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밀입국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안주인

[오늘의 독립운동가 54] 11월 2일 타계한 정정화 지사

등록|2024.11.02 14:07 수정|2024.11.02 14:07

▲ 3.1유치원 가을 개강(1941년) 기념 사진, 정정화 지사,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1940년) ⓒ 국가보훈부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위 인용문은 정정화(鄭靖和) 지사 회고록 <녹두꽃>의 서문 중 일부이다. 참으로 겸양하고 온유한 정신과 삶의 태도가 고이 서려 있는 글이다. 그러나 생애도 그처럼 고요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정정화 지사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역명여성동맹, 대한애국부인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수원 유수(현 시장)를 지낸 아버지 정주영과 어머니 이인화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 두 오빠와 두 언니, 아래로 여동생 한 명이 있었다. 즉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 두 오라버니, 두 언니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상류층 가문서 태어나 유복하게 보낸 유년기

다만 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다. 완고한 부친은 여성교육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 몰래 작은오빠 뒤를 따라 서당에 드나들면서 천자문과 소학을 떼었고, 신문 읽을 정도의 문자해독력은 쌓았다.

그의 독립운동 투신은 친가보다는 시가의 영향이 컸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 대동단 총재로 활동했던 시아버지 김가진은 1920년 1월초 중국 망명을 결행했다. 73세나 된 고령의 김가진은 남대문역(현 서울역)을 출발해 의주를 거쳐 상해로 갔다. 물론 그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도 함께 갔다.

72세 시아버지, 압록강 건너 상해로 망명

상해 도착 직후부터 정정화는 상해와 만주 안동현을 오가며 활동했다. 당시 안동에는 일본경찰로 신분세탁 한 최석순이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있었다. 정정화는 3월 초 최석순의 누이동생으로 위장해 서울까지 밀입국, 신필호 산부인과 의원에 20일가량 머물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1921년 늦은 봄에 두 번째로 국내로 밀파됐다. 물론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등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충남 예산으로 가 친정아버지로부터 군자금을 받은 후 개성에 들러 김규식의 이종조카 서재현을 데리고 상해로 귀환했다.

임정 위상 추락, 어려워진 독립운동자금 모집

그 후에도 1922년 6월, 10월, 1924년 12월 등 여러 차례 더 밀입국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그 사이 시아버지 김가진은 1922년 7월 4일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임정은 분열과 대립으로 크게 위상이 추락되어 있었다. 이는 결국 국내외 동포의 임정에 대한 재정 지원이 격감하는 사태를 낳았다.

임정은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을 내각책임제 정부인 국무령제로 개정했다. 1926년 말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집단지도체제(국무위원제)로 헌법을 재개정함으로써 임정의 명목을 겨우 이어갔다. 이때부터는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드는 일이 정정화의 임무 중 한 가지가 되었다.

파란만장한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견디며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만주 사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인적·물적 기반은 큰 타격을 입었다. 만주를 일제가 휘어잡자 한국인 반민족행위자들이 앞장서서 중국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례가 빈발했다.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 고조는 당연한 결과였다.

임정은 의열투쟁으로 난국을 돌파하기로 결정, 1931년 말 한인애국단을 출범시켰다. 김구가 단장을 맡아 지휘한 한인애국단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같은 해 4월 윤봉길 의거를 일으켰다. 이로써 중국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확실히 가지게 되었다.

그 대신 일본의 집요한 보복 노력은 더욱 거세졌고, 임시정부는 떠돌이 피난생활에 들어갔다. 그 상황이 쌓이고 쌓여 1938년 2월 이래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주인(국가보훈부 표현)"이 되었다. 1940년 3월 임정의 맏어른 이동녕이 사천성 기강현 임정 건물 2층 침소에서 71세 나이로 사망할 때 그 임종을 지킨 사람도 정정화였다.

정정화를 임정 안주인으로 만든 윤봉길 의거

1940년 10월 임정은 개헌을 통해 주석 중심의 강력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했다. 당(한국독립당), 정(임시정부), 군(한국광복군) 체제는 임정의 독립운동 중추기관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올려주었다. 정정화는 남편 김의한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창립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그해 6월 한국독립당 여성 조직으로 한국여성동맹이 창립될 때 정정화는 간사로 선출되었다. 1943년 2월 여성 차원의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위해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가 개최되었을 때는 훈련부 주임에 선임되었다. 한국애국부인회는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쳤다.

독립 이후 직접 정치활동에는 참여 않아

정정화는 독립 이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민족국가 수립 운동을 전개하던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신(新)국가 건설 노선을 지지(국가보훈부 표현)"했지만, 정치활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감찰위원회(현 감사원) 감찰위원에 추천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정정화 지사는 1991년 11월 2일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젊은 날 25년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1951년 남편 납북 이래 40년을 홀로 살았으니 천수를 누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녹두꽃>을 읽어보시라는 뜻에서 선생의 말씀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칠까 한다.

내 몸 속에 투쟁가나 혁명가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는 내 과거의 행적에 대해 뉘우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보고 듣고 겪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 바람은 이 글이 특히 젊은이들에게 읽혀졌으면 하는 것이다. 바로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