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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않은 순간의 소멸, 존재에 관한 어떤 안무가의 해석

[리뷰] < 소멸(Extinction) Ver2. >

등록|2024.11.03 13:16 수정|2024.11.03 13:16

▲ 10월 31일부터 11월 7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등에서 펼쳐지는 ‘아르코댄스&커넥션’은 전혁진 안무가의 <소멸(Extinction) Ver2.>이 문을 열었다. 제목에서 알수 있듯 이 작품은 2016년에 발표한 전작 <소멸>에서 출발했다. 그때부터 전혁진 안무가가 오중석 사진작가와 협업을 펼쳐서 주목을 받았는데, 작업방식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콜라보의 도구와 영상의 결과물이 이전에 비해 풍부함을 느겼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대를 뒤덮은 하얀 댄스플로어의 뒤편으로 대형 스크린이 올라선다. 객석에서 바라볼 때, 무대 오른편에 10개의 의자가 배치됐고 반 정도는 관객들이 앉아서 무대를 응시한다. 그들의 무대 맞은편에는 영상장비가 세팅됐는데, 특이한 점은 보통 무대 뒤편에 숨겨진 조정실과 카메라가 객석에 노출됐다는 점이다. 작가가 찍은 결과물을 동시에 송출해야 하는 공연의 특성을 고려해 감독과 작가의 동선을 최소로 잡으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보통 무대와 관객의 이분법적 분할을 기본으로 하는 무용 공연에서 이렇게 복합적인 무대연출은 흔한 일이 아니다. 객석에 앉아 무용수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관람방식이 아니다. 무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배열된 건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을 바라보는 모습이 연상된다.

작품을 보기 전에 미리 안무가의 이력을 확인하면서 알게 된 건 그가 약 15년 전에 패션모델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안무가의 선택은 이전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또한 무대 왼편에 배치된 카메라 때문에 초반에는 무용수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란 편견으로 거슬렸지만, 나중에는 이런 연출이 몸짓에 집중하려는 수단이라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낀다.

전방위적으로 시도한 다양성 흔적

▲ 오프닝을 맡았던 ‘살아있는(Alive)’에서는 여성 무용수를 촬영한 작가의 결과물을 사진의 형태로 보여준다. 여기엔 단편적인 사진의 특징을 강조했다. 보통 빛이 부족한 공간에서 피사체의 기록을 담을 때 활용하는 장노출 기법이다. 오랜 시간을 동시에 담는 방법으로 이 기법을 선택하는데, 이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억의 잔상을 오래 남겨줄뿐 아니라 무용수의 동작을 눈으로 담지 못한 관객을 위하여 복습할 수 있는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소멸(Extinction) Ver2. >(10월 31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이 주제보다 필자의 이목을 끈 건 막이 오르기 전에 배열된 무대구성이다. 이는 전혁진 안무가가 관객들에게 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작품의 첫인상은 안무가의 퍼포먼스뿐 아니라 무대에 깊게 개입된 사진작가의 동작에 생경함마저 느낀다. 가끔 작가는 무대의 중앙까지 들어와 셔터를 누르는데 안무가와 함께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가 촬영한 결과물은 사후에 공유받는 것이 아니라 막이 전환되는 이음새마다 그가 찍었던 결과물을 즉석에서 공개한다. 막 전환은 암전을 통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틈을 허락하지 않고 배경음악과 함께 그간 찍어왔던 사진과 영상을 셀렉한다. 이 모든 과정은 보는 이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자아낸다.

10월 31일부터 11월 7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등에서 펼쳐지는 '아르코댄스&커넥션'은 전혁진 안무가의 < 소멸(Extinction) Ver2. >이 문을 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2016년에 발표한 전작 <소멸>에서 출발했다. 그때부터 전혁진 안무가가 오중석 사진작가와 협업을 펼쳐서 주목을 받았는데, 작업방식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컬래버의 도구와 영상의 결과물이 이전에 비해 풍부함을 느꼈다.

공연은 '소멸'이라는 주제에 맞춰 총 5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안무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얘기하듯 스토리를 전개한다. 60분간 이뤄지는 옴니버스식 공연은 살아있는(Alive), 자화상(Portrait), 관계의 감각(Sense of relationship), 젊음(Youth), 소멸(Extinction) 등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공연은 저 마다의 특징을 내세우기 때문에 개별 공연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프닝을 맡았던 '살아있는(Alive)'에서는 여성 무용수를 촬영한 작가의 결과물을 사진의 형태로 보여준다. 여기엔 단편적인 사진의 특징을 강조했다. 보통 빛이 부족한 공간에서 피사체의 기록을 담을 때 활용하는 장노출 기법이다. 오랜 시간을 동시에 담는 방법으로 이 기법을 선택하는데, 이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억의 잔상을 오래 남겨줄 뿐 아니라 무용수의 동작을 눈으로 담지 못한 관객을 위하여 복습할 수 있는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두 번째 '자화상(Portrait)'에서는 이전 에피소드와 다르게 결과물이 영상으로 발전된다. 이때는 무대 안으로 개입되는 사진작가의 모션보다 무대 뒤쪽과 오른쪽에 배치된 고정 카메라의 역할이 커 보인다. 약 10분간 이어진 무용수의 동작은 쫓아가는 줌인의 영상미를 최대한 살렸으며, 무빙촬영 기법으로 뮤직비디오에서 볼 수 있던 감각이 연상된다. 심도 깊은 단렌즈는 무용수의 세밀한 동작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영상감독은 무용수의 표정, 손, 발에 포커싱을 맞춰 뒷배경을 날렸기 때문에 보는 이들은 객석에서 캐치할 수 없었던 디테일을 다시 볼 수 있다. 이렇게 아웃포커싱이 된 영상은 관객의 시선을 놓쳤던 아쉬움을 카메라의 시선이 도와주는 역할이라 해석한다.

세 번째 '관계의 감각(Sense of relationship)'에서는 보통 남녀 무용수의 보편적인 무용에 집중했다. 여기에는 둘의 관계를 오롯이 이해하기 위하여 무대의 한편에서 의자를 무대 안으로 끌어들인다. 기억과 소멸이라는 내용에 충실하기 위하여 둘 사이의 대화가 보이는 것처럼 몸짓에는 스토리가 보이며, 그것을 잇는 오브제로 의자가 활용된 사실은 독무와 다르게 두 무용수의 조화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무용의 색다른 해석들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이하 '예술극장')에서 올해 처음으로 선보이는 <아르코댄스&커넥션>은 실험적인 무용창작작품을 단체와 예술극장이 함께 만들어가는 무용기획제작 사업이다. '다양성'을 중심으로 무용에서 창작영역을 다각도로 확대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시하는데, 무용수와 안무가가 타 장르와 협업하거나 실험적인 무대를 창작하는 과정을 시도함이 목적이다. 이처럼 예술극장이 추구한 '다양성'을 고민한 작품으로 전혁진 안무가는 돋보인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 일회성으로 타 분야와의 시도한 것이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일관되게 고민해 온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혁진 안무가는 서로 다른 장르의 협업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걸어왔던 길을 보면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AYAF)에 선정되어 국내외에서 수많은 콩쿠르와 페스티벌에서 수상했다. 2009년에는 올해의 모델상을 받을 정도로 베테랑 모델로 활동했다. 안무가와 무용수, 모델, 영상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역을 넓히는 외도(?)를 해왔는데, 늘 마음속에서 무용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이렇게 다양한 작업을 시도한 이유가 본업(무용)에 더욱 충실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전혁진 안무가는 두 개의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우선 다분야 아티스트들의 공동작업을 하는 복합예술그룹인 '그라운드 제로 프로젝트'의 대표로, 안무와 댄스 활동을 하다가 필름에 관심을 담은 쿤스트 프로덕션의 영상감독으로. 원래는 극을 만들고 영화를 좋아했지만 "가진 재능을 필름에 녹여보겠다"는 생각으로 AYAF에 선정되어 뉴욕필름아카데미에서 필름 메이킹코스, 집중과정을 마쳤다. 어쩌면 <소멸> 시리즈가 탄생하게 된 것도 그동안 댄스필름을 통해 만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하려고 했던 그만의 성과가 아니었을까.

그의 작업 방식은 안무와 필름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그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따로 만드는 것보다 동시에 만들면 어떨까? 하나가 먼저 창작과정을 마치면 결과물이 국한적일 수 있기 때문에 동시작업에 흥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여 전혁진이 춤을 추는 동안 오중석 작가가 사진을 촬영하면서 동시에 무대 위로 송출해 관객에게 보여준다.

"내가 기억하지 않는 것 뭐가 있을까?"

▲ 이번 작업은 ‘소멸되는 존재와 기억들’에 관한 각각의 소재를 옴니버스식 단편 시퀀스로 구성됐다. 긴 서사가 아닌 짧은 소재들을 표현하는 안무는 빠른 전개를 통한 사건의 직접적인 표현들과 추상적인 감정들의 조화를 이룬다. 무대공연을 바라보는 관객과 카메라의 시선은 저마다의 관점으로 해석되고 그 관점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관객의 이해를 높인다. 소멸되는 존재에 관한 춤과 그를 투영하는 프로젝션은 관객의 시선이 한장의 사진으로 시작되어 여러 장의 필름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다. 여기에 프레임 속에 존재하는 관객 스스로의 모습으로 작품에 담긴 의미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제 < 소멸(Extinction) Ver2. >의 내용에 집중해 보자. '소멸'과 관련된 5개의 에피소드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가 작품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백했다. 즉, 치매라는 병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특이점이 없던 사람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 것도 분명히 존재한 시간은 기억하지만 없어진 게 아닌가. 이처럼 안무가는 현재 나에게 소멸된 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오늘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 객석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등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기억 속에서 소멸되는 것들이 안무가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5개의 에피소드에서 작품의 내용에 가장 충실했던 '소멸(Extinction)'은 이번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앞서 안무가가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영감을 얻었듯이 '소멸'은 안무가의 몸짓에서만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고, 무대의 천장에서 내려오는 원형의 조명등에서 효과가 증폭된다. 위의 아래로 점차 내려오는 조명등은 처음에 무대 전체를 비추지만 나중에는 무대와 조명의 거리가 좁아지면서 원형의 조명범위가 좁아진다. 마치 사진기에서 조리개를 연상하는데, 이것은 기억의 범위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상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이것은 녹내장을 앓고 있는 환자의 그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보는 시각이 줄어들고 있음에 불안해하며, 나중에는 무대의 전체를 암전으로 채울 때까지 시나브로 어두워진다는 사실이 '소멸'의 효과를 높이고 있는 셈이다.

대중의 이해도 높이는 옴니버스 연출

▲ <아르코댄스&커넥션>의 서문을 연 전혁진 포스터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번 작업은 '소멸되는 존재와 기억들'에 관한 각각의 소재를 옴니버스식 단편 시퀀스로 구성됐다. 긴 서사가 아닌 짧은 소재를 표현하는 안무는 빠른 전개를 통한 사건의 직접적인 표현들과 추상적인 감정들의 조화를 이룬다. 무대공연을 바라보는 관객과 카메라의 시선은 저마다의 관점으로 해석되고 그 관점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관객의 이해를 높인다. 소멸되는 존재에 관한 춤과 그를 투영하는 프로젝션은 관객의 시선이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되어 여러 장의 필름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다. 여기에 프레임 속에 존재하는 관객 스스로의 모습으로 작품에 담긴 의미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공간과 시간의 제한 속 신체 움직임을 카메라의 시각적 프레임에 담아내는 시도이자 존재하는 몸과 소멸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 <소멸>은 누군가 혹은 무엇이 나에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의 기억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소한 진실을 말하는 작품이다. 즉, 기억되지 않은 모든 순간은 소멸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과 세상의 수많은 현상들은 자칫 존재하고 기억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삶이 기억에서 지속적으로 흐릿해져 소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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