리지 않은 삶, 방송사가 주기로 한 대가가 그에겐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그렇게 사라진 친구를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방송 녹화를 하고 필요한 자료를 모으며 그는 오래도록 기억 저편에 묻고 있었던 친구의 흔적들을 찾아 나선다. 친구의 딸을 만나고, 저와 헤어진 뒤 훌리오와 연달아 사귀었던 옛 여자를 찾고, 그가 나온 짧은 필름 쪼가리까지 모으는 과정이 긴 러닝타임 동안 지속된다. 그사이 드러나는 미겔의 삶은 훌리오 만큼이나 비극적인 것들 투성이인데, 그는 어찌저찌 자식을 가슴에 묻고 아내 또한 잃어버리고도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
근래 보기 드문 러닝타임을 가진 작품이다. 무려 169분, 상영관을 잡는 것부터 수익을 올리기까지 하나하나 장애가 된다. 그러나 제작진은 이를 줄이지 않았다. 줄일 수 없었던 것이다.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세계가 온전한 감동을 주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꼭 이와 같았으므로.
30년 만에 등장한 감독, 고백적 이야기
영화는 빅토르 에리세의 이야기가 깃든 작품처럼 보인다. 영화에선 감독이 사라진 배우를 찾아 나서지만, 에리세는 그 스스로 영화세계에서 물러나 그를 찾는 팬들을 애타게 했다. 사실 애가 탄 것도 처음 몇 년 뿐이지, 무려 30여 년 동안이나 신작을 내놓지 않았으니 그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해도 좋았다.
에리세는 극영화 <벌집의 정령> <남쪽>, 다큐멘터리 <햇빛 속의 모과나무>까지 앞서 세 편의 작품을 발표한 스페인 연출자다. 세 편 모두가 스페인 영화계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명작으로 기록됐다. 1973년 작 <벌집의 정령>은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독재정권에 대한 은유가 담긴 작품으로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고, 10여 년 만에 내놓은 <남쪽> 또한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그는 다시 10년 만인 1992년, 매년 모과나무를 그리는 화가의 이야기를 다큐로 담은 <햇빛 속의 모과나무>를 찍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를 마지막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스페인 영화계엔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같은 천재적 재능을 갖춘 명장들이 등장했으나 그중 누구도 에리세가 앞서 보여준 영화예술에 대한 진지하고 독특한 자세를 채울 만큼은 되지 못했다. 에리세가 떠난 자리는 에리세만큼의 공백을 남겼고, 그리하여 에리세의 복귀는 또 그만큼의 기대를 품도록 한 것이다.
미겔은 훌리오를 잃어버렸다. 하나씩 단서를 모아가며 그에게 다가서려 하지만 그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로부터 드러나는 건 훌리오뿐 아니라 삶의 많은 가치를 우수수 잃어버린 미겔 저 자신의 삶이다. 형편없는 작가였고 실패한 감독이며 아들과 아내를 잃어버린 외로운 사내가 제 가장 친한 벗까지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잃은 채로 뒤늦게 찾고 있다. 그러나 그는 찾고 있으므로 온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다. 찾아 나섰고 어쩌면 찾을 수도 있으므로.
"영화에 기적은 없었어"... 그러나
영화는 미겔의 노력이 마침내 성과를 얻는 순간을 보인다. 그러나 어렵게 마주한 훌리오는 전과 같지 않다. 미겔을 알아보지 못한다. 인식은 망가지지 않았으되 기억은 사라진 훌리오가 텅 빈 눈으로 미겔을 마치 벽처럼 바라본다.
에리세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이로부터 출발한다. 미겔이 훌리오를 찾아 헤매고, 다시 그를 깨우려는 노력을 하는 것, 방송사의 제안과는 상관없이 이미 그는 저의 일이 되어버린다. 방송을 보는 것도 중요치 않다. 친구를 찾고 깨워 일으키는 일만이 중요하다. 왜 그는 찾아 헤매야 했는가. 왜 또 그를 깨워 일으켜야 하는가. 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삶일지라도 아직은 바꾸어낼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영화 속 미겔의 친구인 영사기사 맥스(마리오 파르도 분)가 미겔에게 말한다. "드레이어 이후로 영화에 기적은 없었어"라고. 이 대사는 그 즉시 영화가 아직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와 같은 덧없는 믿음을 붙잡고서 모든 게 디지털화된 뒤에도 남겨진 필름을 지켜내는 그의 수고로움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왜 그와 같이 이문 남지 않는 행동을 하는가. 기적을 믿기 때문에, 영화가 그저 영화 이상이라고 믿기 때문은 아닌가. 영화 이상, 삶을 움직이는 것, 인간을 바꿔내고 세상을 바꾸는 예술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닌가.
미겔 또한 맥스와 걸맞은 친구다. 맥스의 자조 섞인 말에도 미겔은 영화가 친구를 깨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는 미겔의 부탁에 필름을 챙겨 종일을 운전해 온다. 그들은 믿는 것이다. 영화가, 예술이, 사람과 세상이 여전히 기적을 필요로 한다고. 한스 드레이어 이후 기적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어디서는 영화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막을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고
영화의 제목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 직역하면 '네 눈을 감아라'가 된다. 영화 속 눈을 감고 또 감기는 몇몇 장면이 있다. 그토록 염원하던 아버지를 만난 딸이 눈을 감고, 또 영화 속 영화 안에는 어렵게 만난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서 그의 뜬 눈을 감기며 감정을 터뜨리는 딸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엔 기억을 잃은 훌리오가 커다란 스크린 가득 상영되는 제 모습을 보며 눈을 감는다. 아득하여 눈을 감는 순간이 있고, 간절하여 눈을 감지 못하는 이도 있다. 눈을 감고 염원하는 마음이 있다. 영화는 그와 같은 순간을, 지그시 눈을 감고 또 감도록 하는 마음을 비친다.
한편으로 영화는 클로즈업 또한 인상적으로 활용한다. <벌집의 정령> 속 티 묻지 않은 아이 아나(아나 토렌트 분)가 에리세의 작품에 다시 한번 딸로 등장하여 제 아버지를 찾는다. 어느덧 주름 가득한 얼굴을 가진 그녀를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그사이 있었을 시간을, 그 시간이 키운 인간을, 그와 같은 변화가 미치지 못한 영혼까지를 정다운 시선으로 포착한다. 통상의 클로즈업보다 한 걸음 다가선 그와 같은 낯선 촬영이 카메라를 넘어 인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애정어린 시선을 느끼게 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여러모로 영화와 인간, 또 세상에의 애정과 믿음을 어렵사리 간직해온 이의 작품이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간직한 이만이 그를 세상에 퍼뜨릴 수 있다. 믿음이 또 다른 믿음으로 이어지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 애정이 피어나고 닿는 과정이 하나하나 기적이 된다. 영화는 여전히 기적적이다.
세상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오로지 영원불변한 것이 없다는 말만이 변치 않는 진리로 통용된다. 시간의 흐름이란 너무도 격렬하여 십 년이면 뽕나무밭도 바다가 된다는 옛말이 더는 신기하게 들려오지 않는다. 도시가 일어나고 지역이 쇠락하는 데 불과 몇 년이면 충분할 정도가 아닌가.
한때 영화는 콧대 높던 예술의 위협적인 적자였다. 문학과 음악, 회화와 연극, 건축과 무용에 이르는 종래 예술의 갈래들이 지닌 특징을 홀로 포괄하며,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는 역량까지 갖춘 덕이었다. 철학은 영화가 앞선 여섯 종목에 이어 일곱 번째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격렬히 논의한 끝에 영화에 '제7예술'이란 칭호를 안겼다. 일곱 번째로 공인된 예술, 새로 등장한 영화라는 것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누구도 온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 클로즈 유어 아이즈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영화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지라도
그러나 그 뒤의 운명은 모두가 아는 바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것 같던 첨단의 예술은 이내 고래의 것이 될 처지에 놓였다. 극장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영화제는 OTT 작품에까지 문호를 연다. 예술이란 말이 민망할 만큼 새로운 무엇도 시도하지 않는 작품이 최고 인기작으로 흥행을 거듭한다. 아(我)에서 타(他)로 이어지는 표현과 수용의 시도에 심혈을 기울이는 창작자가 영화예술 전반을 통틀어 한 줌에 불과하다. 창작자뿐인가. 수용하는 이들은 영화를 그저 시간 때우는 용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재미를 넘어 의미를 찾는 일이 비웃음과 마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지고 자리를 잃어가는 영화예술에 대한 영화다. 보다 정확히는 그 예술에 매혹된 적 있는 이들의, 그들이 저들의 예술에 보내온 정성에 대한, 무엇보다 예술이 인간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꿔낼 수 있다고 믿는 믿음에 대한 작품이다. 영화 속 인상 깊게 등장하는 "드레이어 이후로 영화에 기적은 없었어"란 말은, 도리어 감독이 영화가 한때는 기적을 품고 있었다 믿고 있단 걸 방증한다. 영화가 일으키는 기적을 믿는 이, 그런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되겠다.
그 구성부터 독특한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영화 속 다른 영화, 그러니까 필름 시대에 찍은 걸로 보이는 작품의 파편으로 채워진다. 그 영화의 오프닝이 곧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도입이 되고,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다시 이 작품의 엔딩을 채운다. 그 절묘한 관계 맺음은 이 영화가 필름 시대의 유산을 이어받은 작품이며, 그 정서를 가지고 있음을 내보인다.
주인공은 스페인의 나이 든 영화인 미겔(마놀로 솔로 분)이다. 어느덧 칠십대에 접어든 그가 한 TV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안을 받는다. 이유인 즉, 22년 전 실종된 제 영화의 주연배우 훌리오 아레나스(호세 코로나도 분)에 대해 말해달란 것. 훌리오는 미겔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함께 해군 소속으로 근무하며 전 세계 바다를 다니기도 했다.
▲ 클로즈 유어 아이즈 포스터 ⓒ M&M 인터내셔널
실종된 주연배우... 22년이 흘렀다
영화를 시작하고 잘생긴 훌리오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미겔은 창작자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차, 첫 영화를 대차게 말아먹고 겨우 돌입한 두 번째 영화 주연으로 제법 명성이 있던 친구 훌리오가 출연하게 된 것이다. 한때의 미남자가 주름 가득한 장년 배우가 되었지만, 미겔의 입장에선 그마저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그렇게 촬영에 돌입하고 단 두 신을 찍은 뒤 그가 실종되고 말았다 했다.
이뤄진 촬영은 같은 곳에서 진행된 처음과 마지막신이다. 어느 유대인 부자가 중국에 있는 제 혈육을 찾아달란 요구를 해오고, 훌리오가 그를 받아들여 딸을 찾아오는 이야기. 그 사이 중국에서 있었을 모험들은 훌리오가 실종되는 바람에 촬영하지 못하고 영화가 종결되기에 이른다. 22년 뒤 남은 건 그 두 장면과 약간의 메이킹필름 뿐. 영화도 망치고 친구도 잃은 그 아픈 기억을 미겔은 마주하기로 한다. 끝끝내 잘 풀리지 않은 삶, 방송사가 주기로 한 대가가 그에겐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그렇게 사라진 친구를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방송 녹화를 하고 필요한 자료를 모으며 그는 오래도록 기억 저편에 묻고 있었던 친구의 흔적들을 찾아 나선다. 친구의 딸을 만나고, 저와 헤어진 뒤 훌리오와 연달아 사귀었던 옛 여자를 찾고, 그가 나온 짧은 필름 쪼가리까지 모으는 과정이 긴 러닝타임 동안 지속된다. 그사이 드러나는 미겔의 삶은 훌리오 만큼이나 비극적인 것들 투성이인데, 그는 어찌저찌 자식을 가슴에 묻고 아내 또한 잃어버리고도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
근래 보기 드문 러닝타임을 가진 작품이다. 무려 169분, 상영관을 잡는 것부터 수익을 올리기까지 하나하나 장애가 된다. 그러나 제작진은 이를 줄이지 않았다. 줄일 수 없었던 것이다.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세계가 온전한 감동을 주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꼭 이와 같았으므로.
▲ 클로즈 유어 아이즈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30년 만에 등장한 감독, 고백적 이야기
영화는 빅토르 에리세의 이야기가 깃든 작품처럼 보인다. 영화에선 감독이 사라진 배우를 찾아 나서지만, 에리세는 그 스스로 영화세계에서 물러나 그를 찾는 팬들을 애타게 했다. 사실 애가 탄 것도 처음 몇 년 뿐이지, 무려 30여 년 동안이나 신작을 내놓지 않았으니 그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해도 좋았다.
에리세는 극영화 <벌집의 정령> <남쪽>, 다큐멘터리 <햇빛 속의 모과나무>까지 앞서 세 편의 작품을 발표한 스페인 연출자다. 세 편 모두가 스페인 영화계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명작으로 기록됐다. 1973년 작 <벌집의 정령>은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독재정권에 대한 은유가 담긴 작품으로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고, 10여 년 만에 내놓은 <남쪽> 또한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그는 다시 10년 만인 1992년, 매년 모과나무를 그리는 화가의 이야기를 다큐로 담은 <햇빛 속의 모과나무>를 찍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를 마지막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스페인 영화계엔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같은 천재적 재능을 갖춘 명장들이 등장했으나 그중 누구도 에리세가 앞서 보여준 영화예술에 대한 진지하고 독특한 자세를 채울 만큼은 되지 못했다. 에리세가 떠난 자리는 에리세만큼의 공백을 남겼고, 그리하여 에리세의 복귀는 또 그만큼의 기대를 품도록 한 것이다.
미겔은 훌리오를 잃어버렸다. 하나씩 단서를 모아가며 그에게 다가서려 하지만 그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로부터 드러나는 건 훌리오뿐 아니라 삶의 많은 가치를 우수수 잃어버린 미겔 저 자신의 삶이다. 형편없는 작가였고 실패한 감독이며 아들과 아내를 잃어버린 외로운 사내가 제 가장 친한 벗까지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잃은 채로 뒤늦게 찾고 있다. 그러나 그는 찾고 있으므로 온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다. 찾아 나섰고 어쩌면 찾을 수도 있으므로.
▲ 클로즈 유어 아이즈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영화에 기적은 없었어"... 그러나
영화는 미겔의 노력이 마침내 성과를 얻는 순간을 보인다. 그러나 어렵게 마주한 훌리오는 전과 같지 않다. 미겔을 알아보지 못한다. 인식은 망가지지 않았으되 기억은 사라진 훌리오가 텅 빈 눈으로 미겔을 마치 벽처럼 바라본다.
에리세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이로부터 출발한다. 미겔이 훌리오를 찾아 헤매고, 다시 그를 깨우려는 노력을 하는 것, 방송사의 제안과는 상관없이 이미 그는 저의 일이 되어버린다. 방송을 보는 것도 중요치 않다. 친구를 찾고 깨워 일으키는 일만이 중요하다. 왜 그는 찾아 헤매야 했는가. 왜 또 그를 깨워 일으켜야 하는가. 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삶일지라도 아직은 바꾸어낼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영화 속 미겔의 친구인 영사기사 맥스(마리오 파르도 분)가 미겔에게 말한다. "드레이어 이후로 영화에 기적은 없었어"라고. 이 대사는 그 즉시 영화가 아직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와 같은 덧없는 믿음을 붙잡고서 모든 게 디지털화된 뒤에도 남겨진 필름을 지켜내는 그의 수고로움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왜 그와 같이 이문 남지 않는 행동을 하는가. 기적을 믿기 때문에, 영화가 그저 영화 이상이라고 믿기 때문은 아닌가. 영화 이상, 삶을 움직이는 것, 인간을 바꿔내고 세상을 바꾸는 예술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닌가.
미겔 또한 맥스와 걸맞은 친구다. 맥스의 자조 섞인 말에도 미겔은 영화가 친구를 깨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는 미겔의 부탁에 필름을 챙겨 종일을 운전해 온다. 그들은 믿는 것이다. 영화가, 예술이, 사람과 세상이 여전히 기적을 필요로 한다고. 한스 드레이어 이후 기적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어디서는 영화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 클로즈 유어 아이즈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막을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고
영화의 제목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 직역하면 '네 눈을 감아라'가 된다. 영화 속 눈을 감고 또 감기는 몇몇 장면이 있다. 그토록 염원하던 아버지를 만난 딸이 눈을 감고, 또 영화 속 영화 안에는 어렵게 만난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서 그의 뜬 눈을 감기며 감정을 터뜨리는 딸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엔 기억을 잃은 훌리오가 커다란 스크린 가득 상영되는 제 모습을 보며 눈을 감는다. 아득하여 눈을 감는 순간이 있고, 간절하여 눈을 감지 못하는 이도 있다. 눈을 감고 염원하는 마음이 있다. 영화는 그와 같은 순간을, 지그시 눈을 감고 또 감도록 하는 마음을 비친다.
한편으로 영화는 클로즈업 또한 인상적으로 활용한다. <벌집의 정령> 속 티 묻지 않은 아이 아나(아나 토렌트 분)가 에리세의 작품에 다시 한번 딸로 등장하여 제 아버지를 찾는다. 어느덧 주름 가득한 얼굴을 가진 그녀를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그사이 있었을 시간을, 그 시간이 키운 인간을, 그와 같은 변화가 미치지 못한 영혼까지를 정다운 시선으로 포착한다. 통상의 클로즈업보다 한 걸음 다가선 그와 같은 낯선 촬영이 카메라를 넘어 인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애정어린 시선을 느끼게 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여러모로 영화와 인간, 또 세상에의 애정과 믿음을 어렵사리 간직해온 이의 작품이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간직한 이만이 그를 세상에 퍼뜨릴 수 있다. 믿음이 또 다른 믿음으로 이어지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 애정이 피어나고 닿는 과정이 하나하나 기적이 된다. 영화는 여전히 기적적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a href="https://brunch.co.kr/@goldstarsky" target="_blank" class=autolink>https://brunch.co.kr/@goldstarsky</a>)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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