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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 과다 '정년이', 삼국사기 '자명고' 내용 미리 알았더라면...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정년이>

등록|2024.11.03 15:00 수정|2024.11.04 11:11

▲ tvN <정년이> 관련 이미지. ⓒ tvN


적의 침입을 미리 알려주는 비밀 무기인 낙랑국의 자명고를 놓고 벌어지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낙랑국 최씨 공주와 이름이 호동인 고구려 왕자의 이야기는 한국인이 즐겨 찾는 대중문학 소재다. 2009년에는 SBS에서 <자명고>가 방영됐다. 1962년에는 김진규 주연의 <왕자 호동>이 출시됐고, 1956년에는 주목받는 감독인 김소동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가 출시됐다.

지금 방송 중인 tvN <정년이>에서도 드라마 속 작품으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가 묘사됐다. 지난 10월 27일 방영된 제6회는 주인공 윤정년(김태리 분)이 여성국극 작품인 <자명고>의 군졸 역을 맡는 장면을 보여줬다.

드라마 속에서 <자명고> 공연이 시작되기 30분 전, 조연출 백도앵(이세영 분)은 배우들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다가 너무 의욕적인 윤정년의 모습에 주목한다. 백도앵이 윤정년의 대본을 내려다보며 "역할 분석 열심히 했네"라고 말하자, 윤정년은 쑥스럽게 웃으며 "연기할 때 다 못 써먹더라도 최대한 분석은 해놓을라고요"라고 답한다.

윤정년의 넘치는 에너지와 의욕을 잘 아는 백도앵은 "의욕은 좋은데 군졸이 너무 튀면 안 된다"라고 말해준다. 너무 튀면 안 된다는 이 말이 결국 하나의 예고가 됐다.

이날 공연에서 윤정년은 단역인 군졸 역에 맞지 않게 너무 튀는 대사에다가 즉흥 연기까지 선보였다. 군졸 역에 너무 심취된 나머지, 관객들의 분위기에 맞춰 판소리하는 것이었다. 자명고 이야기를 군졸이 주인공인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동료 배우들은 물론이고 무대 뒤편의 감독 강소복(라미란 분)도 당황했음은 물론이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 tvN <벌거벗은 한국사> 중 한 장면 ⓒ tvN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는 20세기 들어 대중문학의 핵심 소재로 떠올랐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이 소재가 비중 있게 다뤄진 이후의 일이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이 책에서는 두 개의 낙랑을 구별코자, 낙랑국은 남낙랑으로 표기하고 한나라 낙랑군은 북낙랑으로 표기한다"라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낙랑왕과 신라본기에 나오는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다"고 한 뒤 "기존 학자들은 요동의 북낙랑은 생각지도 않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고 불렀다"고 지적한다.

신채호는 자명고의 나라인 남낙랑의 건국을 마한·진한·변한의 역사와 연관 지어 설명한다. "마한이 월지국으로 천도한 뒤, 옛 도읍 평양에서는 최씨가 등장해 주변 25개국을 복속시키고 하나의 대국을 이루었다"라며 이것이 "역사 기록에 나오는 낙랑국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만남도 비중 있게 다뤘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한 건 1931년이다. 이로부터 4년 뒤에 이 콘텐츠를 소재로 학자·교육자·번역가·기자·출판인·배우·소설가·영화감독·영화제작자·만담가 등을 겸한 윤백남이 <정열의 낙랑공주>라는 역사소설을 내놓았다. 2011년에 <대중서사연구> 제26호에 실린 유인혁의 논문 '호동왕자 서사의 근대적 재현 양상 연구'는 이렇게 설명한다.

"호동왕자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문학적인 형식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의 일이다. 이 해 윤백남은 <월간야담>에 <정열의 낙랑공주>와 <순정의 호동왕자> 두 편의 야담을 발표했다. 차례로 1942년에 이태준이 <매일신보>에 <왕자호동>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1948년에는 유치진이 <자명고>를 출간했다."

윤백남은 다종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그렇지만 일관성은 있었다. 2014년에 <어문론총> 제61호에 실린 정혜영 대구대 기초교육원 강사의 논문 '식민지 역사소설의 운명 – 식민지 시기 발표된 윤백남의 역사소설을 중심으로'는 "너무 여러 직종에 관여하였다는 점으로 인해서 윤백남은 누구의 기억에도 깊게 남아 있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러나 윤백남을 따라다니는 이 많은 수식어들은 의외로 '대중'이라는 하나의 용어와 연결될 때 질서정연하고 일관된 의미로 정리된다"고 평한다. 대중문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응시하면서 여러 직업을 거쳤으므로 일제강점기 대중문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인물이 윤백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열의 낙랑공주

윤백남의 <정열의 낙랑공주>는 원전인 <삼국사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원전의 빈 곳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채운 작품이다. 역사서를 많이 접하는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호동이 옥저 지방을 여행하다가 낙랑국 마지막 군주인 최리를 우연히 만났다고 말한다. 때마침 순행 중이던 낙랑왕 최리가 호동의 출중한 외모에 반해 궁궐로 데려가 자기 딸과 결혼시켰다고 <삼국사기>는 말한다.

<정열의 낙랑공주>는 호동이 우연을 가장해 최리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 만남의 계기가 됐다고 스토리를 전개한다. 최리의 수레를 끄는 말의 뒷다리에 일부러 돌을 맞춰 말을 폭주하게 한 뒤 자신의 말을 타고 달려가 최리의 말을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정열의 낙랑공주>는 호동이 낙랑국 공주와 혼인하는 과정도 <삼국사기>와 다르게 상상한다. 낙랑국 대궐에 들어간 뒤 틈만 나면 자명고 위치를 수색하던 호동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녀와 공주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 운명적인 사랑의 시작이었다고 상상한다.

공주가 자기를 짝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호동은 그를 자명고 찾는 일에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공주를 농락하자"라고 그는 결심한다.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나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시녀는 망보는 역할을 맡게 됐다는 것이 <정열의 낙랑공주>의 이야기다.

<삼국사기>는 호동이 고구려로 돌아간 뒤 공주에게 밀서를 보내 자명고를 찢어버리라고 주문하자 공주가 그대로 시행한 뒤 고구려 군대가 침입했다고 설명한다. <정열의 낙랑공주>는 일시 귀국한 호동이 공주에게 밀서를 보내기까지의 과정을 뜸 들이며 설명한다.

이 소설은 공주는 계속 편지를 보내고 호동은 이를 무시하던 상황이 이어지다가, 호동이 회심의 답장을 보냈다고 말한다. '자명고라는 비밀 무기 때문에 고구려와 낙랑은 화친할 수 없으며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호동의 편지가 공주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말한다.

윤백남의 소설도 재미있지만, <삼국사기> 기록 자체도 흥미롭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실제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한 하나의 소설이다. 실존 인물인 두 사람이 이 극에 어울리는 최고의 주연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년이>의 윤정년은 역할을 분석하면서 이 작품을 군졸 중심으로 재해석했다. 한국전쟁 직후의 인물인 그는 전란에 동원되는 군졸의 입장에서 자명고 이야기를 해석하고 즉흥연기까지 감행함으로써 전혀 엉뚱한 작품으로 바꿔놓았다. 이 때문에 드라마 속 그의 운명은 새로운 단계에 놓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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