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선생님과 혼전 임신한 제자... 만삭 여성의 마주 잡은 손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최소한의 선의>
지난 몇 해 동안 독립영화 관계자와 열혈 관객들에게 '김현정'이라는 이름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2017년, 지금은 사라진 미장셴단편영화제에서 대상에 빛나는 <나만 없는 집>, 2019년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작 <입문반>, 2023년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단편 경쟁 감독상 <유령극>으로 단편영화 감독이 누릴 수 있는 최대치에 근접한 실적을 냈다. 한동안 국내 영화학과나 단편영화제에서 감독의 단편들은 일종의 '레퍼런스' 사례로 인용되곤 했을 정도다.
정해진 순서인 듯 감독은 2023년 첫 장편 <입문반>으로 극장 개봉을 완수했다. 2024년 극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 장편 <서신교환>에 이어 장윤주와 최수인이라는 만만하지 않은 진용으로 세 번째 장편 <최소한의 선의>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과연 감독의 비범한 연출력과 개성이 장편에서도 온전히 연속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세상에 공개된 신작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혼전 임신한 제자
'희연'은 고등학교 교사다. 역시 교사인 남편과 원만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학교생활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요즘 같은 취업절벽 시대에 부부가 교사라면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한 가지 속앓이가 있다. 부부 모두 2세를 간절히 원하지만, 희연은 난임으로 몇 년째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스트레스가 날로 심해지다 보니 고3 담임에서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여보고자 고1 담임으로 이동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자택 인테리어도 새로 확 바꿔보지만, 딱히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부부는 지극정성으로 자녀를 원하는데 임신이 안 되는 게 희연은 마치 자기 책임처럼 느껴질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 순탄하던 희연의 학교생활에도 풍파가 일기 시작한다. 그가 담임을 맡은 학급 여학생 '유미'가 덜컥 임신한 것이다. 담임교사인 희연은 해당 사안을 적절히 조치해야 한다. 자신이 처한 현 상황만도 감당하기 힘들던 그는 문제만 없으면 된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누구나 유미가 임신중절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교사가 엄연히 법적으로 금지된 낙태를 권유할 수 없으니 침묵해야만 한다. 소문이 나면 극성 학부모들이 가만히 둘 리 없을 테니, 얼른 소문의 근원이 될 유미를 자퇴시켜야 한다. 희연의 대처는 딱 그 선에서 멈춘다.
그러나 유미는 희연의 바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이혼 후 두 딸을 부양하는 유미의 아빠는 일단 연락도 힘들다. 기껏 상황을 통보했지만, 학교의 행정적이기만 한 조치에 반감을 드러내는 유미 아빠와 본인의 태도는 자기 사정 챙기기에도 피곤한 희연을 한계치로 몰아간다. 미성년 제자를 배려하기보다 자기 심리 방어가 우선이던 그는 마침내 가출해 의지할 곳 없던 유미가 급식실에서 밥 먹는 걸 보고 폭발하고 만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무책임하게 일탈하고 적반하장격인 제자 vs. 어른 노릇은커녕, 제자의 자퇴를 종용하는 나쁜 선생님의 무한 대립이다. 하지만 임신이란 공통의 숙제를 무겁게 짊어진 두 여성은 어느 순간부터 공감과 이해에 접어들고, 그런 동의가 극점에 닿자 이제 동병상련의 동지적 관계로 탈바꿈한다. 그들이 각자 처한 위치, 그리고 공통의 상황이 그동안 둘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을 순식간에 돌파하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감독의 2단계 도약 과정
김현정 감독의 작품세계는 21세기 한국문학, 특히 여성 작가들의 자의식 반영이 극한에 이른 경향성과 맞닿은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의 대표작들은 영남이라는 보수적 풍토에 자리한 가부장제 가족의 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꿈을 펼치기엔 너무나 취약한 지방 도시의 주변부 입지로 인한 질곡, 기성세대에 밀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변방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다양한 경로로 표출해 왔었다.
연인과 헤어지고 시장 변화에 밀려나 폐업을 앞둔 비디오 가게 여사장의 하루('은하비디오'), 늘 예쁜 언니에게 떠밀려 2군 신세인 둘째 딸의 설움 ('나만 없는 집'), 영화의 꿈을 꾸며 서울로 왕복하며 시나리오 수업을 듣는 소심한 작가 지망생 ('입문반'), 갑자기 찾아온 엄마의 부재로 권위적인 아빠와 직면해야 하는 취업준비생 ('흐르다')까지 감독을 상징해온 자전적 경험담의 영상화는 한 단계를 마쳤다. 그렇다면 이제 감독의 창고에 남은 이야기가 과연 있을까 하고 염려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과연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다.
김현정 감독은 이후 극과 다큐멘터리, 실험영화를 넘나드는 형식 실험에 돌입한다. <유령극>과 <서신교환>이 그 과도기상의 작업에 속하는 것들이다. 감독의 도전은 아직 온전히 확립되지 못했지만, 전환기의 작품들로도 주목과 평가를 획득하는 중이다. 그 가운데 본인의 체험담을 넘어서는 보편적 주제와 서사를 풀어낼 수 있을지 도전이 <최소한의 선의>를 통해 시도된 셈이다.
감독은 본인이 직접 체험한 바 없는 임신과 결혼, 그리고 교육자의 역할에 대한 성찰로 그런 전환점의 작업을 전개한다. 자전적 경험을 넘어서는 도전은, 보편적인 현재 여성들의 삶과 그들을 짓누르는 출산을 통한 인구 재생산의 멍에, 그리고 미혼-미성년 여성의 임신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왜곡된 사회적 인식의 한계를 정면으로 붙든다. 특히 후반부 학내 구성원 회의 장면은 지금껏 감독의 영화들에선 볼 수 없었던 공개적 논쟁 제기의 불판을 열어젖힌다.
그런 파격적인 시도가 여태껏 김현정 감독의 작품세계와 다소 이질감을 불러오지만, 진화를 향한 경로로 이해한다면, 다소 거칠다거나 메시지 전달에 치중하는 면모 또한 다음을 기약하게 해줄 법하다. 깨질 것만 같은 예민한 감성과 참고 견디는 인내의 회복 탄력성이 밀고 당기던 영화 속 세계관의 비약적 확장을 위해선 일정한 시행착오는 필수 통과의례가 아닐까.
두 여성이 이룬 공감과 연대
초반부에 희연과 유미 사이엔 여성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분모가 통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간절히 아이를 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스트레스에 우울증까지 앓던 희연과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미성년자의 혼외 임신, 그리고 학교의 조치를 예 하고 따르지 않는 되바라진 요즘 아이 유미 사이엔 갈등과 적대가 팽배할 지경이다. 그런 둘의 긴장은 '급식실 동영상'으로 폭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늦은 임신에 성공한 희연은 비로소 만삭이 된 제자의 심정을 일정하게 공명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어쩌다 보니 유미의 출산을 돕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신주의에 찌들었던 과거를 벗어나 그야말로 환골탈태에 닿는다. 이 과정이 상당히 급작스러운 바람에 도식적 끼워 맞추기 혐의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창작자 찬스로 봐줘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요즘 오히려 보기 드문 이상적인 사제관계에 기막힌 상황이 되고 나서야 도달한다. 그전엔 담임이지만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수십 명의 같은 학급 아이 중 하나가 이제 특별한 개별적 주체로 각인된 셈이다. 통상적으로는 반대가 되어야 할 임신과 출산의 스승이 역전된 기묘한 이중의 사제관계이긴 하지만.
그렇게 희연과 유미는 공감과 협력의 관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이는 사태의 끝이 아니라 본격 시작과 끝없는 하강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해 추락하기 직전 준비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사회비판은 그동안 직접적인 쟁점 제기에는 일정하게 간격을 둬온 감독의 세계관이 본격 중심부로 진입하는 나팔소리처럼 들린다.
부담 떠넘기는 시대의 초상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전반부는 도덕적인 잣대를 우선하는 이들에겐 그리 옹호하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가련하게 이상화된 피해자가 아닌, 우리 시대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고 어쩌면 나 자신의 거울 속 모습 그대로인 적당히 무책임하고 뼛속까지 이기적인 군상이 주인공으로 설정되면서 감독은 그저 화면 속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스크린 바깥으로 확장하는 담론을 의도했을 법하다. 그 형상화가 다소 급박하거나 설득력이 낮다는 비판은 개별의 판단 몫이겠지만.
유미는 10대 미혼모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서툰 것 천지에 실수 연발이 거듭되면서 유미의 선택은 현실의 온갖 질곡에 접어든다. 아이 낳으라 강권하는 사회 분위기와 달리 정작 아이를 양육하고 돌보는 모성애 책임감의 구현이라 할 유미의 행보는 별다른 도움을 얻지 못한다. 현재 온갖 출산 장려정책의 위선을 정면으로 폭로하는 교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후반부 영화의 직접적 묘사는 뼈를 때리는 직격탄과 다름없다. 전체 밸런스 면에선 과도하게 튀지만 이 부분만 떼어내 활용할 여지가 충분할 지경이다.
제자의 복학을 위해 희연이 사정해 소집된 학내 회의는 영화의 제목처럼 '어른'이 실수를 저지른 청소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영문 제목처럼 우리의 최선은 정작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겐 최소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태반이다. 희연의 늦은 각성과 희생을 감수한 선의는 유미가 다시 궤도로 복귀하기 위해선 너무나 미약한 울림에 그칠 위기에 놓인다. 그 결정적 찰나가 우리 사회 위선의 총합으로 후반부를 격렬하게 장식한다.
하지만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들의 우애와 연대는 이들이 가시밭길을 걷더라도 자포자기하거나 타락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을 놓지 않게 만든다. 무책임한 학교 당국과 청소년을 소유물 혹은 사리 판단도 못 할 존재로 치부하는 어른들의 위선에 맞서는 소수의 자매애가 결국 유미를 구원할 마지막 동아줄이 되어줄 테다. 그렇게 세상의 험난함과 위악에 맞서 시련을 견디며 올바른 어른이 되기 위한 험난한 항해를 이어나갈 미래의 주역들을 응원하는 영화가 완성된다.
<작품정보>
최소한의 선의
My best, Your least
2024 한국 드라마
2024.10.30. 개봉 110분 12세 관람가
감독 김현정
출연 장윤주(희연 역), 최수인(유미 역)
제공 싸이더스 Origin
제작 싸이더스, 고집스튜디오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정해진 순서인 듯 감독은 2023년 첫 장편 <입문반>으로 극장 개봉을 완수했다. 2024년 극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 장편 <서신교환>에 이어 장윤주와 최수인이라는 만만하지 않은 진용으로 세 번째 장편 <최소한의 선의>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과연 감독의 비범한 연출력과 개성이 장편에서도 온전히 연속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세상에 공개된 신작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 <최소한의 선의> 스틸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희연'은 고등학교 교사다. 역시 교사인 남편과 원만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학교생활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요즘 같은 취업절벽 시대에 부부가 교사라면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한 가지 속앓이가 있다. 부부 모두 2세를 간절히 원하지만, 희연은 난임으로 몇 년째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스트레스가 날로 심해지다 보니 고3 담임에서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여보고자 고1 담임으로 이동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자택 인테리어도 새로 확 바꿔보지만, 딱히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부부는 지극정성으로 자녀를 원하는데 임신이 안 되는 게 희연은 마치 자기 책임처럼 느껴질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 순탄하던 희연의 학교생활에도 풍파가 일기 시작한다. 그가 담임을 맡은 학급 여학생 '유미'가 덜컥 임신한 것이다. 담임교사인 희연은 해당 사안을 적절히 조치해야 한다. 자신이 처한 현 상황만도 감당하기 힘들던 그는 문제만 없으면 된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누구나 유미가 임신중절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교사가 엄연히 법적으로 금지된 낙태를 권유할 수 없으니 침묵해야만 한다. 소문이 나면 극성 학부모들이 가만히 둘 리 없을 테니, 얼른 소문의 근원이 될 유미를 자퇴시켜야 한다. 희연의 대처는 딱 그 선에서 멈춘다.
그러나 유미는 희연의 바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이혼 후 두 딸을 부양하는 유미의 아빠는 일단 연락도 힘들다. 기껏 상황을 통보했지만, 학교의 행정적이기만 한 조치에 반감을 드러내는 유미 아빠와 본인의 태도는 자기 사정 챙기기에도 피곤한 희연을 한계치로 몰아간다. 미성년 제자를 배려하기보다 자기 심리 방어가 우선이던 그는 마침내 가출해 의지할 곳 없던 유미가 급식실에서 밥 먹는 걸 보고 폭발하고 만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무책임하게 일탈하고 적반하장격인 제자 vs. 어른 노릇은커녕, 제자의 자퇴를 종용하는 나쁜 선생님의 무한 대립이다. 하지만 임신이란 공통의 숙제를 무겁게 짊어진 두 여성은 어느 순간부터 공감과 이해에 접어들고, 그런 동의가 극점에 닿자 이제 동병상련의 동지적 관계로 탈바꿈한다. 그들이 각자 처한 위치, 그리고 공통의 상황이 그동안 둘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을 순식간에 돌파하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감독의 2단계 도약 과정
▲ <최소한의 선의> 스틸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김현정 감독의 작품세계는 21세기 한국문학, 특히 여성 작가들의 자의식 반영이 극한에 이른 경향성과 맞닿은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의 대표작들은 영남이라는 보수적 풍토에 자리한 가부장제 가족의 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꿈을 펼치기엔 너무나 취약한 지방 도시의 주변부 입지로 인한 질곡, 기성세대에 밀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변방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다양한 경로로 표출해 왔었다.
연인과 헤어지고 시장 변화에 밀려나 폐업을 앞둔 비디오 가게 여사장의 하루('은하비디오'), 늘 예쁜 언니에게 떠밀려 2군 신세인 둘째 딸의 설움 ('나만 없는 집'), 영화의 꿈을 꾸며 서울로 왕복하며 시나리오 수업을 듣는 소심한 작가 지망생 ('입문반'), 갑자기 찾아온 엄마의 부재로 권위적인 아빠와 직면해야 하는 취업준비생 ('흐르다')까지 감독을 상징해온 자전적 경험담의 영상화는 한 단계를 마쳤다. 그렇다면 이제 감독의 창고에 남은 이야기가 과연 있을까 하고 염려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과연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다.
김현정 감독은 이후 극과 다큐멘터리, 실험영화를 넘나드는 형식 실험에 돌입한다. <유령극>과 <서신교환>이 그 과도기상의 작업에 속하는 것들이다. 감독의 도전은 아직 온전히 확립되지 못했지만, 전환기의 작품들로도 주목과 평가를 획득하는 중이다. 그 가운데 본인의 체험담을 넘어서는 보편적 주제와 서사를 풀어낼 수 있을지 도전이 <최소한의 선의>를 통해 시도된 셈이다.
감독은 본인이 직접 체험한 바 없는 임신과 결혼, 그리고 교육자의 역할에 대한 성찰로 그런 전환점의 작업을 전개한다. 자전적 경험을 넘어서는 도전은, 보편적인 현재 여성들의 삶과 그들을 짓누르는 출산을 통한 인구 재생산의 멍에, 그리고 미혼-미성년 여성의 임신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왜곡된 사회적 인식의 한계를 정면으로 붙든다. 특히 후반부 학내 구성원 회의 장면은 지금껏 감독의 영화들에선 볼 수 없었던 공개적 논쟁 제기의 불판을 열어젖힌다.
그런 파격적인 시도가 여태껏 김현정 감독의 작품세계와 다소 이질감을 불러오지만, 진화를 향한 경로로 이해한다면, 다소 거칠다거나 메시지 전달에 치중하는 면모 또한 다음을 기약하게 해줄 법하다. 깨질 것만 같은 예민한 감성과 참고 견디는 인내의 회복 탄력성이 밀고 당기던 영화 속 세계관의 비약적 확장을 위해선 일정한 시행착오는 필수 통과의례가 아닐까.
두 여성이 이룬 공감과 연대
▲ "최소한의 선의"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초반부에 희연과 유미 사이엔 여성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분모가 통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간절히 아이를 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스트레스에 우울증까지 앓던 희연과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미성년자의 혼외 임신, 그리고 학교의 조치를 예 하고 따르지 않는 되바라진 요즘 아이 유미 사이엔 갈등과 적대가 팽배할 지경이다. 그런 둘의 긴장은 '급식실 동영상'으로 폭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늦은 임신에 성공한 희연은 비로소 만삭이 된 제자의 심정을 일정하게 공명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어쩌다 보니 유미의 출산을 돕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신주의에 찌들었던 과거를 벗어나 그야말로 환골탈태에 닿는다. 이 과정이 상당히 급작스러운 바람에 도식적 끼워 맞추기 혐의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창작자 찬스로 봐줘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요즘 오히려 보기 드문 이상적인 사제관계에 기막힌 상황이 되고 나서야 도달한다. 그전엔 담임이지만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수십 명의 같은 학급 아이 중 하나가 이제 특별한 개별적 주체로 각인된 셈이다. 통상적으로는 반대가 되어야 할 임신과 출산의 스승이 역전된 기묘한 이중의 사제관계이긴 하지만.
그렇게 희연과 유미는 공감과 협력의 관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이는 사태의 끝이 아니라 본격 시작과 끝없는 하강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해 추락하기 직전 준비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사회비판은 그동안 직접적인 쟁점 제기에는 일정하게 간격을 둬온 감독의 세계관이 본격 중심부로 진입하는 나팔소리처럼 들린다.
부담 떠넘기는 시대의 초상
▲ <최소한의 선의> 스틸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전반부는 도덕적인 잣대를 우선하는 이들에겐 그리 옹호하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가련하게 이상화된 피해자가 아닌, 우리 시대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고 어쩌면 나 자신의 거울 속 모습 그대로인 적당히 무책임하고 뼛속까지 이기적인 군상이 주인공으로 설정되면서 감독은 그저 화면 속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스크린 바깥으로 확장하는 담론을 의도했을 법하다. 그 형상화가 다소 급박하거나 설득력이 낮다는 비판은 개별의 판단 몫이겠지만.
유미는 10대 미혼모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서툰 것 천지에 실수 연발이 거듭되면서 유미의 선택은 현실의 온갖 질곡에 접어든다. 아이 낳으라 강권하는 사회 분위기와 달리 정작 아이를 양육하고 돌보는 모성애 책임감의 구현이라 할 유미의 행보는 별다른 도움을 얻지 못한다. 현재 온갖 출산 장려정책의 위선을 정면으로 폭로하는 교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후반부 영화의 직접적 묘사는 뼈를 때리는 직격탄과 다름없다. 전체 밸런스 면에선 과도하게 튀지만 이 부분만 떼어내 활용할 여지가 충분할 지경이다.
제자의 복학을 위해 희연이 사정해 소집된 학내 회의는 영화의 제목처럼 '어른'이 실수를 저지른 청소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영문 제목처럼 우리의 최선은 정작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겐 최소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태반이다. 희연의 늦은 각성과 희생을 감수한 선의는 유미가 다시 궤도로 복귀하기 위해선 너무나 미약한 울림에 그칠 위기에 놓인다. 그 결정적 찰나가 우리 사회 위선의 총합으로 후반부를 격렬하게 장식한다.
하지만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들의 우애와 연대는 이들이 가시밭길을 걷더라도 자포자기하거나 타락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을 놓지 않게 만든다. 무책임한 학교 당국과 청소년을 소유물 혹은 사리 판단도 못 할 존재로 치부하는 어른들의 위선에 맞서는 소수의 자매애가 결국 유미를 구원할 마지막 동아줄이 되어줄 테다. 그렇게 세상의 험난함과 위악에 맞서 시련을 견디며 올바른 어른이 되기 위한 험난한 항해를 이어나갈 미래의 주역들을 응원하는 영화가 완성된다.
▲ <최소한의 선의> 포스터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작품정보>
최소한의 선의
My best, Your least
2024 한국 드라마
2024.10.30. 개봉 110분 12세 관람가
감독 김현정
출연 장윤주(희연 역), 최수인(유미 역)
제공 싸이더스 Origin
제작 싸이더스, 고집스튜디오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